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한 줄, 씩씩하게 읽는 책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가을을 말합니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봄을 말합니다. 그런데 도시에서 가을이나 봄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도시에서는 때때로 찻길 한켠 나무들이 노랗거나 빨간 잎사귀를 떨구어 가랑잎 수북한 모습을 만들어 주지만, 도시 청소부들은 ‘쓰레기 잔뜩 쌓였다’면서 힘겹게 치웁니다. 자가용 싱싱 모는 이들 또한 길가에 수북히 쌓인 가을잎을 눈여겨보지 않아요. 아니, 자가용 싱싱 몰며 신호등이랑 옆 자동차를 봐야지, 길가 가을잎을 살필 겨를이 없습니다.


  신영복 님은 《변방을 찾아서》(돌베개,2012)라는 책을 내놓으며 16쪽에서 “모든 교육은 인간교육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말합니다. 참 맞는 말이로구나 싶어 무릎을 치지만, 이내 무릎을 살살 비빕니다. 사람을 가르치는 배움터가 아니라 한다면 학교라 하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다고 느낍니다. 학교란, 사람을 가르치는 배움터입니다. 시험공부를 시켜 더 이름 높으며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보내려고 하는 데가 학교일 수 없어요.


  제가 살아가는 시골마을인 전남 고흥은 전라남도에서도 가장 외진 시골입니다. 해마다 사람 숫자가 사오천쯤 줄어드는 외진 시골입니다. 아직 어린이와 젊은이가 제법 남았으니 해마다 사오천쯤 사람들이 줄어든다 할 만할 텐데, 앞으로 열 해쯤 지나면 그때부터는 해마다 사오백쯤 줄어들겠지요.


  왜 이렇게 사람들이 줄어드는가 하면, 시골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기 무섭게 고향마을을 떠납니다. 시험공부 잘 하던 아이들은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느라 시골을 떠나고, 시험공부 그럭저럭 하던 아이들은 도시에 있는 대학교에 가느라 시골을 떠납니다. 시험공부는 그닥 못하지만 실업계 학교를 다닌 아이들은 도시에 있는 공장에 일자리를 얻어 시골을 떠납니다. 그래서 시골에서는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치면 거의 몽땅 도시로 가요.


  시골을 떠난 아이들은 시골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명절에도 바빠 웬만해서는 시골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저는 두 아이와 함께 시골이 좋아 시골에 집을 얻어 살아가지만, 시골에서 나고 자란 다른 아이들은 도시에서 문화와 물질과 문명을 누리고 싶다고 말하면서 시골을 등집니다. 저는 두 아이와 함께 숲과 들과 바다를 언제나 누리니 즐겁지만, 시골에서 나고 자란 다른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유치원과 보육원을 오가며 외려 숲이나 들이나 바다도 누리지 않으면서 도시에서 지내고픈 꿈을 키운다고 합니다.


  정진국 님이 쓴 《사진가의 여행》(포토넷,2012)이라는 책 95쪽을 읽다가 “존은 다른 사람과 다른 세상을 만났을 때 서로 질겁하지 않고, 정답게 눈길을 주고받을 때에나 나올 만한 사진을 찍었다.” 하는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도시나 시골이나 사람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더 나은 곳이나 더 좋은 곳은 없습니다. 스스로 사랑할 때에 사랑스러운 삶터이고, 스스로 아낄 때에 살가운 보금자리요, 스스로 즐길 때에 아름다운 삶자리예요.


  고흥군은 어디나 정갈한 시골이라 국립공원입니다. 공장도 골프장도 고속도로도 널따란 찻길도 송전탑도 발전소도 없는 데는 한국에서 고흥군 빼고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곳 시골 아이들은 저희 고향마을이 어떠한 삶자락인지 느끼지 못해요. 중학생도 고등학생도 학교 기숙사에 머물며 ‘도시에 있는 대학교’에 붙는 입시공부에 바쁘거든요. 고흥과 이웃한 여수나 보성이나 장흥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서울로 가고 싶습니다. 서울로 못 가면 인천이나 부산이나 대전이라도 가고 싶습니다. 도시가 어떤 곳인지 모르면서 도시를 바라지만, 막상 시골이 어떤 곳인지조차 모르며 시골에서 살아가는 오늘을 누리지 못해요.


