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채사장의 책들은 기대이상이었다. 그가 부러워서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시선으로 책을 읽었지만, 어느새 그의 글에 매료되어 즐겁게 책을 읽었다. 하지만 이번 책은 기대보다는 아쉬움이 컸다.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채사장의 세계관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의 내용들은 완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아래에는 책 속에서 밑줄을 그었던 부분들이다. 책을 읽으면서 감명깊은 부분들, 공감가는 부분들이 더러 있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독특한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있다. 극단적으로 먼 미래나 먼 과거를 살아가는 사람들. 죽음 이후나 탄생 이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부재'를 살아간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음, 사라짐, 무, 이곳이 아님, 피안, 초월을 현재로 당겨와 살아간다. 하지만 그 삶이 가능할 리 없다. 부재가 삶의 원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차라리 삶을 지워낸다. 극단적인 미래를 사는 사람들에게 삶은 없다. -p101
채사장도 위에서 어급한 사람들에 해당하고 나도 어느정도는 해당 된다. 현재를 살고 있지만 현재보다는 먼 과거와 먼 미래에 관심이 더 많다. 때문에 삶에 부유하게 된다. 계속 발이 두둥실 뜬다. 대지에 굳건하게 안착하지 못하고 허공을 두둥실 떠다닌다. 때문에 때로는 삶이 지겹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다. 내가 요즘 이렇다. 바빠서 책 볼 시간이 줄어들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삶을 즐겨야 되는데 자꾸 삶 바깥의 것들에 눈이 간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저 광활한 히말라야의 설원 위를 오체투지로 건너고 있는 티벳인들을 향해 너희는 종교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고 있다고 쉽게 평가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그들을 보라. 너덜너덜해진 신발 밑창과 흙먼지에 더럽혀진 머리카락과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과 가늠할 수 없는 깊은 눈동자를, 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 내면의 광활함을 믿게 되었다. 가난하고 초라한 행색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그 무언가의 광활함이 물리적인 한계 너머 저 신체 안쪽 어딘가에 우주처럼 펼쳐져 있다는 진실을, 나는 믿게 되었다. -p111
나는 종교적인 것, 신성한 어떤 것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첫 여행지로 인도를 갔었다. 아쉽게도 내가 그려왔던 인도의 이미지를 발견하진 못했다. 종교적이고 영적인 인도는 쉽게 내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티벳인들의 오체투지를 지켜보고 싶다. 나도 종교적인 마음을 갖고 싶다. 작은 신체에 담겨진 거대한 영혼. 깊은 눈동자와 흔들리지 않는 영혼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안이 될 거 같다.
만다라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이유는 미적인 색감과 모양과 승려들의 정성 때문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만다라가 완성과 함께 무너지기 때문이다. 승려들은 만다라를 남기지 않는다. 모든 것이 완벽히 쌓여진 바로 그 순간, 승려의 모진 손이 둘레의 가장자리부터 중앙까지 훑는다. 망설임 없는 그 손짓에 모래는 뒤섞이고 선명한 색상은 혼합되어 빚을 잃는다.
주위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가슴은 철렁하고 내려앉는다. 하지만 그 순간, 그 짧은 순간에 우리는 이해하게 된다. 만다라가 인생에 대한 상징이었음을. 나의 모든 노력과 정성은 집착이 되어 모래처럼 쌓여가고, 우리는 이것을 붙들고 싶지만 결국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그나마 한 줌이라도 움켜쥐고 싶지만 그것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고 마는 것이다. -p117
위 구절이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었다. 힘겹게 그린 만다라와 그것이 완성되어 훑어버리는 손짓. 우리의 인생을 이처럼 잘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집착을 버려야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인생을 살아가면 갈수록 집착이 약해지는 것 같다. 점점 놓는 법을 배워가는 거 같다.
나는 유물론자에 가깝다. 물질 외에 영혼같은 것은 없다고 믿는 편이다. 물론 다양한 가능성은 존재한다. 신이 존재하고 신이 세상을 창조했을 수 있다. 혹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컴퓨터가 만든 가상현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가정들은 불필요한 가정이다. 그 가정들을 받아들일 근거가 없다. 아직 아무도 이 세상에 대해 완전한 해설을 내놓지는 못했다. 아마도 이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미스터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나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어서 어딘가에서 만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의미가 덜해지거나 감동이 덜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에겐 지금 당신이 나의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이고 기적이다. 내가 존재하고 당신 또한 존재한다는사실이, 그리고 당신이 우연히 이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감동이고 기쁨이다.
우리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나의 글을 읽어주어서 나는 감사하고 기쁘다. 삶이 당신에게도 경이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