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발명
정광 지음 / 김영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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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음기호 훈민정음’이 ‘멋진 한글’로 거듭나다

― 한글의 발명

 정광 글

 김영사 펴냄, 2015.7.10. 19800원



  오늘날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여기곤 하지만, 참말 ‘글을 모르는 사람’은 꽤 많습니다. 글을 몇 줄 적어 보라고 하면 아예 못 쓰는 사람이 젊은이 가운데에도 제법 있습니다.


  왜 글을 모르는 사람이 꽤 많을까요? 글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글장님(문맹)’이라고도 하는데, 글을 모른다고 해서 삶을 누리지 못하지는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말을 모른다’고 하면 살지 못할 테지만, ‘글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즐겁게 삽니다.



한문 원문은 〈한문본〉과 〈해례본〉에서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우리나라의 발음이 중국과 달라서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는다”라 하여 한자에 대한 우리의 발음과 중국의 차이를 지적한 것이다. (16쪽)



  명예교수 정광 님이 쓴 《한글의 발명》(김영사,2015)을 읽습니다. 500쪽 남짓 되는 도톰한 책입니다. 정광 님은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하고는 다른 이야기를 이 책을 빌어서 들려주고자 합니다. 다만, 교과서에 안 나오는 지식일 뿐, 사람들이 ‘모두 몰랐다’고 할 수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교과서 지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한쪽 정당 사람들로만 정치권력이 이어지는 동안 ‘교과서 지식’으로는 1961년에 있던 어떤 일을 ‘혁명’이라 했습니다. 이제 1961년 5월에 있던 어떤 일을 ‘혁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학교에서도 어엿하게 ‘쿠테타’라고 말하면서 가르칩니다. 1980년 광주에서 있던 일도 그리 오래지 않은 지난날까지 교과서에서는 한 줄로도 안 다루었을 뿐 아니라 ‘사태’나 ‘소요’ 같은 이름을 붙이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민주화운동’이나 ‘민중운동’이나 ‘항쟁’ 같은 이름을 널리 씁니다.


  그러면, 《한글의 발명》을 쓴 정광 님은 어떤 ‘교과서 지식’하고 맞서 싸우려고 할까요? 교과서에서는 ‘훈민정음 창제’를 “세종대왕이 사상 유례없는 독창적 글자를 만들었다”나 “위대한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완벽한 글자를 만들었다”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바로 이 대목을 뒤집으려는 이야기를 펼치려고 《한글의 발명》을 선보입니다.



한자는 고립어를 표기하도록 고안된 문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교착어를 사용하는 북방민족들 사이에는 한자가 아닌 자신들의 언어를 기록할 문자의 필요성을 오래전부터 절실하게 느꼈다. (28쪽)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은 ‘기존 정설’이 아니라 ‘교과서 지식’입니다. 이 대목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를 더 찬찬히 헤아려야 합니다. 세종 임금이 훈민정음을 지어서 내놓았다고 하더라도, 이 글(훈민정음)은 ‘조선 사회를 이루던 99퍼센트에 이르던 백성(시골 농사꾼)’이 쓰도록 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시골 농사꾼이 배워서 쓰라고 하는 훈민정음이 아닌, 1퍼센트 권력자와 지식인이 ‘중국글과 중국말’을 제대로 배워서 쓰도록 도우려고 하던 훈민정음입니다.


  그러면, 훈민정음은 어떤 구실을 할까요? 훈민정음은 ‘소릿값을 적는 글’입니다. 한자말을 빌어서 말한다면 ‘발음기호’입니다.



‘정음’이란 명칭은 원래 한자음의 표준 발음이란 뜻으로 ‘속음’과 대조되는 말이다 … 한자의 정음을 정하는 것은 조선에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서도 고려시대부터 중국의 과거제도를 수입하여 정착시켰으며 이를 통하여 관리임용의 기준이 되었다 … 세종은 중국의 한어음을 고칠 수는 없으니 우리 한자음을 고치려고 한 것이다. (38, 39, 53쪽)



  훈민정음이 ‘발음기호’라고 하는 대목을 잘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훈민정음 = 발음기호”라고 해서 훈민정음을 깎아내리는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참이 그러할 뿐입니다. 발음기호를 세종 임금이 지었다고 해서 아쉽다거나 안타까울 일이 없습니다. 조선 사회 권력자와 지식인이 중국글하고 중국말을 제대로 익혀서 ‘외교’를 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테니, 중국을 둘러싼 여러 겨레 가운데 조선이라는 나라는 무척 뜻있고 훌륭한 ‘발명’을 한 셈입니다.



