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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 사진가
플로랑 실로레 지음, 임희근 옮김 / 포토넷 / 2017년 8월
평점 :
사진책 읽기 369
사진가는 죽음 아닌 삶을 그리는 사람
― 로버트 카파, 사진가
플로랑 실로레/임희근 옮김
포토넷, 2017.8.1.
1936년 8월, 바르셀로나 프랑스역. 우리는 열기 가득한 이 도시에 도착한다. 거리 곳곳마다 무장한 군중의 술렁임과 정치의식이 피부에 와닿는다. 그리고 내가 필름에 담는 이 숱한 미소들. 민중의 야단법석에서 느껴지는 이 소통의 기쁨. (13쪽)
1936년 9월. “게르다, 마드리드에 가면 나 당신과 결혼할 거야.” “이런 카파, 내가 누군데? 게르다 타로가 결혼이라는 부르주아 제도에 굴복할 것 같아? 어떻게 여기서, 한창 퇴각 중에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숱한 시체, 부상자와 고아들 무리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데. 우리 필름엔 죽음이 땀처럼 배어 나와, 카파.” (17쪽)
사진을 어떻게 찍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사진은 몸으로 찍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몸을 움직여야 찍을 수 있거든요. “사진은 마음으로 찍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몸만 움직인다고 해서 사진다운 사진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몸하고 마음이 함께 움직여서 사진기 단추를 눌러야 비로소 이야기가 흐르는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진은 삶으로 찍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몸이며 마음이 움직였어도 이웃 삶을 읽지 못한다면 겉훑기로 그칩니다. 이웃이 살아가는 나날이나 터전이나 모습을 고스란히 읽을 뿐 아니라, 이웃이 어떠한 꿈을 그리는가를 찬찬히 읽기에 비로소 사진 한 장을 새로 찍어요.
“사진은 사랑으로 찍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살섞기는 사랑이 아닙니다. 고이 여기며 맑게 아낄 줄 아는 삶이 바로 사랑입니다. 삶을 읽더라도 삶을 사랑으로 마주하며 얼싸안는 몸짓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겉을 넘어 속을 바라보려고 하되, 애써 바라본 속삶을 어떻게 삭이거나 헤아려서 서로 아름다이 나아갈 길을 열도록 사진 한 장으로 갈무리할 만한가를 모르기 일쑤입니다.
1937년 2월. 사람들은 내가 나만의 스타일을 찾았다고들 한다. 전투 중 찍은 일련의 사진들, 감성 풍부한 짧은 설명이 곁들여진 그 사진들. 편집진은 좋아서 죽는다. 게르다가 몸으로 보여주는 용기가 나날이 조금씩 내게 깊은 인상을 준다. 방공 사이렌이 울려도 그녀는 절대 망설이지 않는다. (18쪽)
1937년 7월 30일. 게르다의 부고는 〈뤼마니테〉 1면에 실렸다. 그녀는 전사한 최초의 여성 사진가였다 … 게르다의 남자 형제들은 그녀에게 라이카 카메라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나를 원망했다. 그녀는 스물일곱 살을 앞두고 있었다. (25쪽)
사진책 《로버트 카파, 사진가》(플로랑 실로레/임희근 옮김, 포토넷, 2017)를 읽습니다. 《로버트 카파, 사진가》는 사진을 말하고 사진가를 말하기에 사진책입니다. 그리고 사진을 만화로 담아서 보여주기에 만화책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진을 만화로 담아 이야기를 지피니 이야기책이기도 합니다.
사진책이면서 만화책이고 이야기책인 이 책은 사진을, 삶을, 사랑을, 무엇보다 이 모두를 둘러싼 우리 이야기가 어디에서 비롯하여 어디로 흐르는가를 차분히 짚으려고 합니다.
1938년 10월 25일. 정처 없이 떠도는 이 사진쟁이의 삶은 대체 뭐 하자는 짓인가? 우리 사진들을 살릴지 여부를 통제할 권리가 없는 편집장들을 옹호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권리를 수호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다시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 가지 계획이 떠오른다 … 독립해서 활동하는 재능 있는 젊은 사진가들의 에이전시를 협동조합 모델로 창립하는 거다. 더 이상 우리의 고용주가 아닌 언론사들에 사진저작권을 그냥 양도하지 말고 그 권리를 우리가 가진다면? (33쪽)
《로버트 카파, 사진가》를 읽으며 ‘게르다 타로(Gerda Taro/Gerda Pohorylles)’라는 이름을 새롭게 만납니다. 이 책을 지은 분은 게르타 타로란 분이 남긴 글을 읽고서 가슴이 찌릿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버트 카파 + 게르다 타로’라는 얼거리로 만화를 그려 사진하고 삶하고 사람이 이어진 고리를 밝히고자 했다는군요.
이 대목을 헤아리고 보니 책이름이 왜 “로버트 카파, 사진가”인가 알 만합니다. ‘로버트 카파 + 사진가 = 로버트 카파 + 게르다 타로’요, 로버트 카파라는 한 사람이 종군사진가이자 우리한테 ‘사진가’로서 널리 이름을 아로새긴 바탕에 게르다 타로라는 분이 있었구나 싶어요.
