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밀란 쿤데라 전집 13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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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책은 도끼다>에서 만난 책 중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은 밀란 쿤데라의 <커튼> 이었다. <커튼>은 쿤데라의 소설론이자 에세이이다. 읽긴 읽었는데, 깊이 있게 읽진 못했다. 다소 어려웠던 부분들도 있고, 집중을 못한 부분도 있다. <다시, 책은 도끼다>를 읽고 난 후에는 정말 모든 책이 다르게 다가왔다. 독서가 분명 한층 업그레이드 된 느낌이었다. 그 약빨은 한 달 정도인 것 같다. 박웅현씨가 어서 <다시다시, 책은 도끼다>를 출간해주었으면 좋겠다. 한 달에 한 번씩 출간해준다면 고마울텐데. 8월은 독서가 정말 미친듯이 재미있었다. 소설을 읽으면 그 소설에 푹 빠졌고, 비소설을 읽으면 작가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요즘은 책을 읽으면 뜨뜨미지근 하다. 어려운 부분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광속으로 스쳐지나간다. 육체적, 정신적 피로 탓일까? 추석기간 때 못 마시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던 탓일까? 소개팅에서 차여서 낙심했나? 

 음, 왠지 가장 마지막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나도 미처 몰랐던 사실을 글을 쓰다보니 무의식 중에 발견했다. 이것이 의식의 흐름 기법인가? 

 다시 책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책은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을 읽고 나서 한 번 생각해본다. '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 먼저 나는 언제부터 소설을 읽었나 기억을 되집어보자. 소설을 접한 건 언제지? 내 기억 속 최초의 소설은? 어렵다. 내 기억에 떠오르는 최초의 소설은 중학교 때 읽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아버지들의 아버지>가 아니었나 싶다. 이 소설은 SF소설로 인류의 기원에 대한 소설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매우 충격받았다. 이런 이야기가 존재하다니, 상상력을 마구 증폭시키는 소설이었다.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팬이 되어 그의 소설들을 도서관에서 빌려보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것이 나의 소설입문이었으리라. 

 예전에 대학 동기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소설은 읽을 가치가 없다." 대충 이런 뉘앙스의 말이었다. 소설이 무의미하다고,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순간 나는 울컥했지만, 뭐라고 이야기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하건 어차피 상대방에겐 쓸데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구절을 떠올렸다. "설명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은 설명해도 모른다." 이성은 감성 다음이다. 먼저 소설의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떤 미사여구나 소설론, 혹은 자세한 설명도 쇠 귀에 경읽기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설명해서 이해시킬 수 있을까? 죽음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죽음을 설명해주면 알까? 이별의 고통을 겪어본 적 없는 사람에게 그 고통을 설명해서 이해시킬 수 있을까? 소설의 가치를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소설의 가치를 설명할 순 없다. 느끼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 내 소설의 시작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판타지소설이었다. 거기에는 재미와 이곳과는 다른 현실이 있었다. 상상, 새로움, 겪어본 적 없고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가 있었다. 내가 두번째로 소설을 알게 된 건 무라카미 하루키로부터이다. 재수시절 <해변의 카프카>를 읽었다. 소설이 성큼 다가왔다. 처음 읽을 때는 <해변의 카프카>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 가 있었고, 나는 그 '무언가'를 느꼈다. 

 본격적으로 독서에 재미를 붙이고 나서 나는 소설보다는 비소설부문의 책들을 탐욕스럽게 읽어나갔다. 지식의 확장이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물리학, 경제학, 생물학, 철학, 인문학 등 지식은 널려있었고 나는 그걸 하나씩 주워나갔다.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났다. 거대한 도끼였다. 나는 쩍하고 갈라져버렸다. 뭄을 가눌 수 없는 그런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나는 달라져 있었다. '자유' 라는 두 글자가 내 몸에 새겨졌다. 나는 자유롭게 살기로 결심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여전히 나는 무언가를 바라고, 무언가를 두려워하며 산다. 하지만, 무언가를 바라지 않으려고, 무언가를 두려워하지 않으려 애쓰며 산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만나고, 표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만났다. 그런 소설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생의 처연함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이중성과 인간의 모든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나를 뒤흔들고 나를 변화시키는 진짜 도끼는 소설에 있었다. 소설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었다. 과학, 철학, 역사, 심리학, 인간, 사랑.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비소설들도 많다. 리처드 도킨스의 <지상최대의 쇼>를 읽고 진화론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바른 마음>을 읽고 이성보단 감성이 우위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죽기 전에 다시 읽고 싶은 책이나 무인도에 가지고 가고 싶은 책은 비문학보다는 소설이다. 

 이제 답변을 해보자. "나는 왜 소설을 읽는가?" 단순한 대답은 소설이 좋기 때문이다. 좀 더 살을 덧붙이자면, 소설은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삶의 의미' 가, '인간' 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이 있기 때문이다. 헤밍웨이 식으로 표현하자면 '진실한 그 무언가' 가 소설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을(혹은 나 자신을) 혹은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 전집 13권. 오늘날 현대 소설이 지닌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의의를 쿤데라만의 날카로운 시각과 풍부한 지식, 문학에 대한 끝없는 열정으로 풀어 낸 에세이이자 현대 소설론이다. 쿤데라는 소설이라는 예술의 역사가 존재에 대한 세 가지 질문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했다. 개인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 책 또한 이러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쿤데라는 그 대답을 인간의 지식과 인류의 역사,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위대한 소설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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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23 15: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속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과 그들이 처한 상황에 공감할 때 소설 읽는 재미를 느낍니다. ^^

고양이라디오 2016-09-23 17:11   좋아요 0 | URL
cyrus님 소설 서평을 많이 못 본 것 같습니다. 가끔씩 소설 속 인물과 현실에 푹 빠지게 되는데 그때가 가장 재밌습니다^^

cyrus 2016-09-23 17:13   좋아요 1 | URL
공감은 잘 하는데, 그걸 문장으로 표현을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ㅎㅎㅎ

고양이라디오 2016-09-23 17:33   좋아요 1 | URL
저도 소설을 읽고 받은 감동을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어서 항상 답답함을 느낍니다ㅠ 생각을 표현하는 것보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훨씬 어려운 것 같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