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진짜 억울하다. 열심히 글을 썼는데, 거의 다 썼는데 글이 날아가버렸다. 임시 저장 글을 불러오니 1/7 은 날아간 거 같다.(평소에는 잘 자동저장되고 잘 불러와졌는데 왜 이번에는...) 글을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이달의 당선작' 에 당선되는 거 아니야 생각이 들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썼는데. 기억을 되새기면서 다시 써보자. 근성이다.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p40


 작가는 쓰고 독자는 상상한다. 왠지 이 부분이 상징처럼 느껴졌다.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계속 상기해야 한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그렇지 않으면 썩고 만다. 



 인선이 말을 멈췄다. 간병인이 인선의 상처에 서슴없이 바늘을 찔러넣는 동작을 나는 똑똑히 다시 보았고, 인선과 함께 숨을 멈춘 채 후회했다. 좀전에 병원 로비에서 이미 깨닫지 않았던가,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는 걸? -p49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 한강 작가는 4.3 제주 사건을 들여다보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렇게 소설로 읽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그리고 실제로 그 사건을 겪었던 사람은 얼마나,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 -p112 


 연약한 새는 희생당한 시민들, 혹은 인선의 어머니를 상징하는 거 같다. 자신의 고통을 숨기는, 약하지만 강한. 새는 눈과도 비슷하다. 가볍고 부드럽고 아름답다.



 자리로 돌아온 그녀가 상자를 열기 전에 나는 다시 촛불을 넘겨받는다. -p259 


 인선과 주인공 경하가 어둠 속에서 촛불을 서로 주고 받는 장면이 위태로우면서 애틋하다. 촛불은 진실, 생명, 의지를 상징하는 거 같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석 달 동안 중산간이 불타고 민간이 삼만 명이 살해된 과정을 그 오후에 읽었다. -p262


 제주 4.3 사건에 대해 몰랐다. 책을 읽으면서도 희생자수가 몇 백명, 몇 천명 일거라 생각했다. 삼만 명. 우리 역사 속에서 이런 끔찍한 비극이 이렇게 큰 규모로 있었다니. 여태 모르고 있었다. 모르고 살았다.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 소설을 읽으면서 끔찍한 비극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더 고통스럽다.



 1948년 정부가 세워지며 좌익으로 분류돼 교육 대상이 된 사람들이 가입된 그 조직에 대해 나는 알고 있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정치적인 강연에 청중으로 참석한 것도 가입 사유가 되었다. 정부에서 내려온 할당 인원을 채우느라 이장과 통장이 임의로 적어 올린 사람들, 쌀과 비료를 준다는 말에 자발적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도 다수였다. 가족 단위로도 가입되어 여자들과 아이들과 노인들이 포함되었고, 1950년 여름 전쟁이 터지자 명단대로 예비검속되어 총살됐다. 전국에 암매장된 숫자를 이십만에서 삼십만 명까지 추정한다고 했다. -p273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규모에 대해서는 몰랐다. 이십만에서 삼십만이라니. 



 그후로는 엄마가 모은 자료가 없어. 삼심사 년 동안.

 인선의 말을 나는 입속으로 되풀이한다. 삼십사 년.

 ......군부가 물러나고 민간인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p281 


 인선의 어머니는 자신의 오빠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자료를 모은다. 그러다 군부 독재 하에서는 자료조차 모으지 못한다. 언론이 통제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사람이 엄마라고 생각했어.


 갈라진 인선의 목소리가 정적을 그으며 건너온다.


 허깨비. 

 살아서 이미 유령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방금 펼쳐둔 대로 입을 벌린 책을 지나쳐 나는 캄캄한 창을 향해 다가간다. 초를 모아쥔 채 창을 등지고 인선을 향해 선다.


 그 삼 년 동안 대구 실종 재소자 제주 유족회가 정기적으로 그 광산을 방문했다는 걸 나는 몰랐어.

 엄마가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그때 엄마 나이가 일흔둘에서 일흔넷. 무릎 관절염이 악화되던 때야. -p288 


 인선은 자신의 어머니가 싫었다. 매일 악몽에 시달리던 사람, 나약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p317


 달을 삼켰다 뱉으며 구름들이 달리고, 별들이 쏟아질 듯 무더기로 빛나고, 모든 나무들이 뽑힐 듯 몸부림쳤어. 가지들이 불같이 일어서 날리고, 점퍼 속으로 풍선처럼 부푸는 바람이 거의 내 몸을 들어올리려고 했어. -p318 


 317p에서 318p가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 생각한다. 명문이다. 시적산문이다. 미쳤다.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p325 

 

 비유가 좋다. 소설을 읽으면서 번듯이는, 감각적인 비유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한강 작가님의 필력이 갈수록 발전하는 거 같다. 다음에는 노벨문학상이 아니라 노벨할아버지문학상을 탈 기세다.



 아, 정말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을 기념해서 나도 글을 잘 쓰고 싶었는데. 불평불만으로 시작해서 개소리로 마무리되어 버렸다. 이달의 당선작은 물건너갔다. 하지만 나도 작별하지 않는다. 노벨문학상, 아니 이달의 당선작과 작별하지 않았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다 읽고 색다른 감동이 밀려왔다. 슬픈 역사적 사건, 빼어난 문체, 노벨문학상수상이라는 쾌거. 복잡한 감정이 한 꺼번에 밀려왔다. 훌륭한 작품, 좋은 작품을 읽게 되어 기뻤다. 한가 작가님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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