처음 가는 길이 낯설지 않습니다
[오락가락 국어사전 26] 사전을 저버리는 이는 누구?
우리 사전이 사전답지 못합니다. 사전을 엮는 학자가 너무 엉성하게 일을 했달 수 있으나, 사전을 읽는 우리가 사전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탓도 큽니다. 사전에서 엉성하거나 잘못된 곳을 낱낱이 짚어서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누구나 사전을 새롭게 엮거나 짓는 슬기로운 눈을 밝힐 노릇입니다. 말을 하고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은 사전을 가꾸는 일을 맡을 수 있습니다. 처음 해 보는 일일 수 없어요. 모든 어버이는 아이한테 말을 가르칩니다. 아이한테 말을 옳게 가르치고 물려주듯이, 우리 손으로 우리 사전을 새롭게 북돋우기를 빕니다.
배은망덕(背恩忘德) : 남에게 입은 은덕을 저버리고 배신하는 태도가 있음
저버리다 : 1.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나 의리를 잊거나 어기다 2. 남이 바라는 바를 거절하다 3. 등지거나 배반하다 4. 목숨을 끊다
배신하다(背信-) :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리다
배반하다(背反-/背叛-) : 믿음과 의리를 저버리고 돌아서다
‘배은망덕’이나 ‘배신하다·배반하다’ 뜻을 살피면 ‘저버리다’일 뿐입니다. 세 한자말은 “→ 저버리다. 등지다. 등돌리다”로 다루면 됩니다. 사전은 세 한자말 모두 겹말풀이를 합니다. 뜻을 옳게 살피지 못하니 자꾸 한자말을 끌어들이면서 겹말·돌림풀이가 됩니다.
묵묵하다(默默-) : 말없이 잠잠하다
말없다 : x
말없이 : 1. 아무런 말도 아니 하고 2. 아무 사고나 말썽이 없이
잠잠하다(潛潛-) : 1. 분위기나 활동 따위가 소란하지 않고 조용하다 ≒ 잠연하다 2. 말없이 가만히 있다
가만히 : 1. = 가만 2. 움직임 따위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은은하게
가만 : 1.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 말 없이 2. 어떤 대책을 세우거나 손을 쓰지 않고 그냥 그대로 3. 마음을 가다듬어 곰곰이 4. 말없이 찬찬히
‘묵묵하다’가 “말없이 잠잠하다”를 뜻한다는데 ‘잠잠하다’는 “말없이 가만히 있다”를 뜻한다니, 겹말풀이입니다. 더구나 ‘가만히’는 “말없이 찬찬히”를 뜻하기도 하기에 겹겹말이지요. ‘묵묵하다’는 “→ 말없다”로 다루고, ‘잠잠하다’는 “→ 조용하다. 말없다”로 다룰 노릇입니다. 사전에는 ‘말없이’만 나오지만, 앞으로는 ‘말없다’도 실어야지 싶습니다.
초면(初面) : 처음으로 대하는 얼굴. 또는 처음 만나는 처지 ≒ 첫낯
첫낯 : = 초면(初面)
첫얼굴 : x
처음 보는 얼굴이면 ‘첫얼굴’이라 하면 될 텐데, 이 낱말은 사전에 없고 ‘초면’을 싣습니다. 이러면서 ‘첫낯’을 비슷한말로 다루는데, 정작 ‘첫낯’에는 뜻풀이를 안 달았군요. ‘초면’은 “→ 첫낯. 첫얼굴”로 다루거나 사전에서 털어낼 일입니다.
밑지다 : 들인 밑천이나 제 값어치보다 얻는 것이 적다. 또는 손해를 보다
손해(損害) : 1.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밑짐 ≒ 손(損)·해손(害損) 2. 해를 입음
해(害) : 이롭지 아니하게 하거나 손상을 입힘. 또는 그런 것
손상(損傷) : 1. 물체가 깨지거나 상함 2. 병이 들거나 다침 3. 품질이 변하여 나빠짐 4. 명예나 체면, 가치 따위가 떨어짐
‘밑지다’를 “손해를 보다”로 풀이하는데, ‘손해’는 ‘밑지다’로 풀이하는 돌림풀이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 ‘손해·해·손상’은 바탕뜻을 “→ 밑지다”로 다룰 만합니다. 이러면서 쓰임새를 더해 ‘손상’이라면 “→ 밑지다. 잃다. 다치다. 나빠지다. 떨어지다”로 다룰 수 있습니다.
