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은행잎 책읽기

 


  창원중앙역에서 기차를 내려 한 시간 남짓 창원시 언저리와 한복판을 걷는다. 처음 창원중악역 둘레를 걷는 동안, 퍽 많구나 싶은 나무들이 우람하게 자라 숲을 이루어 눈이 확 트이고 가슴이 시원스레 열린다. 나무내음이 물씬 풍기며 알록달록 곱다. 이윽고 나무숲을 지나 시내 한복판으로 접어들 무렵부터 나무는 온데간데없고 높다란 건물과 널따란 찻길과 끝없는 자동차가 물결을 이룬다. 나무그늘 아닌 건물그늘에서 벗어날 무렵 새삼스레 노란 은행잎이 빛나는 조그마한 거님길이 나오고, 5층짜리 나즈막한 아파트가 나온다. 도시에서 숨을 틀 만한 데가 시내 바깥에 살짝살짝 있구나. 도시에서 가장 예쁘다 할 만한 이 노란 은행잎 거님길을 걷는 아이들이 있네. 이 길을 거닐면서 노란 가을내음 가을빛 가을바람 누릴 수 있겠지. 도시에서 배기가스 때문에 은행나무만 심지 말고, 감나무도 심고 능금나무도 심으면, 감나무 우거진 길을 거닐며 감알 발그스름한 싱그러운 빛깔과 내음을 물씬 누릴 테고, 복숭아나무도 심고 살구나무도 심으면 봄날 이 길을 거닐 적에 복숭아꽃 살구꽃 흐드러진 고운 빛깔과 내음을 듬뿍 누리겠지. (4345.11.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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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아직 책을 안 읽니?

 


  아직 때가 안 되었으니 못 읽겠지요. 책은 줄거리를 훑자고 읽는 책이 아니에요. 책은 마음으로 읽고 마음으로 아로새기며 마음을 북돋우기에 책이에요. 그러니, 스스로 마음그릇이 덜 된 사람은 책을 읽지 못해요. 그렇지만, 퍽 많은 이들은 마음그릇이 덜 되었는데에도 손에 책을 쥐어요. 저마다 이녁 마음그릇에 걸맞다 싶은 책을 손에 쥐고는 그만 ‘줄거리 흝기’에 빠지고 말아요.


  책읽기는 사랑읽기이기에, 책 하나 읽을 때에 사랑을 느껴야 아름다울 테지만, 정작 줄거리만 훑으니까, 어느 책을 읽든 사랑 아닌 줄거리만 자꾸 따져요. 책느낌글을 쓸 적에도 스스로 누린 사랑을 쓸 노릇이지만 하나같이 줄거리만 잔뜩 읊어요. 스스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사랑을 느끼지 못했으니 줄거리만 적겠지요. 스스로 마음을 일깨우지 않았고 사랑을 북돋우지 않았으니 줄거리 아니고는 책느낌글을 쓸 수는 없겠지요.


  왜 아직 책을 안 읽나요? 왜 아직 삶을 안 읽나요? 왜 아직 사랑을 안 읽나요? 왜 아직 꿈을 안 읽나요? 왜 아직 줄거리만 읽나요? 왜 아직 겉껍데기를 읽고, 글쓴이 발자국을 읽으며, 출판사 이름값만 읽나요? 왜 아직 책을 안 읽나요? (4345.1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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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 석류꽃 책읽기

 


  늦가을에 석류꽃 한 송이 빨갛게 피어나다. 석류열매 붉디붉게 맺혀 몽땅 떨어진 석류나무 가운데 한 그루에서 맨 꼭대기 나뭇가지에 석류꽃 한 송이 달린다. 어쩜, 너는 어떡하니. 나날이 바람이 차갑게 바뀌는데, 늦가을 앞두고 여러 날 퍽 따스한 바람이 불고 고운 햇살이 드리웠다지만, 이렇게 일찌감치 몽우리를 열면 어떡하니.


  그래도, 너는 너대로 가을 끝자락과 겨울 첫자락을 보고 싶었니. 그래, 굳이 굵다란 석류알이 되어야 하지는 않아. 가을바람 맡고 겨울바람 쐬면서 더 씩씩하고 튼튼하게 한삶을 누릴 수 있어. 봄내음과 여름내음 맡으며 피어나는 석류꽃도 아리땁지만, 찬바람과 눈바람 마주하는 석류꽃도 어여뻐. 누렇게 익은 벼를 베어낸 텅 빈 논자락 곁에서 한들거리는 석류나무에 새로 돋은 푸른 잎사귀와 너무 일찍 터지고 만 석류꽃 봉오리 하나, 더없이 푸르고 붉으며 환하구나. (4345.10.3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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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걸리 물맛 느끼는 책읽기

 


  나는 처음부터 막걸리 물맛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도시인 인천에서 살다가 시골인 충청북도 음성으로 깃들어 한 해를 살며 조금씩 물맛을 달리 느꼈고, 더 외진 시골인 전라남도 고흥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비로소 물맛을 느낍니다. 냇물과 수도물과 정수기물이 어떻게 다른가를 혀로도 알고 눈으로도 알며 마음과 몸으로도 압니다. 페트병에 담아서 파는 먹는샘물 맛 또한 냇물 맛하고 사뭇 다른 줄 몸으로 느낍니다. 제아무리 맑고 싱그러운 냇물이라 하더라도 페트병에 담은 채 여러 날 여러 달 지내고 나면 맑거나 싱그러운 기운이 송두리째 사라지는구나 하고 느껴요.


