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의 발견
정승철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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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독재가 빼앗은 말 ‘사투리’
― 방언의 발견
 정승철
 창비, 2018.3.30.


  전남 고흥이란 고장에서 살며 이웃을 만나면 ‘고흥말’을 듣기 몹시 어렵습니다. 고흥 이웃님은 ‘고흥에서 나고 자란 사람’ 곁이 아니라면 고흥말을 좀처럼 안 씁니다.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나 할아버지쯤 되면 고흥 텃사람 곁이 아니어도 더러 고흥말을 쓰지만, 이분들도 되도록 고흥말 아닌 서울말을 쓰려고 애씁니다.

  광주나 대구나 부산 같은 고장에 마실을 가도 그곳에서 마주하는 분들 입에서 광주말이나 대구말이나 부산말은 좀처럼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광주에서도 대구에서도 부산에서도 그 고장 텃사람 곁이 아니라면 웬만해서는 서울말을 쓰려고 하지요.


‘표준어’는 19세기의 제국주의 또는 국가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그것은 서양 제국주의 국가(일본 포함)에서 국민의 의사 전달 수단을 통일하여 국가적 역량을 결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타국에 대한 침탈을 도모하기 위해 제안되었다. 그러기에 종전 후 제국주의가 종식되면서 이들 나라에서는 효력이 다한 표준어 개념을 폐기 또는 유보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보면 광복 이후에 우리는 산업화를 위해 그러한 표준어를 정책적으로 수용한 것이 된다. (6쪽)


  《방언의 발견》(정승철, 창비, 2018)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사투리를 생각해 봅니다. 이 책은 한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표준말 정책을 왜 세웠’는가를 짚으면서, 한국하고 일본을 뺀 모든 나라는 제국주의·식민지 다툼이 저문 뒤로는 나라에서 표준말 정책을 걷어냈다고 밝힙니다. 일본조차도 나중에는 표준말 정책을 모두 걷어냈다지요.

  한국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등쌀에 밀려 서울말을 표준으로 삼아 윽박지르는 물결이 처음 일었다고 합니다. 해방 뒤 군사독재가 선 뒤로는 낡은 제국주의마냥 사투리를 깔보고 서울말을 높이는 교육 정책까지 섰다고 해요.


일제강점기에 표준어가 차츰 자리를 잡아가면서 사투리(나아가 지방문화)를 무시하는 경향이 사회 표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학교교육 현장에서조차 사투리를 ‘틀린 것’이거나 심지어 ‘야만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편견이 툭 불거져 나오기도 했다. (67쪽)

그러한 가운데 전국의 지방 사투리는 전근대적이며 국가 분열을 조장하는 말, 나아가 국어를 오염시키는 바르지 않은 말로 여겨졌고, 결국 표준어로 고쳐져야 하는 말이 되었다. 국가 주도의 산업화가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편파적 경쟁 선상에서 우세한 표준어를 마주해 열세의 사투리가 서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1990년대 중반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44쪽)


  제가 하는 일이 한국말사전 짓기이다 보니, 여러 고장으로 이야기를 펴려고 마실을 곧잘 다니는데, 이때에 으레 그 고장에서든 그곳 교사하고 어른하고 푸름이한테 “왜 제 앞에서는 사투리를 안 쓰시나요? 저는 사투리를 듣고 싶어요.” 하고 여쭙니다. 이때마다 저한테 “어릴 적부터 사투리를 쓰면 촌스럽고 나쁘다는 꾸중을 들어서, 서울말 쓰는 사람하고 있을 적에는 사투리가 저절로 안 나와요” 하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게도, 이분들이 저한테는 서울말을 쓰셔도 이분 옆에 있는 텃사람한테는 사투리를 써요. 한창 서울말로 얘기를 하시다가도 전화를 받으면 곧바로 사투리로 바꿉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한국에서는 부산이나 대구에 사는 분들조차 부산말하고 대구말을 서울말 밑에 두는 셈입니다. 이렇게 큰 도시에 사는 분마저 서울말을 높이 여기고, 서울말을 안 쓰면 ‘시골스럽다는 놀림을 받고 꾸중을 듣는다’고 여기니, 대구 곁에 있는 구미나 청도라든지, 광주 곁에 있는 화순이나 보성이라면 사투리 말씨 때문에 얼마나 놀림을 받았을까 어림해 볼 만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전남 고흥에 살며 가만히 지켜보면, 고흥말은 고흥 곁에 있는 큰도시 순천에 밀려 ‘시골말 놀림’을 받습니다. 고흥군에서는 면소재지 사투리가 읍내 사투리에 밀려 ‘시골말 놀림’을 받아요. 다시 작은 마을(행정구역 ‘리’인 곳)은 면소재지 사투리에 밀려 ‘시골말 놀림’을 받습니다. 큰 틀에서 보면 서울말은 다른 큰도시를 내리누리고, 여러 큰도시는 군을 내리누르며, 군에서 읍은 면을 내리누르는데, 면조차 작은 마을을 내리누르는 얼개입니다.


현대의 선진국 중에 헌법에 공용어를 아예 명시하지 않은 나라는 영국과 미국뿐이다. 이 두 나라에서는 언어정책을 전담하는 국가 공식 기관도 물론 없다. 언어 규범화는 권위가 인정된 문법서나 사전 등의 출판물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183쪽)

한국사람들은 오랫동안 격식적 상황, 즉 공식적 자리에서는 표준어를 쓰도록 교육받아 왔다. 사투리 화자들에게 격식어로서 표준어를 강요해 온 것이다. 그런데 방송에서 사투리라니! 특히 뉴스 및 시사평론과 같은 보도 프로그램에서 일상적 사투리란 더욱더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212쪽)


  《방언의 발견》은 옛 신문·잡지, 방송·영화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에서 사투리가 얼마나 놀림이나 따돌림을 받았는가를 차분히 짚습니다. 이러면서 오늘날 사투리를 잘 살려서 쓴 방송이나 영화나 책을 몇 가지 보기를 들어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사투리를 잘 살려서 쓰는 책·잡지’ 가운데 하나를 빠뜨렸습니다. 열 몇 해째 사투리로 잡지를 엮는 《전라도닷컴》이 있습니다. 2000년에는 웹진으로 처음 나왔고, 2002년 3월부터 종이책으로 나온 잡지입니다. 저는 《전라도닷컴》을 다달이 받아보면서 전라말을 눈하고 입에 익혀 보려고 아장걸음을 걷습니다.

  한국에서 고장말로 책이나 잡지를 엮는 일이 매우 드물 뿐 아니라, 고장말을 썼다가는 책이나 잡지가 안 팔린다는 소리를 듣기 일쑤인데, 《전라도닷컴》은 2002년부터 씩씩하게 ‘사투리 잡지’ 한길을 걸어요. 여러 고장에서는 이 잡지를 지켜보면서 ‘경상말 잡지’, ‘제주말 잡지’, ‘충청말 잡지’, ‘강원말 잡지’를 내자는 기운을 얻는다고 합니다. 나라나 지자체에서 안 하거나 못 하는 일을 작은 고장에서 작지만 야무진 걸음으로 일구는 만큼, 앞으로 《방언의 발견》이 2쇄를 찍는다면, 이처럼 사투리를 알뜰하며 곱게 밝히는 발자국을 더 찬찬히 살펴서 담아 주기를 바랍니다. 2018.5.1.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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