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칼 포퍼의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를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지적 만족을 주는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시도는 정답은 아니지만, 정답을 향해가는 열정이자 겸손이며, 끊임없는 시도는 그 자체가 정답이다. -p8
자신의 삶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즉 not-to-do 리스트를 하루에 하나씩 적어 10개 항목을 마음에 새기고 삶에서 제거한다면, 그는 이미 행복한 인간이다. -p9
배철현님의 추천의 글 속 글들입니다. 추천의 글부터 좋았습니다.
"진보는 모든 역사에 명명백백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진보는 자연법칙이 아니다. 한 세대가 이룬 진보는 다음 세대가 얼마든지 잃을 수 있다." -p24, 역사가 H.A.L. 피셔의 말
여기서 진보는 윤리적 또는 도덕적 진보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칼 포퍼의 생각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 부분들은 소개하기 벅차서 생략하겠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논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져야 한다." 이것이 두 번째 논지입니다.
"모르면서 안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세 번째 논지입니다.
이것이 내가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접근법입니다. 그러나 잘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p141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 그리고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불확실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함부로 확실성을 가지지 말고 비판적 회의주의적인 접근을 해야합니다.
나는 아메바와 아인슈타인 사이에는 단 한 단계의 차이만 존재한다고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둘 다 시행착오 방법을 사용하는데, 아메바는 오류를 틀림없이 싫어할 겁니다. 오류가 제거되면 함께 사면하니까요.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오직 실수를 통해서만 학습할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새로운 오류를 포착하고 그 오류를 이론에서 제거하기 위해 새로운 시행을 감행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아메바는 취할 수 없으나 아인슈타인은 취할 수 있는 그 단계는 바로 비판적인 자세, 그것도 자기비판적 자세입니다. 비판적 접근법은 인간의 언어가 우리에게 남겨준 산물 가운데 최고의 미덕입니다. 나는 그것이 이 땅의 평화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p176
계몽주의자의 태도와 자칭 선지자들의 태도를 표면적으로 구분해주는 게 무엇일까요? 바로, 언어입니다. 계몽주의 사상가는 최대한 단순하게 이야기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기를 바라기 때문이죠. -p200
어렵게 이야기하는 사람, 전문용어를 남발하는 사람은 경계해야 합니다.
유럽 문명은 자연과학을 낳은 유일한 문명이며, 자연과학이 중대한 역할을 한 유일한 문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연과학은 합리주의의 직접적 산물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합리주의가 낳은 최대의 산물인 것입니다. -p208
이 글을 보며 왜 동양에서는 자연과학이 발생하지 않았는지, 왜 합리주의가 발달하지 않았는지 궁금했습니다. 권위주의 때문일까요? 형이상학적인 동양철학이나 종교 때문일까요? 고대 그리스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민주주의, 과학의 뿌리가 모두 고대 그리스에서 태동했습니다.
사실 국가 통치의 형태는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피를 흘리지 않고 현 정부를 교체할 수 있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그럴 수 없는 형태이지요. (중략) 피를 흘리지 않고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면 누가 통치하느냐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라도 전복될 수 있음을 아는 정부는 국민이 만족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강한 동기를 부여받습니다. 그리 쉽게 쫓겨나지 않음을 정부가 알면, 그 동기는 사라집니다. -p217
불완전하고 때론 불만족스럽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는 현재 우리가 가진 최선의 국가 통치 형태라 생각합니다.
나는 마르크시즘이 말하는 사상적 근거를 비판적으로 검증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의 승인에 의존하는 정도로 그쳤고, 그들은 또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의 판단에 의존했지요. 이는 모든 협력자가 지적으로 파탄 나고(무의식중에)서로를 거짓으로 인도하는 상호보험입니다. 나는 내가 이러한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단단히 빠진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당 지도자들이었습니다. -p245
사실 우리가 믿는 거의 모든 것이 이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믿기 때문에 우리도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하나하나 검증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된 믿음으로 다함께 향해가기도 합니다. 그 끝은 대부분 파멸일 것입니다.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p292
마르크스 이론의 기본을 이루는 개념입니다.
행복이란 어느 정도 우리의 사고방식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학자로서 말하건대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열린사회가 역사상 가장 좋은 사회이자 가장 공정한 사회라고 봅니다. -p299
우리는 역사상 가장 좋은 사회이자 가장 공정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도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행복한 사회에서 살고 있을까요? 과거보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행복할까요? 이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더 생각해 볼 문제인 거 같습니다.
역사는 오늘에서 멈춥니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과거의 연장이 아니며, 과거를 바탕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지워진 가장 큰 책임은 바로 우리가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미래를 더 나은 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과거로부터 학습한 모든 것을 적용해야 하는데, 우리가 배웠어야 마땅한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겸손입니다.
-p302
칼 포퍼는 마르크스 역사관과 헤겔의 역사관을 부정합니다. 모든 미래에 대한 예측이나 예언을 부정합니다. 역사가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강이라는 관점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칼 포퍼는 미래는 과거의 연장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 말합니다. 역사적인 관점이 아닌 한 개인의 관점에서도 대단히 바람직하고 좋은 관점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더 나은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덕목은 겸손과 낙관주의, 용기입니다.
칼 포퍼의 주장에 반박하고 비판하고 싶은 부분도 몇 있었는데 그러면 칼 포퍼의 주장도 소개해야 되고 해서 너무 힘들 거 같아서 그 부분은 페이퍼에 담지 않았습니다. 독서모임에서 그 부분들은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칼 포퍼의 핵심 주장, 이 책의 핵심 주장도 페이퍼에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따로 리뷰에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칼 포퍼의 책은 더 읽고 싶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마지막 계몽주의자, 과학철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철학자, 평생을 연구하고 공부한 학자. 평생 비판적으로 사색하고 자기 비판적이었던 인간. 칼 포퍼를 만나서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