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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
브라이언 스티븐슨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0월
평점 :
최근에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를 읽었었다. 인종차별을 다룬 좋은 소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니 <앵무새 죽이기>는 소설일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앵무새 죽이기>는 분명 끔찍한 이야기를 다뤘지만, <월터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에 비하면 어린아이들을 위한 동화였다.
이 책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급이었다. 그만큼 현실은 소설보다 훨씬 비참하고 잔혹했으며 이해할 수 없었고 슬펐다. 권력의 횡포, 인종차별, 망가진 사법제도에 맞서 싸운 한 변호사가 있었다. 이 책은 앵무새를 구하려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한 남자의 40년 간의 기록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도대체 왜 무고한 사람들을 범죄자로 몰아가는지. 가장 정의로워야할 경찰, 검사, 판사, 변호사들의 파렴치한 모습들을 보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뿌리 깊은 인종차별, 인종차별, 인종차별. 미국의 극악무도한 사법제도의 현실을 봤다. 무고한 사람들이 사형수가 되어 사형집행을 받고, 미성년자들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다. 여성 재소자들 역시 사법제도의 피해자가 되고 교도소 안에서 다시 한 번 피해를 받는다. 만연한 성폭행. 성폭행한 교도관들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미국 사법제도가 이처럼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된 원인은 뭐였을까?
플로리다 교정국은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던 속도로 미국 전역에 새로운 교도소들이 속속 들어서던 1990년대에 1,600명의 재소자를 수용할 수 있는 이 교도소를 지었다. 1990년부터 2005년까지 미국에서는 열흘에 하나씩 새로운 교도소가 문을 열었다. 교도소 증가와 그에 따른 <교도소 산업 복합체>, 즉 교도소 건설에 자본을 투자하는 사업 관계자들의 등장은 징역살이를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범죄의 성격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징역형을 확대하도록 주 의회 의원들에게 로비를 벌이는 데 수백만 달러가 사용되었다. 약물 중독 같은 보건 문제, 결국에는 누군가가 부도 수표를 발행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빈곤 문제, 아동의 행동 장애 문제, 정신적 장애가 있는 극빈자들을 관리하는 문제, 입법자들에게 불법 이민자들을 교도소로 보내도록 한 이민자 문제까지 투옥은 모든 문제의 해법이 되었다. 미국의 재소자 숫자를 늘리고, 양형 개혁을 방해하고, 범죄 범주를 새롭게 확대하고, 대량 투옥을 부채질하는 두려움과 분노의 정서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에서는 지난 25년 동안 어느 때보다도 많은 로비 자금이 사용되었다. -p390
미국은 교도소도 민영화되어있다고 한다. 교도소가 사익추구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보호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돈을 쓰기보다는 교도소에 감금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 책의 저자이자 화자이자 주인공은 흑인 민권변호사 브라이언 스티븐슨이다. 저자 소개를 인용해본다.
"브라이언 스티븐슨은 1989년 앨라배마 주에 이퀄 저스티스 이니셔티브를 열어, 빈곤층, 흑인, 청소년,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무료로 변호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18세 미만의 미성년자에 대한 사형과 가석방 없는 종신형 선고 폐지를 이끌어 내는 데 기여하고, 무고하게 또는 저지른 죄에 비해 과도하게 형량을 선고받아 사형수가 된 사람들 100여명을 구제하는 등 미국 형사 사법 제도의 불공정한 법 집행을 적극적으로 개혁해 왔다."
분명 그는 엄청난 일을 해냈다. 하지만 그가 보호하지 못한 사형수들, 그의 손이 닿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이는 비난 미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혹은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사형을 받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뼈아픈 현실이다. 남의 일이라고 하기에는 언제든지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사형제도, 사법제도의 모순과 불합리한 현실을 목도하고 생각할 수 있는 훌륭한 책이었다. 저자의 진실한 이야기와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끝도없이 펼쳐진다. 그리고 비참하고 서글픈 현실도 끝없이 이어진다. 저자와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이 모든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그가 보여줬다.
하지만 망가진 사람들을 단지 처벌만 해서는, 요컨대 그들을 피하거나 우리 눈에 띄지 않도록 그들을 격리만 해서는 그들은 물론이고 우리의 망가진 상태가 계속될 뿐이다. 서로에 대한 인간애가 없으면 공동체란 없는 것이다.
나는 자신이 저지르거나 당했던, 결국 자신을 고통스러운 순간으로 이끈 어떤 일들에 맞서 싸우거나 절망하는 의뢰인들과 자주 힘든 대화를 나누었다. 상황이 정말 심각해지고 그들이 과연 자신이 살 가치가 있을지 의문을 제기할 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 모두는 우리가 저지른 최악의 행동보다 훨씬 가치가 있음을 상기시켰다. 누군가가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단지> 거짓말쟁이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소유가 아닌 어떤 것을 훔쳤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단지> 도둑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설령 다른 사람을 죽였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단지> 살인자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 나는 내가 오랫동안 의뢰인들에게 해오던 이야기를 내 자신에게 들려주었다. 나는 단지 망가지기만 한 사람이 아니다. 망가진 우리의 모습을 받아들일때 자비를 필요로 하고 갈망하게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아마도 그에 상응해서 자비를 베풀 필요가 생긴다는 점에서 망가진 모습을 이해하는 행위에는 장점이, 심지어 어떤 능력이 존재한다. 우리는 자비를 경험하면서 만약 경험하지 않았다면 배우기 어려웠을 무언가를 배운다. 어쩌면 보지 못했을 무언가를 발견한다. 어쩌면 듣지 못했을 무언가를 듣는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내면에 존재하는 인간애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내가 더욱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망가진 상태를 인정한다면, 각자의 약점과 결함, 편견, 두려움을 모두 털어놓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마도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사람들을, 즉 망가진 이들을 죽이려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장애가 있는 사람들, 학대받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정신적 외상이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기 위한 해결책을 더 열심히 찾고자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망가진 상태를 인정하게 된다면 더 이상 대량 투옥 현상을, 사람들을 사형시키는 행위를, 가장 취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의도적인 무관심을 자랑스러워할 수 없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p436~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