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사랑의 기술>에 헛소리가 많다고 했는지 예를 들어(본문을 발췌하여) 설명해보겠다.  


 남녀라는 양극성은 대인 관계에서 창조의 기초이기도 하다. 이점은 생물학적으로는 정자와 난자의 결합이 어린아이 탄생의 기초라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그러나 순수하게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남녀 사이의 사랑을 통해 남녀는 각기 재탄생하는 것이다. (동성애적 일탈은 이 양극화된 결합의 성취에 실패한 것이고 따라서 동성애자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분리, 곧 이러한 실패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는 사랑할 줄 모르는 이성애자에게도 공통된다.) -p53


 위는 잘못된 전제로 말미암아 잘못된 결론에 이르는 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분리되어 있고 합일을 원한다고 전제한다. 인간은 각기 생물학적으로 다른 성의 결합을 추구한다고 전제하고 동성애는 이러한 결합이 달성될 수 없기에 실패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런 예 하나로 이 책의 전부와 그의 철학의 전부를 비판,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철학적 헛소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여덜 살 반부터 열 살 이전의 대부분의 아동들에게는 문제는 거의 예외 없이 '사랑받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는-문제이다. 이 연령까지의 아동은 아직 사랑할 줄 모른다. 사랑받는 경우 기쁘고 즐겁게 반응할 뿐이다. -p61 

 

 나는 이런 문장, 주장들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내가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정말로 여덜 살 반부터 열 살 이전의 대부분은 아동들은 사랑할 줄 모를까? 그 근거는? 나는 그의 주장이 틀릴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나이 때의 아이들도 부모를, 친구를, 자연을, 동물을 사랑할 줄 안다고 생각한다. 에리히 프롬의 글들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주장은 있는데 근거는 없다. 그래서 그의 말은 신뢰를 잃는다. 에리히 프롬에게 아이들이 있었을까? 그가 얼마나 아이들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했는지 궁금하다. 


 

 신앙을 가지려면, '용기', 곧 위험을 무릎쓰는 능력, 고통과 실망조차도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필요하다. 생활의 일차적 조건으로서 안전과 안정을 추구하는 자는 신앙을 가질 수 없다. 격리와 소유를 자신의 안전책으로 삼는 방어 기구에 칩거하는 자는 누구든 자기 자신을 죄수로 만들게 된다. 사랑받고 사랑하려면 용기, 곧 어떤 가치를 궁극적 관심으로 판단하는 - 그리고 이러한 가치로 도약하고 이러한 가치에 모든 것을 거는 - 용기가 필요하다. -p169  


 이 책에도 좋은 글들이 있다. 위 글은 좋았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이 유명하다. 그런데 <사랑의 기술>과 비슷할까봐 읽어보기가 겁난다. 당분간 에리히 프롬은 잃지 않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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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3-11-05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때는 맞아도 지금은 아닌 것’이 있겠네요. 읽으려면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겠어요.

고양이라디오 2023-11-06 12:13   좋아요 1 | URL
그 때는 맞는듯 보였던 것이 아는 게 많아지니 틀린 부분들이 많이 보이는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