  노정임 님 글과 이경석 님 그림이 어우러진 《땅속에 누가 살아?》(웃는돌고래,2012)라는 어린이책을 읽다가 62쪽에 나오는 “이렇게 동식물과 바위의 가루로 만들어진 흙들이 다 섞여서 지구를 덮고 있는 흙이 되어요.” 하는 대목을 가만히 되새깁니다. 흙이 있어야 논밭과 멧자락과 갯벌이 있어요. 논밭과 멧자락과 갯벌이 있어야 우리 먹을거리를 얻어요. 시골 아이가 도시로 간다 하더라도 시골이 있어야 밥을 먹고 삶을 누려요. 시골 아이가 시골을 떠나도 누군가 시골을 지켜야 사람들이 숨쉬고 살아갈 수 있어요. 씩씩한 시골아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4345.10.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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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씨앗 책읽기

 


  시골마을에는 사람이 손수 심어 돌본 나무가 있고, 씨앗이 스스로 뿌리내려 자란 나무가 있습니다. 손수 돌보아 키운 나무이건, 씨앗이 스스로 자란 어른나무이건, 모두 사랑스럽고 아름답구나 싶습니다. 사람들은 꽃을 보거나 열매를 얻거나 울타리로 삼으려고 나무를 심습니다. 예전에는 옷장을 짜려고 나무를 심기도 했습니다. 스스로 자라나는 나무는 사람들 바람이나 마음하고는 살짝 다르다 할 테지만, 푸른 잎사귀와 밝은 꽃과 예쁜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이 심은 감나무에서 맺는 감알은 사람도 먹고 멧새도 먹습니다. 사람이 안 심고 나무 스스로 씨앗을 내려 이루는 나무에 맺히는 열매 또한 사람도 먹고 멧새도 먹습니다. 때로는 사람은 안 먹고 멧새만 나무열매를 먹곤 합니다.


  빨갛게 빛나는 나무열매를 바라봅니다. 큰아이는 빨갛게 빛나는 나무열매가 예쁘다면서 톡톡 땁니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손이 안 닿는다며 열매를 따 달라고 했는데, 다섯 살이 된 올해에는 웬만한 데까지 손이 닿아 스스로 따서 즐깁니다. 큰아이는 빨간 나무열매를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이 열매는 새가 먹는 거야. 새가 맛있게 먹을 거야.” 하고 말하다가는, “나도 먹어야지. 아버지도 먹어 볼래요?” 하고 묻습니다. “아버지는 안 먹어. 새한테 주자.” 하고 대꾸하는데, 큰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싱글벙글 웃다가 슬쩍 혼자 먹습니다. “아, 맛있다.” 하면서 몇 알 집어먹더니, “새들 먹으라고 올려놓아야지.” 하면서 남은 열매를 이웃집 돌울타리 한쪽에 가만히 올려놓습니다. 가을이 빨갛게 무르익습니다. (4345.10.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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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속 책읽기

 


  도서관은 어디나 무척 조용합니다. 아니, 조용하게 지내도록 하는 데가 도서관이라고 느낍니다. 흔히들, 책이 있는 터는 조용해야 한다고 여기고, 책을 읽는 사람은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아무래도, 다른 시끄러운 소리가 없어야 책 하나에 깊이 마음을 쏟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나는 이제껏 도서관에서 책을 읽어 본 적 없습니다. 도서관에서 일한 적 있고, 도서관에 나들이를 한 적 있으나, 도서관에 갈 적마다 ‘일부러 만든 조용함’ 때문에 외려 몸이 움츠러들고, ‘만들어진 조용함’이 감도는 데에서는 졸음이 쏟아지곤 했습니다.


