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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먼슬리 클래식) ㅣ 먼슬리 클래식 11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1년 만에 다시 찾은 책이다. 11년 전에도 좋았지만 사실 그 때는 책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거 같다. 그만큼 재미도 덜 느꼈던 거 같다. 올해 다시 읽었을 때는 좀 더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책 맨 뒤의 해설과 제미나이의 해석과 독서모임을 통해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왜 레이먼드 카버를 좋아하는지 왜 <대성당>을 좋아하는지 이제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은 단편소설집이다. 연말의 정서에 어울린다. 서늘함 속에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다.
12편의 단편소설이 있지만 세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고 좋았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열>, <대성당>. 세 작품 모두 비슷하다. 단절에서 소통으로, 고통에서 회복, 치유로.
카버의 문체는 단문이다. 리얼리즘을 대표한다. 대화와 행동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글을 보고 있지만 눈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카버의 문장도 너무 좋다.
아래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속 문장이다.
빵집 주인이 외로움에 대해서, 중년을 지나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의심과 한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그들에게 그런 시절을 아이 없이 보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 말했다. 매일 오븐을 가득 채웠다가 다시 비워내는 일을 반복하면서 보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 그가 만들고 또 만들었던 파티 음식. 축하 케이크들. 손가락이 푹 잠길 만큼의 당의. 케이크에 세워두는 작은 신혼부부 인형들. 몇백, 아니, 지금까지 몇천에 달할 것들. 생일들. 그 많은 촛불들이 타오르는 것을 상상해보라. 그는 반드시 필요한 일을 했다. 그는 빵집 주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꽃장수가 아니라 좋았다. 사람들이 먹을 것을 만드는 게 더 좋았다. 언제라도 빵냄새는 꽃향기보다 더 좋았다. -p128
진정한 소통은 자신의 약점과 내밀한 부분을 꺼내놓을 때 시작되는 것 같다.
아래는 <대성당>에서 좋았단 부분이다. 끝내주게 좋았다.
맹인이 말했다. "우리는 지금 대성당을 그리고 있어. 나하고 이 사람이 함께 만들고 있어. 더 세게 누르게나." 그가 내게 말했다. "그렇지, 그렇게 해야지." 그는 말했다. "좋아. 이 사람, 이제 아는구먼. 진짜야. 자네가 할 수 있다고는 생가하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할 수 있잖아. 그렇지? 이젠 순풍에 돛을 단 격이네. 무슨 소리인지 알겠나? 조금만 더 하면 우리가 여기에 뭔가를 진짜 만들게 되는 거야. 팔은 아프지 않은가?" 그가 말했다. "이제 거기에 사람들을 그려보게나. 사람들이 없는 대성당이라는 게 말이 되겠어?"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로버트?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무슨 일이에요?" 아내가 물었다.
"괜찮아." 그가 아내에게 말했다. "이제 눈을 감아보게나." 맹인이 내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그가 말한 대로 눈을 감았다.
"감았나?" 그가 말했다. "속여선 안 돼."
"감았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럼 계속 눈은 감고." 그가 말했다. "이제 멈추지 말고. 그려." 그는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했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들을 타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해낸 것 같아." 그는 말했다.
"한번 보게나. 어떻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렇게 눈은 감은 채로 있자고 나는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때?" 그가 물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p311
맹인과 나는 함께 대성당을 그린다. 아니 '나' 가 볼펜을 쥐고 종이에 대성당을 그리고 맹인이 그의 손을 나의 손 위에 얹는다.
이 부분이 특히 감동적으로 느껴졌던 이유는 대성당을 그리는 것을 소설을 쓰는 창작활동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눈을 감음으로써 전에 보이지 않은 것들을 보고 느끼게 된다. 소설 속 맹인과 나의 소통, 그리고 작품을 통해 작가와 독자가 소통을 한다. 진짜 대단하다!
올해 최고의 단편소설집이다!
아래는 김연수 소설가의 해설이다.
이처럼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은 자신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나 비로소 타인과 세계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 목소리를 통해 '뭔가'를 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집이다. -p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