한글이 과학적인 것은 15세기에 제정된 훈민정음이 조음음성학의 이론에 입각하여 음운을 분석하고 문자를 제정한 때문이다. (24쪽)



  ‘글’은 ‘말’을 담는 그릇입니다. 말이 있어야 비로소 글이 있습니다. 글만 있다고 하면 아무 이야기를 못 나눕니다. 말이 있어서 이야기를 나누기에, 비로소 이 말을 ‘글이라는 그릇’에 담아서 서로 나눕니다.


  영어를 담는 그릇인 알파벳도 그릇입니다. 알파벳을 안다고 해서 영어를 알지 않습니다. 알파벳을 달달 외워서 잘 안다고 하더라도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말이나 독일말이나 덴마크말이나 핀란드말이나 네덜란드말을 할 수 있지 않아요. ‘말’을 익히거나 배워야 ‘말’을 합니다. 글만 배워서는 ‘글자(알파벳)만 알’ 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세종 임금은 ‘말을 담는 그릇인 글’을 새롭게 지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궁금해 할 수 있는데, “‘발음기호’가 어떻게 글이냐?” 하고 물을 만합니다. 그런데, 발음기호가 바로 글입니다. 글은 여러 갈래가 있어서, 그림이나 무늬를 고스란히 옮기는 글이 있고, 소리를 고스란히 옮기는 글이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여러 가지 글 가운데 ‘온갖 소리를 골고루 받아들여서 기쁘게 담는 멋진 글’입니다.



직접적인 파스파 문자의 제정 동기는 몽고 위구르자가 한자의 발음을 전사하기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파스파 문자의 한자음 표음은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한자 교육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즉, 한자음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음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므로 표음문자인 파스파자는 한자의 발음을 표음하는 데 더할 나위가 없는 좋은 발음기호였다. (121, 313쪽)



  세종 임금은 ‘조선 사회 권력자와 지식인’이 ‘중국말하고 중국글’을 잘 익히도록 이끌려는 뜻에서 ‘훈민정음이라고 하는 글’을 짓습니다. 다만, 혼자 짓지는 않아요. 《한글의 발명》이라는 책에서도 밝히듯이, 둘째 딸도 돕고 여러 스님(학승)도 돕습니다. 세종 임금이 ‘새로운 글’을 지은 까닭은 중국말하고 중국글을 잘 배우도록 도우려는 뜻이 있을 뿐 아니라, 이 새로운 글을 지어서 ‘조선 사회 다른 권력자와 지식인’이 익히도록 하면, 다른 권력자와 지식인은 세종 임금이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는 셈입니다. 그야말로 가장 힘센 우두머리(권력자)가 되는 셈입니다.


  이 대목에서도 잘 살펴야 합니다만, ‘가장 힘센 우두머리’가 되려는 일은 나쁘게 깎아내리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통치자는 새로운 정치권력을 세우면서 ‘말과 잣대(도량형)’를 바꿉니다. 새로운 정치권력 통치자가 시키는 뜻대로 사람들이 따르기(복종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앞선 다른 임금처럼 ‘한자’만 쓰지 않고 ‘훈민정음’을 새로 지은 뜻은, 세종 임금이 부리는 힘이 다른 어느 임금보다 크고 세며 대단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라 안팎으로 당차면서 훌륭하고 멋진 힘을 떨치기에 ‘새로운 글’을 지을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의 자형은 초성의 경우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제자하였고 중성의 경우 천지인 삼재를 상형한 것이어서 티베트 문자를 토대로 한 파스파자와는 다르며 그런 의미에서 독창적이다. (356쪽)



  《한글의 발명》을 읽어 보면, 훈민정음을 세종 임금이 새로 지을 적에 ‘파스파 글’을 많이 살폈다고 합니다. 파스파 글이 먼저 있었기에 이를 잘 살피면서 ‘훌륭한 대목’을 받아들이고 ‘덜 훌륭한 대목’은 둘째 딸이나 여러 스님하고 함께 머리를 맞대면서 새롭게 수수께끼를 풀 뿐 아니라, 닿소리와 홀소리를 단출하면서 깔끔하고 멋지게 갈무리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서 ‘국어’는 일본어가 되었고, ‘국문’ 즉 나라의 글자는 일본의 가나 글자를 말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어학회가 억지로 만든 이름이 한글이다. 따라서 한글이란 명칭은 역사적으로 보면 슬픈 이름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22쪽)



