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할 줄 아는 사람이란 없다
못할 줄 아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고 느끼며 살았다. 둘레에서는 으레 말한다. “내가 어떻게 해?”라든지 “내 나이에 어떻게?”라고. 이런 소리를 들을 때면 두 가지로 마주한다. 첫째, 흘려버린다. 둘째, 흘리지 않고 돌려준다. 나랑 아무 마음끈이 안 이어진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굳이 보태고 싶지 않으니 흘려버리고, 나랑 조그맣게라도 마음끈이 이어졌구나 싶은 사람이라면 살며시 말을 보탠다. “‘내가 어떻게 해?’ 하고 여기니 못하지요. ‘나는 즐겁게 해야지!’ 하고 여기니 합니다. 모든 삶은 스스로 입으로 내뱉는 생각으로 움직입니다.” 못할 줄 아는 사람이란 참말로 있을 수 없다. 못하고 만다는 생각을 사회의식으로 길든다. 학교를 다니면 다닐수록 사회의식에 젖어들고, 사회살이를 하면 할수록 쳇바퀴에 맴돈다. 학교나 사회가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지만, 스스로 마음을 곧추세우지 않고 무턱대고 학교를 다니거나 사회에 뛰어든다면 ‘남이 시키는 일’만 하고 말아 ‘스스로 짓는 일’을 까맣게 잊는다. 이러면서 스스로 못한다고 여긴다. 우리는 누구나 무엇이든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글을 못 쓸 사람이 있을까?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글쓰기를 오랫동안 두려워했는가? 첫째, 옛날에는 권력자 아닌 이가 글을 쓰면 칼로 목아지를 내리쳤다. 둘째, 오늘날에는 글쟁이란 이들이 글쟁이 아니고서는 글을 못 쓸 뿐 아니라 글쓰기를 가르칠 수 없다고 다그친다. 권력자 서슬하고 글쟁이 그늘을 털어내자. 나를 보자. 나 스스로 나를 보는 눈이 되면서 글을 쓰자. 이러면 된다. 누구나 글님이요 글벗이며 글지기이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