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
전민조 지음 / 눈빛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지난 2005년 5월, 전민조 선생 전시회를 보고 난 뒤 쓴 글입니다. 이래저래 검색을 해 보다가, 이 좋은 사진책 하나가 제대로 빛을 못 받고 있구나 싶어서, 예전에 써 두었던 소개글을 살짝 붙여 봅니다. 우리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고, 우리 삶터를 살가이 돌아보는 눈길을 쓰다듬어 주는 사진이 묻혀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마음을 간직한 '섬' 사진
- 전민조 사진책 <섬>을 보다



<1> 고무신을 신은 사람들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서해안 백령도, 홍도, 소흑산도, 성남도, 진목도, 대마도, 소마도, 라매도, 조도, 관매도, 여서도, 우도, 연화도, 연대도, 수우도, 오륙도, 울릉도, 독도… 들을 두루 다닌 전민조 님 사진책이 나오고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지난 15일에는 서울에 있는 전시장에서 조촐한 강연자리도 있었습니다.

사진책은 진작에 눈빛 출판사 인터넷 누리집에서 소식을 들었고, 성균관대 앞 <풀무질>에서 책방 아저씨와 함께 구경했지만, 아직 사 놓지 않았습니다. 전민조 님 강연자리에서 말씀을 들은 뒤, 그날 그 자리에서 사면 책에 서명을 해 준다고 해서요.

사진 전시장에 들어서니 맨 처음으로 우리를 반기는 사진은 어린 계집아이가 자기보다 어린 동생을 풀로 엮은 자리에 눕혀 놓고 재우는 모습입니다. 동생은 궁둥이가 트인 바지를 입고 있습니다. 풀자리(짚이 귀하고 가난한 집에서는 들과 산에서 나는 풀을 베어다가 자리를 엮었다고 합니다) 옆에는 누나가 신는 듯한 검정 고무신과 어린 동생이 신는 듯한 꽃신이 흩어져 있습니다. 둘이 있는 풀자리 앞 돌담 위에는 까만 돼지가 둘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벽에 차례차례 걸린 사진을 봅니다. 하나같이 수수한 옷차림에 얼굴 까맣고 눈 맑은 사람들 모습입니다. 섬사람들 사진인 터라 사진이 찍힌 곳도 바다나 바닷가, 갯벌, 배 위나 배 둘레입니다. 섬에서는 텃밭 하나도 소중하기에 손바닥 만한 밭 하나도 일구려고 힘쓰는 모습도 보입니다. 이렇게 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발을 보니, 거의 다 고무신을 신습니다. 맨발인 사람도 참 많습니다. 운동화나 구두를 신은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군요. 좀더 거슬러 올라간 옛날엔 고무신도 드물고 짚신이 훨씬 많았겠죠?

저는 지난해 가을부터 고무신을 신고 다닙니다. 처음에는 시골에서 일할 때만 신었는데 이제는 서울로 갈 때도 고무신을 신습니다. 한동안 고무신과 제 발이 맞지 않아 뒤꿈치가 긁히고 살갗이 벗겨졌지만, 이제는 하루 내내 고무신만 신고 다녀도 발이 긁히거나 아프거나 다치지 않습니다. 어느새 고무신과 제 발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2> 야윈 소를 먹이는 아이


사진책 <섬> 겉을 수놓은 사진은 바다가 보이는 섬 들판에서 풀을 먹이는 아이 모습입니다. 등에는 자기 키 만한 지게를 진 아이도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소는 눈이 퀭해 보이는데 등이 칼날처럼 곧습니다. 갈비뼈도 보입니다. 배가 홀쭉하군요. 섬사람들도 배불리(또는 마음껏 많이) 먹기 어려웠을 테니, 이 섬사람들이 기르던 소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러고 보니 사진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넘겨보았을 때 '살이 찐 사람'이 하나도 안 보입니다. 모두들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합니다. 먹을거리가 많지는 않았어도 서로 나누며 살았기에 이렇게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해 보일까요? 다시 사진책을 넘기며 옷차림을 주욱 살피니 입성도 비슷합니다. 옷도 신도 몸도 비슷한 이들은 마찬가지로 비슷비슷한 집에서 비슷한 방에서 살아갑니다.

어린 계집아이가 홀로 툇마루에서 밥을 먹는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아직 숟가락도 한 손으로 꼬옥 쥐지 못하는 어린 아이인데, 살이 통통합니다. 그렇다고 살이 찐 몸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라면 으레 그러하듯 살짝 통통한 편입니다. 보리밥에 물만 반찬으로 먹는 아이인데도 몸이 이러하군요. 먹는 밥은 넉넉하지 못해도, 넉넉한 바다와 공기와 물과 바닷것이 있기 때문일까요?