  그런데 《한글의 발명》을 쓴 정광 님은 이 책을 좀 어설피 엮었습니다. 500쪽을 웃도는 책이지만, ‘제1장 들어가기(13∼42쪽)’에서 이녁이 새롭게 밝히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고, 이 다음부터는 ‘13∼42쪽’에서 적은 이야기를 다시 되풀이합니다. 이러면서 정광 님이 쓴 다른 논문이나 책에 실린 이야기를 그대로 옮깁니다. ‘동아시아 여러 문자’를 살핀 글이나 ‘한글 발명과 보급에 이바지한 사람’을 다루는 글은 이 책에서 좀 군더더기 같습니다. ‘언어학 이론으로 살핀 한글’이라는 글도 ‘다른 기존 연구에서 다 드러난 이야기’이기 때문에 굳이 이 책에 실을 만한 까닭은 없어 보입니다. 정광 님이 새로운 학문 이론을 펼치려고 한다면, ‘교과서 지식’으로도 다루는 ‘과학 원리로 지은 한글 이야기’까지 굳이 이 책에서 똑같이 되풀이하지 않아도 되리라 느낍니다.


  그리고, ‘한글’이라는 이름이 “슬픈 이름”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만, ‘한글’이라는 이름은 세종 임금이 하지 않거나 못한 일을 주시경 님이 새롭게 일군 “기쁜 이름”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이 글(말을 담는 그릇+발음기호)이 조선 사회에 있을 적에는 몇몇 권력자하고 지식인만 이 글을 배워서 썼습니다. 99퍼센트에 이르는 사람들은 훈민정음을 모를 뿐 아니라, 알 까닭도 없습니다. 양반 사회는 사람을 계급으로 갈랐고, 양반에 들지 못하는 사람은 훈민정음이든 한자이든 알 수 없고 배울 수 없었지요. 양반에 드는 이들은 한자(한문)만 배우면 되지, 구태여 훈민정음을 배우려 하지 않기 마련입니다. 과거제도에서는 한문으로 시험을 치르지, 훈민정음으로 시험을 치르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언저리에 ‘한글’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태어납니다. “한겨레가 늘 나누는 말을 담는 그릇인 글”로 처음으로 빛을 봅니다. 주시경 님을 비롯한 뜻있는 학자와 독립운동가는 ‘한글’이라는 새 숨결을 처음으로 알아보면서 떨치고 펼치면서 ‘한글 가르치기’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습니다.



한자음 표기의 수단으로 제정된 훈민정음은 고유어의 표기에도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182쪽)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만 있을 적에 이 글은 그냥 ‘중국말 받아적는 발음기호’였습니다. 그러나, 이 글이 ‘한글’로 새 옷을 입은 때부터는 ‘한겨레가 제 말을 담는 그릇’으로 거듭났습니다.


  세종 임금이 훈민정음을 지은 까닭이 어떠하든, 1900년대로 접어드는 무렵부터 ‘한글’은 한겨레와 한국사람 모두한테 기쁨과 웃음을 베푸는 사랑스러운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한글 발명’이라고 한다면, 주시경 님부터 그 뒤에 이 땅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글을 발명했다고 해야 올바르고, ‘훈민정음 창제’라고 한다면, 세종 임금이 조선 사회에서 새로운 글을 처음으로 지었다고 해야 올바르리라 느낍니다.


  이제 간추려 본다면, 세종 임금은 “한글 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종 임금은 “훌륭한 발음기호를 창제”했습니다. “‘한글 발명’은 뜻있고 슬기로운 분이 앞장서서 했을 뿐 아니라, 온 나라 모든 수수한 사람이 오늘도 한결같이 다 함께 하는 일”입니다.



