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알라딘 올해의 책에 과학도서가 선정되었다니 뜻밖이네요. 과학도서 출판업자는 아닙니다만 흐믓합니다. 스티븐 호킹의 책은 이 책이 두번째 입니다.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를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환상적인 책이었습니다. 이 책 역시 환상적인 책입니다. 앞으로 스티븐 호킹의 책들을 꾸준히 읽어야겠습니다. 카테고리도 만들고요. 뛰어난 과학자이면서 대중에게 쉽게 글을 쓰는 분들이 많다는 것은 독자들에게 행운입니다. 이 책은 250p의 짧은 책이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방대하고 또 심오합니다. 거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호킹의 답변이 담겨 있습니다.
왜 무(無)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을까?
왜 우리가 있을까?
왜 다른 법칙들이 아니라 이 특정한 법칙들이 있을까?
이 질문이야말로 생명, 우주, 만물에 관한 궁극의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호킹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래는 꽤 길지만 책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저는 한동안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을까?" 라는 철학적 혹은 과학적 질문을 두고 고민했습니다. 스티븐 호킹의 이 글을 보니 만족스럽고 속이 시원했습니다. 갈증을 채워주는 글이었습니다. 길지만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느끼지만, 생물학의 분자적 토대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생물학적 과정들이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들에 의해서 지배되며 따라서 행성의 궤도와 마찬가지로 결정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신경과학의 최근 실험들은, 알려진 과학법칙들을 따르는 우리의 물리적인 뇌(physical brain)가 우리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지, 그 법칙들과 별개로 존재하는 어떤 행위자가 우리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힘을 실어준다. 예를 들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뇌수술을 받는 환자들을 연구한 결과, 뇌의 특정 구역들을 전기로 자극하면 환자가 손이나 팔이나 발을 움직이고 싶은 욕구, 또는 입술을 움직이고 말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의 행동이 물리법칙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어떻게 자유의지가 작동할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생물학적 기계일 따름이고 자유의지는 착각에 불과한 것인 것 같다.
인간의 행동이 정말로 자연법칙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행동은 워낙 많은 변수들에 의해서 아주 복잡한 방식으로 결정되므로 실질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짓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 예측을 위해서는 인간의 몸을 이루는 무수한 분자들 각각의 초기 상태를 알고 이를테면 그만큼 많은 방정식들을 풀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려면 이삼십억 년이 걸릴 텐데, 상대방이 펀치를 날릴 것을 미리 알고 고개를 숙이려는 사람에게 이삼십억 년은 터무니없이 긴 세월일 것이다.
바탕에 있는 물리법칙들을 이용하여 인간의 행동을 예측한다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른바 유효이론(effective theory)을 채택한다. 물리학에서 유효이론이란 관찰된 특정 현상을, 그 바탕에 있는 모든 과정들을 자세히 기술하지 않으면서 모형화하기 위해서 창조한 이론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한 사람의 몸을 이루는 원자 각각과 지구를 이루는 원자 각각의 중력의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방정식들을 정확하게 풀 수 없다. 그러나 한 사람과 지구 사이의 중력은 그 사람의 몸무게를 비롯한 몇 가지 수들만 알면 어떤 실용적인 목적에도 부족함이 없이 기술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복잡한 원자들과 분자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방정식들을 풀 수는 없지만, 화학이라는 유효이론을 개발했다. 그 유효이론은 세세한 상호작용들을 빠짐없이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원자들과 분자들이 화학반응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적절하게 설명한다. 인간과 관련해서 우리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유효이론을 사용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방정식들을 풀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지와 그것에서 유발된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은 심리학이다. 경제학 역시 자유의지의 개념을 기초로 한, 그리고 사람들은 행동의 선택지들을 평가하고 최선의 것을 선택한다는 전제를 기초로 한 유효이론이다. 이 유효이론은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는 데에 제한적으로만 성공적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알듯이, 인간의 결정은 흔히 비합리적이거나 선택의 결과에 대한 불완전한 분석을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세상이 엉망진창이 되는 까닭이다. -p41~43
쉽게 요약하면 논리적으로 그리고 실험적으로 볼 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보기 어렵지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유효이론을 사용해도 현실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니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라고 말씀하실 분들이 많으실 거라 생각됩니다. 사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없는가는 아주 오래된 철학적 논쟁입니다. 뇌에 대해 알면 알수록, 실험을 하면 할수록 자유의지는 없다쪽으로 기웁니다. 철학에 답변을 내려주는 것은 과학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하실 책으로 <자유의지는 없다>를 추천드립니다. 어렵지만, 매우 얇고 반박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와 씨름해보시기 바랍니다. 애석하게도 인간은 자극에 반응하는 생체기계인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페이퍼를 쓰고 있는 것은 저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제가 그동안 겪었던 모든 경험의 총합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글을 쓰든 그렇지 않든 마찬가지로요.
저는 이런 비유를 떠올렸습니다. 곡선을 미분하면 직선이 나옵니다. 곡선은 수많은 직선들의 합입니다. 곡선의 한 지점을 보면 곡선은 어디에도 없고 직선뿐입니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마치 곡선처럼 보이고, 사실 그렇기 때문에 곡선이라 부릅니다. 자유의지도 이와 같이 무수히 잘게 쪼개진 경험과 감각의 합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그것들이 모여서 마치 자유의지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엄청 어려운 비유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