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로 읽었다. 읽을 수록 감흥은 떨어지지만 이해는 깊어진다. 볼 때 마다 만족스럽다. 크게 읽고 싶었던 건 아닌데 독서모임 선정도서라 어쩔 수 없이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읽다보니 재밌게 읽었다. 역시 명작은 명작이다.
언제나처럼, 한 인간이 수행하는 역할은 그보다 훨씬 더 성숙한 인간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내 눈에 이들은 놀이터에서 노는 어린애들처럼 보인다. 나는 그들의 진지함을 재미있어하고, 과거에는 나도 이들과 똑같이 행동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창피해한다. 이들의 행동은 이들 입장에서 볼 때는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도저히 그런 일에는 참여할 수 없다. 성인이 되면서 유치한 일들과는 인연을 끊은 것과 같은 문제이다. 이제 보통 인간들의 세계와의 접촉은 오로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부분에만 한정시킬 작정이다. -p81, <이해>
위 구절을 읽으면서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가 떠올랐다. 소설 속 싯다르타도 인간들을 보며 위와 같이 느꼈다. 나도 어릴 때부터 또래의 아이들을 보며 위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위 구절이 공감이 갔다.
자유는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순차적 의식이라는 맥락에서는 완벽한 현실이다. 동시적 의식의 맥락에서 보면 자유는 의미가 없지만, 강제 또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맥락이 서로 다를 뿐, 한쪽이 다른 쪽 보다 더 타당하다거나 덜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유명한 착시 현상을 닮았다고나 할까. 고개를 뒤쪽으로 돌인 우아한 젊은 여인으로도 보이고, 턱이 가슴에 묻힐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울퉁불퉁한 코를 한 노파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그림의 경우처럼 '올바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양쪽 모두 동등하게 타당하다. 그러나 두 그림을 동시에 볼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래를 안다는 것과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었다. 나로 하여금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은 내가 미래를 아는 것 또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와는 반대로 미래를 아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행위를 포함해서, 나는 결코 그 미래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아는 사람들은 미래에 관해 얘기하지 않는다. <세월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그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p218, <네 인생의 이야기>
<네 인생의 이야기> 속 세계관은 미래를 알아도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미래를 알면 자유를 행사할 수 없다. 자유를 행사하는 순간 미래가 바뀌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신이 아는 미래를 그대로 따라야한다. 마치 연극을 하듯이. 다른 세계관도 가능하다. 다른 선택을 하는 순간 평행우주가 생기는 것이다.
"아니, 이건 순수하게 과학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네. 인류라는 종을 존속시키는 것이 우리 의무인 것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인구의 건전성을 확보하는 일 또한 우리의 의무야. 정치와는 상관없는 일이네. 상황이 역전해서 노동력이 모자라게 된다면, 그와는 정반대의 정책이 필요하게 되겠지." -p291, <일흔두 글자>
<일흔두 글자> 속 필드허스트는 하층계급의 산하제한을 주장한다. 우생학과도 관련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우생학적인 정책이 행해진 적이 있다.
닐은 여전히 사라를 사랑하고 그녀를 보고 싶어하지만, 그녀와 재결합하기 직전까지 갔었다는 생각은 그를 한층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닐은 자신이 지옥으로 보내진 것이 그가 한 어떤 행위의 결과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것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고, 고차원의 목적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설령 닐이 천국으로 받아들여지고 고통이 끝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는 그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욕망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
닐은 자신이 신의 의식 너머에 존재함으로써 신에게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조차 알고 있지만, 이것도 그의 감정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아무런 보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신의 의식 너머에서 오랜 세월을 지옥에서 살아온 지금도 닐은 여전히 신을 사랑하고 있다. 진정한 신앙이란 본디 이런 것이다. -p363, <지옥은 신의 부재>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 모두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몇 편이 특히 좋았다. <지옥은 신의 부재>는 특별히 좋았던 작품이다. 테드 창은 신앙이 있을까? <지옥은 신의 부재>는 신앙를 조롱하는 것일까? 증거가 있기 때문에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증거가 있기 때문에 믿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논리적인 귀결이다.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이 진짜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