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자살이란 신종 치료법을 개발한 이탁오 박사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고진

정신자살 - 개정판 ㅣ 변호사 고진 시리즈 3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9월

불륜 중이던 아내 한다미가 자신을 찾지말라는 메모만 남기고 돌연 가출한 지 1년이 지났지만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남편 길영인은 자살할 방법을 찾다가 인터넷 사이트에서

정신자살연구소라는 웹페이지를 발견하고 그곳을 찾아가 소장인 이탁오 박사와 상담을 하는데...

도진기 작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국내 작가 중 한 명이다.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주인공인 시리즈와 

백수 탐정 진구가 주인공인 시리즈를 앞세워 국내 추리소설 작품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인 바 있는데

이 책은 고진이 등장하는 '붉은 집 살인사건'과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에 이은 세 번째 작품이다.

사실 이 책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나뉘는 평들을 이미 봤기 때문에 도진기 작가의 기존 작품 스타일과는

다른 뭔가가 있을 듯한 느낌이 확 왔는데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 작품에선 이탁오 박사란 확실한 악마 캐릭터가 등장한다. 전에 진구 시리즈인 '가족의 탄생'에서

시작과 끝에 잠깐 등장하여 '이 사람은 도대체 뭐지?' 하는 의문을 자아냈던 이탁오 박사가 이 책에서

사실상 주연에 다름없는 활약을 펼친다. 4년 전에 고진은 이탁오 박사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신경정신과를 운영 중이었던 이탁오 박사가 지하철에서 가짜 맹인 행세를 하던 남자의 발을 걸어

넘어뜨려 혼내주던 모습을 목격했던 고진이 그의 병원을 찾아가면서 인연을 맺게 되는데, 문제는

이탁오 박사에게 상담하러 왔던 부부가 설악산 등산을 갔다가 남편이 실족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가 아내에게 남편을 살해하도록 사주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일었지만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후 이탁오 박사는 병원 문을 닫고 사라지는데 다시 그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오르자

고진은 긴장하기 시작한다. 길영인의 사라진 아내 한다미 찾기로 시작된 얘기가 아내의 친구이자

불륜남의 아내였던 천나영이 고진이 묶던 팬션에서 살해되고 유력한 용의자였던 태정우마저 살해된

채 발견되자 드디어 길영인이 강력한 용의자로 등장하게 된다.

이 책에선 길영인의 1인칭 시점과 고진을 주인공으로 하는 3인칭 시점을 번갈아가면서 보여주는데

제목의 정신자살은 육체는 그대로 둔 채 최면요법을 사용하여 정신만 파괴한다는 이탁오 박사의

창조(?) 치료법으로 이 사건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나중에 드러나는 진실과 마지막 결말은

그동안 본격추리물로 독자와 정정당당한 논리 대결을 펼쳤던 도진기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솔직히

믿기 어려울 정도의 충격을 준다. 왠지 속았다는 느낌마저 들었는데 마지막의 엽기적인 결말은

너무 파격적이지 않았나 싶었다. 초반부에 형법상 친족상도례를 활용하여 친구를 괴롭히던 나쁜 녀석을 감방으로 보내는 모습까지는 역시나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기존에 보지 못했던 좀 억지스런

설정들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평이 이렇게 갈렸구나 싶었는데 얼마 전 읽었던 '악마의 증명'의

작가의 말에서 작가 본인이 이 책의 마지막을 사랑한다고 표현했으니 그의 취향도 유별난 것 같다.

암튼 도진기 작가의 기존 스타일과는 사뭇 다른 작품이었지만 이탁오 박사란 괴기스러운 악당

캐릭터를 등장시킨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는데,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이탁오 박사의

악마적 본성을 과연 고진이나 진구가 저지할 수 있을지 새로운 작품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