  책을 읽으려 한다면 자동차 시끄러이 오가는 길가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만나기로 한 누군가를 기다리며 복닥복닥 어수선한 찻집 앞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전철이나 버스나 기차를 타고 움직이면서도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마당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조용해야 책을 읽기에 알맞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억지로 조용한 터를 만든대서 책을 잘 읽을 만하리라 느끼지 않아요. 책을 읽을 만한 데는 ‘사람이 살아가는 터’라고 느껴요. 곧, 사람이 사람다운 꿈을 키우거나 사랑을 북돋울 수 있는 데가 비로소 책을 손에 쥐어 즐겁게 삶을 누릴 만하다고 느껴요.


  아이들과 숲마실을 합니다. 작은아이는 곯아떨어집니다. 작은아이 곁에 앉아 시집 한 권 읽습니다. 시집을 다 읽고는 나도 작은아이 곁에 눕습니다. 큰아이는 숲속 이곳저곳 어머니와 함께 돌아다닙니다. 이제 작은아이 일어나고 다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모두들 숲길을 걸어 천천히 집으로 갑니다. 문득 멧자락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가을숲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가을숲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습니다. 가을숲에서 베푸는 빛깔을 봅니다.


  사람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좀 다르게 느낍니다. 사람은 숲에서 태어나 숲에서 살아간다고 느낍니다. 죽으면 숲으로 돌아가는가? 스스로 죽음을 생각한다면 죽음을 맞이하면서 숲으로 돌아간달 수 있겠지만, 숲에서 태어난 사람은 숲으로 돌아간다고 느끼지 않아요. 사람은 스스로 숲이고, 숲은 곧 사람입니다. 새로 태어난 사람은 새로운 숲결 하나요, 새로운 숲결이 목숨을 다해 스러진다면, 가만히 몸뚱이가 녹아들면서 다른 새 숲결로 거듭나겠지요. 나무 한 그루 이천 해를 살며 스스로 숲이 되었듯, 스스로 숲이 되던 나무가 스러지며 스르르 숲결로 녹아들듯, 사람 또한 숲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며 언제나 숲넋을 건사하는구나 싶어요.


  숲을 읽으며 삶을 읽고, 숲에서 삶을 읽으며 책을 빚습니다.


  숲속에 깃들어 ‘나무로 빚은 종이책’을 펼쳐 읽습니다. 숲속에서 ‘나무책(나무가 종이로 다시 태어났기에)’을 헤아리며 내 숨결을 돌아봅니다. 내 둘레에서 온갖 벌레가 꼬물락거립니다. 내 곁에서 온갖 새가 지저귑니다. 내 언저리에서 아이들이 뒹굴며 놉니다. 나를 둘러싼 풀과 흙과 나무와 돌이 가을볕을 듬뿍 받으면서 싱그럽고 푸른 숨결이 되어 내 마음속으로 스며듭니다. 숲속에 깃들어 책을 읽는 동안 내 가슴속에서 자라는 숲넋 한 자락 곱다시 돌봅니다. (4345.10.2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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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책》 4호와 《사진빛 1》 나왔습니다. 어제(10.23)부터 봉투에 주소와 이름을 적어 우체국으로 가져가서 부칩니다. 집안일을 하면서 봉투에 주소와 이름을 적고 책을 싸서 부쳐야 하기에, 여러 날 걸쳐 천천히 부칩니다. 누군가는 오늘이나 모레에 책이 닿을 테고, 누군가는 금요일쯤 책이 닿을 테지요. 때때로 한 주 건너 다음주 월요일에 책이 닿을 수 있어요.