  사람이 마실 물은 ‘흐르는 물’입니다. 가둔 물을 플라스틱병에 가두어 놓고 마실 때에는 사람 몸뚱이 또한 ‘갇힌 몸’처럼 된다고 느낍니다. 정수기로 거른다거나 주전자로 끓인다거나 해서는 물맛을 느끼지 못할 뿐더러 물 한 방울이 고운 목숨으로 나한테 스며들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맑게 숨쉬는 물을 마시면서 맑게 숨쉬는 넋으로 살아갈 나예요. 싱그러이 빛나는 물을 마시면서 싱그러이 빛나는 얼로 살아갈 나예요.


  시골 막걸리는 시골마을 냇물로 빚습니다. 도시 막걸리는 수도물이나 정수기물로 빚겠지요. 시골 막걸리는 시골마을 쌀로 빚습니다. 도시 막걸리는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데에서 사들인 쌀로 빚습니다. 오늘날 한국 시골에서 농약 안 쓰는 데는 아주 드물지만,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나라는 훨씬 어마어마하게 농약을 칩니다. 농약을 쳐서 지은 쌀을 배로 실어 한국으로 올 적에는 또 어떤 농약이나 방부제를 뿌릴까요. 벌레 먹지 않도록 갖가지 농약과 방부제를 뿌리잖아요.


  이제 도시로 마실을 가서 도시사람 즐긴다는 막걸리 한 잔을 콸콸 부어 받을 적에는, ‘아, 이 막걸리 물빛과 물내음과 물맛 모두 사람 숨결을 살리기는 힘드네.’ 하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꿉니다. 구정물이건 비눗물이건 내 몸을 살찌우는 고마우며 반가운 밥이로구나 하고 여기며 막걸리잔을 들이켭니다. 스스로 내 마음을 씻고 고운 물 한 방울 입에 털어넣습니다.


  도시에서 볼일을 마치고 시골집으로 돌아오면 맨 먼저 시골집 냇물을 꿀꺽꿀꺽 들이켭니다. 크아, 좋구나. 나는 이 맛을 느끼고 이 내음을 맡으며 이 빛깔을 바라보면서 내 몸과 마음을 사랑해야지. 내가 사랑하며 살아갈 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지. 내가 아끼며 보살피고 북돋울 믿음이 무엇인가를 헤아려야지. 내가 즐기며 누리고 나눌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지. (4345.10.3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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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만화책

 


  어떤 만화책 1권과 2권을 읽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도무지 짚을 수 없다. 이 만화를 그린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이 만화를 그리며 그이는 어떤 삶을 일구었을까. 미국에서 무슨무슨 상을 받기까지 했다는데, 무슨무슨 상은 어떤 만화에 주는지 알쏭달쏭하고, 상을 받았건 말건 이러한 만화책을 굳이 한국말로 옮겨 한국사람한테 읽히려 한 까닭은 무엇인지 또 아리송하다.


  그러나, 나 혼자 재미없다고 느끼거나 뜬금없다고 느낄는지 모르리라. 무슨무슨 상을 준 사람들은 재미있다고 느꼈을 테며, 한국말로 옮긴 출판사와 편집자와 번역자는 재미있게 읽었을 테지.


  저녁에 아이들과 〈아기공룡 둘리〉와 〈우주소년 아톰〉과 〈달려라 하니〉 만화영화를 하나씩 보면서 새삼스레 다시 생각한다. 꼭 어떤 틀이나 줄거리나 이야기가 있어야 재미난 만화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다만, 만화이든 시이든 그림이든 소설이든 무엇이든, 살아가는 꿈이 있을 때에 읽을 만하리라 느낀다. 이와 함께, 살아가는 사랑이 있을 때에 즐겁게 맞아들일 만하리라 느낀다.


  그러고 보면, 내가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밑까닭이 있다 하면, 바로 이 두 가지 대목이 아닐까. 꿈과 사랑. 나 스스로 꿈꾸지 않을 때에는 어떠한 글도 쓰지 못하고 어떠한 사진도 찍지 못한다. 나 스스로 사랑을 길어올리지 않을 적에는 아무 글도 못 쓰고 아무 사진도 못 찍는다. 난 언제나 사랑스레 살아가며 글을 쓰는 사람이요, 늘 꿈꾸듯 살아가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다. 내 글과 사진에 사랑과 꿈을 담지 않는다면 굳이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을 까닭이 없다고 느낀다.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꿈꾸면서, 내 반갑고 즐거운 동무와 이웃하고 예쁘게 나눌 글과 사진을 한결같이 씩씩하게 돌보고 싶다. (4345.10.2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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