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헌장’과 ‘푸른다짐’
[말사랑·글꽃·삶빛 38] 입시지옥에 시달려야 한다면

 


  토박이말이란 따로 없습니다. 한 나라에서 살아가며 쓰는 말만 있습니다. 그러나 ‘한 나라’라는 울타리도 덧없습니다.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이는 전라도말을 하고, 충청도에서 나고 자란 이는 충청도말을 하는걸요. 그런데, 전라도나 충청도라는 울타리도 덧없어요. 전주에서 나고 자라면 전주말을 하고, 고흥에서 나고 자라면 고흥말을 해요. 강릉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강원말 아닌 강릉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더 헤아리면, 고흥말도 옳지 않습니다. 고흥군에서 도화면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포두면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봉래면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말이 또 다릅니다. 더 살피면, 고흥군 도화면이라 하더라도, 동백마을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호덕마을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지죽마을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말이 다시 달라요. 마지막으로, 이 마을 저 마을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어버이에 따라 말이 새삼스레 다릅니다. 곧, 내가 하는 말이란 나를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늘 들려주는 말이에요.


  하루가 지나고 한 해가 흐르며 무럭무럭 자랍니다.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새롭게 일굽니다. 그래서 내 말은 어느새 어머니말이나 아버지말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내 말’로 거듭납니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 다르고 목소리가 다 다르듯이, 사람마다 ‘스스로 쓰는 말’이 모두 다릅니다. 백만 사람이 글을 쓰면 백만 가지 글이 태어납니다. 억만 사람이 글을 쓰면 억만 가지 글이 태어나요.


  말이란 ‘말하는 사람 넋’을 담습니다. 말하는 사람 넋이란 ‘말하는 사람 삶’을 드러냅니다. 곧, 나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달라지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어떻게 말하느냐가 달라져요.


  오늘날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을 헤아려 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거의 모두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시골에서 태어나든 도시에서 태어나든 한결같이 도시에서만 살아간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도시에서는 무엇을 할까요. 거의 모두 회사원이 되거나 공무원이 되거나 가게를 차려 장사를 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다 같은 일을 하거나 얼추 비슷한 일을 해요. 똑같은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쓰고, 똑같은 기계 앞에 앉아 공장을 움직이며, 똑같은 물건을 날마다 똑같이 사고파는 장사를 해요.


  어른이 되어서 도시에서 지내며 하는 일은 모두 똑같다 할 만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어른이 주고받는 말은 내남없이 모두 똑같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부산 말씨와 진주 말씨가 살짝 남기는 하더라도 ‘말 얼거리’와 ‘말 속살’과 ‘낱말 갈래’와 ‘말 매무새’는 모두 판박이처럼 엇비슷해요.


  어린이와 푸름이는 어떠할까 헤아려 봅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보육원부터 텔레비전에 길들고 유치원부터 일찌감치 영어노래에 젖어듭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들은 모두 똑같은 교과서로 똑같인 지식을 쌓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초등학교 때보다 훨씬 깊고 넓게 ‘똑같은 시험공부’만 하도록 내몰립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이 나라에서 어른과 아이는 서로 똑같은 말만 한달 수 있어요. 다 다른 어른이고 다 다른 아이라 하지만, 다 같은 말이고 다 같은 넋이 되고 말아요. 다 같은 삶이거든요. 아니, 가만히 보면 ‘다 같은 삶’이 아니라 ‘다 틀에 박힌 굴레’나 ‘다 울타리에 갇힌 쳇바퀴’라 해야 올바를는지 모릅니다. 스스로 생각을 밝히는 배움이 아니거든요. 대학바라기 시험공부를 한다며 입시지옥에 허덕이거든요. 대학교를 마친 뒤에는 취업전쟁에 사로잡혀 스스로 ‘내 말’ 찾는 일하고는 아주 등을 져요. 이리하여, 이 나라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시집장가를 갈 무렵에는 ‘내 말’이란 없습니다. ‘제도권 사회 말’만 남아요. 제도권 사회 말만 남은 이 나라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는다 하면, ‘어른이 된 아이’가 낳아서 돌볼 아이들은 ‘내 어머니라 남다른 말’이라든지 ‘내 아버지라 새로운 말’은 들을 수 없습니다.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말이랑 똑같은 말이 집안에서 감돕니다. 교과서와 문제집에 적힌 말이랑 똑같은 말이 ‘둘레 어른 누구나 쓰는’ 말입니다.


  입시지옥에 시달려야 한다면, 오늘날 이 나라 푸름이가 품을 넋과 보듬을 말은 더없이 슬픈 모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다 다른 푸름이가 다 다른 푸른 빛을 누리지 못할 테니까요.


  ‘청소년헌장’이 있다지요. ‘어린이헌장’도 있다지요. 나는 이런 어려운 ‘헌장’이라는 말은 안 씁니다. 적어도 ‘푸른다짐’이나 ‘맑은다짐’ 같은 말마디로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이름을 고쳐 ‘푸른다짐’ 같은 말을 쓰고 싶어도, 오늘날 한국에서 푸름이들이 이름 그대로 푸르게 살아가지 못한다면, 허울만 ‘푸른 옷’을 입힌대서 푸른 꿈을 펼치지 못해요. 푸른 삶일 때에 푸른 넋이요 푸른 말입니다. 맑은 삶일 적에 맑은 넋이며 맑은 말입니다.


  어린이는 맑은 눈망울 빛내며 맑은 말을 노래할 때에 아름답습니다. 푸름이는 푸른 눈망울 빛내며 푸른 말을 노래할 때에 어여쁩니다.


  나무가 우거지고 풀이 흐드러진 푸른숲을 떠올립니다. 이 나라 어린이와 푸름이는 도시 한복판 자동차 시끄러이 오가는 매캐한 바람을 먹으며 살아야 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 어린이와 푸름이는 누구나 시골마을 들새와 풀벌레 노래하는 아름다운 푸른숲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나라 어른도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딱딱한 틀이 선 도시 아닌, 흙과 햇살과 물과 바람 싱그러운 푸른숲에서 푸른 사랑을 꽃피울 때에 아름다운 삶을 누리면서 아름다운 넋을 일구고 아름다운 말을 돌볼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국어사전을 들춘대서 토박이말을 캐내지 못합니다. 국어사전을 들추어 토박이말을 캐낸들 ‘내 삶으로 받아들여 즐거이 쓸 말’이 되지 못합니다. 국어사전을 들추어 캐내는 토박이말은, 여느 지식인이 지식자랑을 하려고 끌어들이는 영어나 한자하고 똑같습니다. 죽어 가는 토박이말을 캐낸들 한겨레 말삶을 북돋우지 못합니다. 국어사전에 파묻힌 토박이말을 끄집어낸들 한겨레 글삶을 살찌우지 못합니다.


  나부터 스스로 삶을 북돋울 때에 말을 북돋웁니다. 나부터 스스로 생각을 살찌울 때에 글을 살찌웁니다. (4345.11.2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국어사전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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