고깃배가 가득가득 넘쳐서 돌아왔습니다. 어른들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잡은 고기들을 부려 놓습니다. 그 옆에 발가벗은 사내아이도 일손을 거듭니다. 이어지는 사진에서도 발가벗은 아이가 나옵니다. 반바지만 입은 아이하고 갯벌에서 놀다가 사진 한 장 찍혔습니다. 반은 발가벗은 채로 엄마가 일하는 시늉을 하는 아이도 보입니다. 어머니처럼 머리에 무엇인가를 이고 싶은지 텅 빈 바소쿠리를 이고 엄마 앞에서 길을 이끕니다. 그 뒤로는 엄마가 있고, 그 뒤로는 어린 누나가 머리에 짐을 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뭍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섬 안에서 맴돌지만, 이 섬에서도 저희들끼리 즐겁고 놀고 즐겁게 어울리며 즐겁게 일을 합니다(그렇지만 늘 '즐겁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바쁠 때면 그지없이 고단하고 고달픈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이제 밥값을 할 만한 나이가 되었다고 할 때면 어김없이 자기 몸에 맞는 지게를 지고 땔감이고 풀베기고 무엇이고 해야 할 테니까요). 요새로 치면 초등학교에 들어갈 만한 나이에도 어른과 함께 일을 하고, 마땅히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우리 삶터를 오롯이 들여다보기


전민조 님이 담은 '섬 사진'에 드러나는 모습은 섬사람들 삶만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 삶입니다. 뭍이건 섬이건 가릴 것 없이 보통으로 우리가 살아온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들, 보통으로 살아온 사람은 우리 자신이 살아온 자취를 남기지 못합니다. 남길 틈도 없고, 남길 만한 장비(사진기, 필름 따위)도 없습니다. 어쩌면 전민조 님처럼 사진기자가 되어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영영 잃어버리거나 잊혀진 모습이 되었을 '우리들 삶터 사진'이에요.

사진책 <섬>은 세월이 흐르고 흐르면서 빛이 바래는 한편, 도시사람들 구경거리와 놀이터로 무너져 버린 섬 모습을 아직은 깨끗한 채로 있을 때를 비추어 보여줍니다. 그야말로 고이 남은 몇 안 되는 소중한 발자취이자 생활문화 역사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섬사람들 삶으로 좀더 깊숙하게 들어가지 못했다는 대목. 전시회 사진과 사진책 사진에는 미처 들어가지 못했는지 모르겠는데, 섬사람들 살림살이, 집안 구석구석,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습,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고된 일을 하는 모습이 좀더 낱낱이 드러나지 못했다는 대목이 아쉽습니다. 일하는 어른들 모습도 좀 멀찍이 떨어져서 살펴본 구경꾼 눈이라는 대목도 보입니다.

그러나 전민조 님을 다른 구경꾼하고 똑같이 여길 수 없습니다. 지금은 잠깐 들렀다 가지만 앞으로 다시 찾아올 뭍손님입니다. 섬에서 섬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은 아니지만, 살갑게 찾아와 부드럽게 손을 맞잡고 한 밥상에서 보리밥을 나눠 먹는 고맙고 반가운 뭍손님입니다. 섬에서만 사느라 뭍 소식을 모르고 뭍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람들한테 뭍 소식과 뭍 세상을 차근차근 일러 주는 이야깃손님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섬 소식과 섬 세상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어 주는 사랑손님이 되기도 할 테고요.


.. 수평선을 바라보며 염소와 송아지를 모는 귀여운 아이들, 물동
이와 땔감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소녀들과 아낙네들의 표정은 너
무나 평화로웠다 .. <전민조 님 말>



강연자리에서 전민조 님은 "어린이를 천사로 봤어요. 꾸밈이 없어요. 그런데 세상에 훌륭한 사람들은 꾸밈이 많아요. 각색이 되고 조작이 되고… 어린이들이 어른한테 표정을 꾸미고 해서 만들 수 없잖아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섬사람들 얼굴에서 느낀 평화로움이란 바로 이런 모습이지 싶습니다. 남 앞에서 꾸미거나 가릴 것이 없이 착하게 사는 모습, 서로 살가운 이웃으로 여기며 길손한테도 밥상 하나 차려 주는 마음씀, 이런 평화로움이겠지요.

그런데 1970년대 첫머리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두루 평화로움을 잃었습니다. 이 '평화로움을 잃음'은 바로 오래된 봉건통치 사회를 거쳐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몇몇 독재정권까지 이어오는 동안 짓밟히고 짓눌리고 시달리느라 마음이 다치고 곪고 병들어 버린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생겨 버린 사회이자 삶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세상이 팍팍하고 사람들 마음씀도 거칠어질 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전민조 님이 찾아다닌 섬에서 만난 사람들한테서 느낀 수수함과 살가움은 사진마다 고이 남고 아름답게 이어질 수 있지 싶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