누구보다 씩씩했고, 누구보다 새롭게 앞길을 그릴 줄 알았으며, 뒤로 물러서거나 한발 빼는 일이 없었다는 게르다 타로 님은 ‘여성 종군사진가’ 가운데 처음으로 전쟁터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탱크에 밟혀서 죽었다지요. 다만 ‘여성’이라는 말은 빼야지 싶어요. 똑같이 종군사진가입니다. 무엇보다 이이는 늘 함께 사진을 찍던 한 사람을 크게 바꾸었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언제나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1941년 3월. 항구의 통관 당국은 꽤나 애를 먹인다. 미국 영주권자이면서 헝가리 출신의 종군사진가라는 내 지위 탓에 통관만 할라치면 일이 꼬인다. (47쪽)
1944년 6월 6일. 주변에 비 오듯 쏟아지는 함포 사격으로 귀가 먹먹하고, 멀리는 기관총 쏘아대는 따다닥 소리가 들린다. 나는 네모상자에 달라붙는다. 찰칵. 너는 진짜로 여기 있는 게 아니야. 찰칵. 나는 거리를 어림잡아 초점을 맞추고, 두 손은 걷잡을 수 없는 경련으로 덜덜 떨린다. 찰칵. 뷰파인더에 눈을 딱 붙이고 있어, 제기랄! 이건 배 안에서 토하던, 방금 본 그 녀석이 아니야. 되밀려오는 파도에 내장이 둥둥 뜬 채 흔들리는 건 그가 아니야. 찰칵. (59쪽)
사진가는 죽음 아닌 삶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피바람이 몰아치는 싸움터에서 죽은 사람들을 찍고 무너진 집을 찍는다고 하더라도, 이 죽음수렁에서 살아가려는 사람을 가만히 비춥니다. 죽이고 죽은 끔찍한 땅에서 새롭게 살아나고 일어서려는 눈빛을 하나하나 비춰요.
종군사진가 필름에는 죽음이 땀방울처럼 흐를 테지만, 이 죽음 어린 땀방울이란, 바보스러운 죽임짓을 멈추고 사랑스러운 살림길로 가기를 바라는 뜻을 품은 숨결이지 싶습니다.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죽음 곁에서 사진기를 쥐었으나 죽음을 떨치려 합니다. 죽음 아닌 삶을 보려 하면서 한 걸음을 딛고 우뚝 서서 찰칵 한 장을 찍습니다. 죽음이 비처럼 쏟아지는 한복판이지만, 이 빗줄기 같은 죽음을 다시 떨치고 한 걸음을 내딛은 뒤 더 씩씩하게 우뚝 서서 찰칵 새로 한 장을 찍습니다.
한 걸음 두 걸음 기운을 내어 나아갑니다. 한 장 두 장 손에 힘을 주어 단추를 누릅니다. 스스로 기운을 내지 않으면 죽음수렁에 갇혀 벌벌 떨다가 사진 한 장 못 찍을 뿐 아니라, 그대로 죽고 말 테지요. 삶을 찍으려고 한 발을 내딛습니다. 사랑을 찍으려고 한 발을 뻗습니다. 사람을 찍으려고 한 발을 듭니다.
1946년 5월. 난 언제든 카메라 가방을 메고 〈라이프〉든 다른 언론사든 일을 받아 떠나야 할 처지다. 뒤에 아내와 어쩌면 아이까지 남긴다는 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73쪽)
1954년 5월 25일. 빨리! 이 친구들이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전에 셔터를 눌러. 찰칵. 두 번 눌러. 혹시 모르니까 좀더 잘 찍으려면 옆으로 한 발짝……. (85쪽)
《로버트 카파, 사진가》는 로버트 카파 님이 1954년 5월 25일, 지뢰를 밟고 이슬처럼 스러진 날까지 이야기를 그립니다. 그때 그곳에서 어떤 마음으로 사진기에 눈을 박고 걸었는가를 그립니다. 지뢰밭 사이를 걸으면서도 지뢰 아닌 사진을 그리고, 사람을 그리고, 삶을 그리던, 무엇보다 사랑을 그리면서 한 걸음을 내딛으려던 몸짓을 그립니다.
이러다가 로버트 카파 님은 마지막 단추를 누르고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요. 사진기를 떨어뜨리고 몸뚱이가 사라집니다. 오래도록 그리던 이 품으로, 이제는 사진기도 사진짐꾸러미도 더 어깨에 걸치지 않아도 될 곳으로, 전쟁 아닌 사랑이 흐르는 보금자리로, 먼저 떠난 게르다 타로 님이 있는 하늘로, 가볍게 날아갑니다.
그리고 우리 곁에 사진이 남습니다. 한 발 두 발 꿋꿋하게 내딛으면서 찍은 사진이 남습니다. 신문사나 잡지사 소유물이 아닌 사진가 스스로 일군 땀방울로 세운 ‘사진두레(사진 에이전시)’에 남긴 사진이 오래오래 퍼지면서 이야기꽃이 됩니다. 전쟁을 찍으면서 사랑을 그린 사진이 남습니다. 전쟁 한복판에서 사람살이를 담은 사진이 남습니다. 죽이고 죽는 피범벅에서 길어올린 따스한 삶을 그리는 마음이 사진으로 남습니다. 2018.4.20.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사진읽기/사진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