  《삶책》 4호는 ‘전남 고흥 사진책도서관 함께살기’ 소식지입니다. 《사진빛 1》은 전남 고흥 시골마을에서 두 아이가 개구지게 부대끼며 뛰어노는 여섯 달 삶자락을 무지개사진으로 담으면서 이야기 한 자락 펼치는 사진책입니다.


  《삶책》 4호와 《사진빛 1》은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 함께살기’가 튼튼하게 이어갈 수 있도록 도움돈을 보내 주시는 분한테만 띄웁니다. 이 책들을 받고 싶으신 분은 언제라도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 지킴이’가 되어 주셔요.

 

 

 

● 《삶말》, 《함께살기》 한 해 받기 (☞ 도서관 한 평 지킴이)
   : 해마다 10만 원씩 (또는) 달마다 1만 원씩
  (두 평 지킴이는 20만 원 또는 2만 원씩, 세 평 지킴이는 30만 원 또는 3만 원씩)
   《삶말》, 《함께살기》 평생 받기 (☞ 도서관 평생 지킴이)
   : 200만 원 한 번 (또는) 사진책 100권 기증


● 돕는 돈은 어디로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손전화 : 011-341-7125
   누리편지 : hbooklove@naver.com
★ 도서관 자리로 쓰는 ‘옛 흥양초등학교’를 통째로 장만할 꿈을 키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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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밟기

 


  양말 안 신은 맨발 고무신차림으로 걷습니다. 누군가는 고무신 꿰고 멧길 오르내리면 미끄럽지 않느냐 묻는데, 미끄럽자면 무얼 신어도 미끄럽고 맨발이어도 미끄럽습니다. 누군가는 발바닥 안 아프느냐 묻는데, 발바닥 아프자면 맨발이건 고무신이건 두툼하거나 폭신한 신이건 다 아픕니다.


  맨발에 고무신으로 흙을 밟으면 발가락마다 흙 밟는 느낌을 물씬 받아들입니다. 풀을 밟으면 풀을 밟았구나 느끼고, 꽃송이 밟으면 꽃송이 밟는구나 느낍니다. 손가락으로 풀잎이나 나무줄기 쓰다듬을 때에 손가락이 풀잎이나 나무줄기를 느끼듯, 맨발에 고무신은 흙을 살가이 느끼고픈 마음입니다.


  길바닥이 시멘트바닥이나 아스팔트바닥이 아니라면 얼마나 즐거울까 꿈꿉니다. 길바닥이 흙바닥이라면 어른도 아이도 모조리 맨발로 다닐 텐데 싶습니다. 흙바닥인 길바닥이라면 누구라도 섣불리 병조각이나 못조각 떨어뜨리지 않을 테지요. 내가 다니는 길은 네가 다니는 길이요, 네가 다니는 길은 내가 다니는 길이니, 흙바닥을 맨 발바닥으로 다닐 수 있도록 서로 아끼고 보듬고 지키고 살피겠지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는 거의 맨발로 흙일을 합니다. 흙을 밟고 흙을 만지며 흙을 돌볼 적에는 으레 맨손이요 맨발입니다. 어버이인 내가 아이를 씻기고 쓰다듬을 적에는 으레 맨손이요 맨발입니다. 내 손길이 아이들 살결에 닿습니다.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 손길이 흙알갱이에 닿습니다.


  자꾸만 도시가 커지면서 자꾸만 시멘트바닥과 아스팔트바닥이 늘어납니다. 자꾸만 구두며 차린옷이며 늘어납니다. 자꾸만 자가용 늘고 승강기나 손전화 기계 늘어납니다. 흙을 밀어내고 지은 도시에는 시멘트만 어울린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흙과 어깨동무하는 도시일 때에 한결 아름답고 싱그럽구나 싶습니다. 숲을 짓이긴 채 세운 도시에는 아스팔트만 걸맞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흙과 사랑 나누는 도시일 때에 비로소 곱고 맑구나 싶습니다. (4345.10.2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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