음절(音節) : 1. [언어] 하나의 종합된 음의 느낌을 주는 말소리의 단위. 몇 개의 음소로 이루어지며, 모음은 단독으로 한 음절이 되기도 한다. ‘아침’의 ‘아’와 ‘침’ 따위이다 ≒ 낱내·소리마디 2. [음악] = 음곡(音曲)
낱내 : [언어] = 음절(音節)
소리마디 : [언어] = 음절(音節)
한국말로 ‘낱내·소리마디’가 있으니 풀이말을 안 붙이는 사전입니다. 한국말을 제대로 쓰자면 ‘음절’은 “→ 낱내·소리마디”로 다루고, ‘낱내’하고 ‘소리마디’라는 낱말을 지은 얼개를 밝혀서, 두 낱말을 알맞게 쓰도록 이끌어야지 싶습니다.
수제품(手製品) : 손으로 만든 물건. ‘손치’로 순화 ≒ 수제(手製)
손치 : x
-치 : ‘물건’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수제(手製) : 1. 손으로 만듦 2. = 수제품
손으로 지은 것을 두고 ‘손치’라고 한다면, 이런 말을 잘 살려서 쓰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전에 ‘손치’를 올림말로 안 실어요. 왜 이럴까요? 손으로 짓는 일이라면 ‘손짓다·손짓기’를 새말로 삼을 만하고, ‘손치질·손치짓’도 새말로 삼을 수 있습니다. ‘수제품’은 “→ 손치”로, ‘수제’는 “→ 손짓다. 손치질”로 다루어 줍니다.
이해하다(理解-) : 1. 깨달아 알다. 또는 잘 알아서 받아들이다 2. = 양해하다
양해하다(諒解-) :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이다
알다 : 2. 어떤 사실이나 존재, 상태에 대해 의식이나 감각으로 깨닫거나 느끼다
깨닫다 : 1. 사물의 본질이나 이치 따위를 생각하거나 궁리하여 알게 되다 2. 감각 따위를 느끼거나 알게 되다
뜻을 곰곰이 살피면 ‘이해하다’는 “→ 헤아리다. 깨닫다. 알다”로 다룰 만합니다. 이러면서 ‘알다·깨닫다’가 돌림풀이가 안 되도록 가다듬을 노릇이지요. 그리고 ‘양해하다’라는 한자말은 사전에서 털어내 줍니다.
기도(祈禱) :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빎. 또는 그런 의식 ≒ 도기(禱祈)·도이(禱爾)
빌다 : 1.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하여 달라고 신이나 사람, 사물 따위에 간청하다 2. 잘못을 용서하여 달라고 호소하다 3.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다
비손 : [민속] 두 손을 비비면서 신에게 병이 낫거나 소원을 이루게 해 달라고 비는 일 ≒ 비숙원
비숙원 : = 비손
비는 일을 한자말로 ‘기도’라 한다면서 ‘도기·도이’를 비슷한말로 사전에 싣지만, 두 한자말은 털어낼 노릇입니다. ‘기도’는 “→ 빌다. 비손하다”로 다루면 되어요.
간청하다(懇請-) : 간절히 청하다 ≒ 뇌청하다
청하다(請-) : 1.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남에게 부탁을 하다
부탁(付託) : 어떤 일을 해 달라고 청하거나 맡김. 또는 그 일거리
‘간청·청하다·부탁’이 맞물리면서 돌림풀이인 사전입니다. 이 같은 한자말을 써야 한다면 쓰면 되지만, 뜻풀이를 제대로 가다듬을 노릇입니다. 뜻을 헤아려 본다면, 세 한자말은 “→ 애타게 바라다. 애타게 빌다”나 “→ 바라다. 빌다. 해 주기를 바라다. 해 주십사 묻다”나 “→ 해 주기를 바라다. 해 달라고 맡기다”쯤으로 다룰 만합니다.
초행(初行) : 1. 어떤 곳에 처음으로 감 2. 처음으로 가는 길 ≒ 초행길·생로(生路)·첫길
초행길(初行-) : = 초행(初行)
생로(生路) : 처음 가는 길. 또는 익숙하지 아니한 길
첫길 : 1. 처음으로 가 보는 길. 또는 막 나서는 길 2. 시집가거나 장가들러 가는 길
처음 가는 길이면 ‘첫길’이라 하면 됩니다. ‘처음길’이나 ‘첫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초행·생로’는 굳이 안 써도 됩니다. 사전에서 털어낼 만하고, 사전에 싣더라도 “→ 첫길. 처음길. 첫걸음”으로 다룰 노릇입니다. ‘초행길’은 잘못 쓰는 겹말이니 마땅히 사전에서 털어야겠습니다. 이밖에 ‘첫마실’ 같은 낱말을 새로 지어서 즐겁게 써 볼 만합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