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해리스의 <자유의지는 없다>라는 책을 읽고 리뷰를 작성했는데, 어제는 피곤해서 중간에 마무리했지만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들이 많아서 이렇게 페이퍼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런 비유를 생각해봤습니다. 진화(의지)와 자유의지를 빗대어 생각해보면, 종은 개체로 빗대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300만년 전에 침팬지와 인간의 공통조상이 있었습니다. 그 종을 A라고 합시다. A는 어떤 진화의지를 가지고 인간으로 진화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좋아, 앞으로 두발로 걷겠어. 두뇌를 발달시킬꺼야, 도구도 사용하고, 언어도 사용해서 인간이 되야지" 라는 의지도 없었을 것이며, 어떠한 선택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A는 인간이 되었죠. 마치 진화에 일정한 의지나 방향이 있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는 환상입니다. A는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것이지요. 환경에 적응해나간 것이지 선택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자연선택의 위대함이죠.
어쩌면 우리의 자유의지도 진화에 의지가 있다는 것처럼 환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그때 그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맞춰서 적응을 하는 것이지요. 그 적응에는 자유의지가 없지만 마치 자유의지가 있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솔직히 저도 제가 마치 '제논의 역설'에 빠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자유의지가 있는데, 잘못된 전제의 논리에 빠져들어서 그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논의 역설'도 수천년이 지나서야 극한의 개념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죠. 우리는 수학을 통해서 그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무한급수 '1/2+1/4+1/8+......=1' 을 통해서요. 어쩌면 자유의지도 무수히 많이 분할해서 생각해보면 발견할 순 없지만, 그것을 모두 더해서 뭉뚱그려 생각해보면 짠하고 자유의지가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도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더 자유로워졌다고 느낀다." 솔직히 이 무슨 모순이며, 역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자유의지가 없다고 해서, 사실 부자유를 느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환경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무조건 악인이라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배경환경을 꼼꼼히 따져봐야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장발장의 사례처럼요. 물론 그렇다고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법에도 정상참작이란 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정당방위도 존재하지요. 그리고 강압에 의한 진술이나 자백도 인정되지 않고요.
어떤 책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의 아주 가난한 나라를 여행하고 있었는데, 굶주린 어린아이들이 쥐인가 바퀴벌레를 잡고(먹기위해서)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게 되지요. 여기에 과연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을까요? 그 어린아이들이 "쥐나 바퀴벌레가 더러워, 싫어" 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지금 우리는 마치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쥐나 바퀴벌레를 보면 "더러워, 싫어" 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약 그런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면, 과연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쥐나 바퀴벌레를 보고 "더러워" 라고 생각할지, 아니면 "우와 먹을 거다." 라고 생각할지 선택할 수 있을까요? 자유의지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오히려 환경이나 시스템의 중요성을 훨씬 깊이 있게 생각하게 됩니다. 아프리카의 어린아이들이 쥐나 바퀴벌레를 보고 "더럽다." 고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지, 그들이 쥐나 바퀴벌레를 보고 "먹을거다." 라고 생각한다고 경멸해서는 안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