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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서모임 선정도서라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를 다시 읽었다. 세 번째 독서였다. 처음 읽었을 때는 아주 재밌었다. 즐기면서 봤다. 별점 4.5점. 첫 번째 독서 1년 후에 두 번째 독서를 했다. 왜 1년 후에 다시 읽었는지 모르겠다. 1년 후라 기억이 제법 생생해서 그렇게 재밌지 않았다. 별점 4점.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 대략 6-7년이 흘러 세 번째로 읽었다. 이번에는 분석적, 비판적으로 읽었다. 마지막에 김이 샜다. 별점 3.5점.
밀란 쿤데라의 다른 책들을 읽고 싶지만 우선순위가 아니라 언제 읽을지 요원하다. 세상엔 재밌는 책,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다. 밀란 쿤데라는 분명 후순위다.
독서모임에서 보니 의외로 밀란 쿤데라의 책을 읽은 분들이 많았다. 각기 달랐다. <농담>을 읽은 사람도 있고, <불멸>을 읽은 사람도 있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은 사람도 있었다. 밀란 쿤데라는 거장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제목이나 이름에서 이미 거장의 느낌이 난다.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여러 번 올랐던 거 같다.
논외지만 밀란 쿤데라 이야기를 하다 하루키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다 하루키는 "작품성이 부족하다." 라는 발언이 나왔다. 아, 님은 저의 발작버튼을 누르셨습니다. 약간 흥분하면서 반박했다. 하루키는 이미 노벨문학상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상들을 받았고 노벨문학상의 후보로도 여러 번 거론되었고, 하루키의 작품성은 이미 세계의 많은 작가와 독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라고 이야기했다. 역시나 하루키는 작품성이 부족하다고 말한 사람은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한 작품만을 읽어봤을 뿐이었다. 제발,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길. 그리고 상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사랑받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도 이야기했다.(하루키씨도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발, 노벨문학상 받은 재미없는 책 따위 읽지 마시길. 뭐, 이건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무의미의 축제>는 삶이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그 무의미하고 하찮은 것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글쎄, 삶이 과연 무의미한 것일까? 왠지 반론하고 반박하고 싶었다. 삶에 어떤 의미나 목적은 없다. 우리는 무의미한 삶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 존재, 혹은 무의미를 긍정하고 무의미한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삶 자체는 어떠한가? 삶 자체도 무의미한가? 우리가 가진 최초의 것,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것이 삶이 아니던가? 하나뿐인 삶이 과연 무의미할까? 삶 자체로 이미 충분한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게 삶이 됐는 머가 됐든 이미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무의미한 것-> 사랑 -> 의미있는 것(사랑하는 것) 이 된다.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삶이든 사물이든 생물이든 일시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를 좀 더 자유롭게 해주나? 이 모든 게 말장난같기도 하지만 아무튼 책을 읽고 이런 부분이 계속 머리 속에 맴돌았다.
'삶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라는 이 책의 관점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작가 빅터 프랭클의 관점이 좀 더 마음에 든다. (물론 밀란 쿤데라의 관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크게 와닿지 않는다.)
"삶의 의미는 늘 변할지 모르지만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로고테라피의 명제이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삶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첫 번째, 무언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두 번째, 무엇을 경험하거나 누군가를 만남으로써. 세 번째, 회피할 수 없는 어떤 고통에 대해서 우리가 취하게 되는 태도에 의해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마음에 평온을 가져오기보다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면의 긴장은 정신 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 라는 니체의 말에는 이런 예지가 담겨 있다. 이 말에서 정신 치료에도 유용한 어떤 좌우명을 찾을 수 있다.
인간 실존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개인에게 부과된 임무는 거기에 부가돼 찾아오는 특정한 기회만큼이나 유일한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들에게 과연 어떤 이야기가 더 설득력 있을까? 삶의 원래 무의미 하지만 작고 하찮은 것들을 사랑하라는 이야기와.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믿고 적극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추구해라는 이야기.
하나 뿐인 삶, 작고 하찮은 것 모두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의미의 축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