한글도 그런 역할을 기대하면서 만들어졌다. 즉, 처음에는 당연히 올바른 한자의 한어음, 즉 당시 중국의 표준음인 정음을 표음하는 기호로 만들어진 것이다. (52쪽)



  말은 언제나 우리 가슴에서 살아서 움직입니다. 글을 몰라도 우리는 늘 말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아이들은 글을 몰라도 사랑스레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오늘날 시골 농사꾼도 글을 거의 모르시지만, 말로 구수하면서 살가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말’을 보아야 합니다. ‘글에 담는 말’을 보아야 합니다. 말이 있기에 글을 쓸 수 있다는 대목을 보아야 합니다. 말을 살리면서 글이 살아나는 대목을 찬찬히 보아야 하고, 말을 사랑하고 가꾸는 동안 글도 사랑스레 거듭나면서 아름답게 피어난다는 대목을 보아야 합니다.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이러하므로 나라마다 그 말을 힘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니라.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니 이지러짐이 없고 자리를 반듯하게 잡아 굳게 선 뒤에야 그 말을 잘 지키나니라(주시경-한나라말).”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되새겨 봅니다. 글만 있어서는 나라가 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글이 있어도 ‘훌륭한 말’이 없다면 그릇은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리 값진 밥그릇이 있어도, 맛나게 지은 밥이 없으면 밥그릇은 쓸 데가 없어요.


  우리가 여느 자리에서 늘 쓰는 수수한 말이 바로 ‘훌륭한 말’이고, 이 훌륭한 말이 있어서 서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훌륭한 글’을 정갈하고 아름답게 가꿀 수 있습니다. ‘한글’이 아니어도 ‘말’은 살아서 숨쉬는데, 한글을 더욱 알뜰히 갈고닦으면 말은 더욱 기쁘고 힘차게 살아서 숨쉴 수 있습니다. 4348.8.10.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한글과 우리말과 훈민정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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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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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22



죽음을 앞두고 즐거운 마음이 된 할머니

― 사는 게 뭐라고

 사노 요코 글

 이지수 옮김

 마음산책 펴냄, 2015.7.15. 12000원



  무더운 여름날이 이어지니, 아이들은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물놀이를 합니다. 물놀이를 마치고는 알몸으로 마당으로 뛰쳐나와서 물기를 말린다고 하면서 달리고 놀다가, 다시 땀이 난다면서 욕조로 들어가서 물놀이를 합니다. 후박나무 밑에 천막을 쳐 놓았기에, 아이들은 천막으로도 들어가서 놀다가, 햇볕이 나무그늘을 벗어나서 천막을 비출 무렵에는 마루로 놀이터를 옮깁니다. 집안에서 가장 시원한 곳을 찾아서 이리저리 옮기면서 신나게 놉니다.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작은아이는 꾸벅꾸벅 졸다가 눕다가 일어나다가 먹다가를 되풀이합니다. 이제 이를 닦고 자야겠구나 하고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가 도와줘.” 하고 가늘게 말하는 작은아이 이를 닦아 줍니다. 이제 쉬를 하고 자리에 눕자고 하니, 스스로 마당으로 내려서서 쉬를 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잠들 생각을 않습니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합니다. 두 아이 모두 졸린 몸을 견디며 그림놀이를 합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놀다가, 또 한 번 힘을 뽑아내어 놀더니, 그야말로 남은 힘이 하나도 없어서 곯아떨어질 때가 놀이를 찾습니다.



옛이야기를 들먹여 봤자 아무 소용 없겠지만, 예전에는 빈 병을 가지고 가게에 가면 참기름이든 식초이든 무게를 달아 팔았다. 가게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참기름을 작은 구리 국자로 떠서 손을 높이 들고 병에다 가늘게 가늘게, 마치 끈처럼 떨어트리는 모습을 마술 구경하듯 감탄하며 보곤 했다. (29쪽)


만약 알루미늄포일로 끝냈더라면 그해 섣달그믐의 눈 내린 산길도 못 봤을 테고. (49쪽)



  날마다 두 아이를 실컷 놀리면서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하루를 누리면서 사노 요코 님이 선보인 산문책 《사는 게 뭐라고》(마음산책,2015)를 읽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썼다고 하는 글을 읽는데, ‘죽음을 앞두고 썼다’는 생각은 그리 들지 않습니다. ‘사는 동안’ 삶을 차분히 돌아보면서 쓴 글이라는 생각만 듭니다.


  2010년에 한국말로 나온 《나의 엄마 시즈코상》(이레)이라는 산문책을 떠올립니다. 예전에 사노 요코 님 다른 산문책을 읽을 적에는 ‘사노 요코라는 그림책 할머니가 2010년에 죽은’ 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2010년에 나온 산문책은 ‘치매에 걸려서 옛일을 까맣게 잊은 어머니를 요양원에 맡기고는, 요양원에 늙은 어머니를 만나러 다니면서 어머니 옛모습을 되새기는 이야기’가 흐르거든요. 그무렵에 쓴 글에서는 ‘삶이 징글징글하다’는 느낌이 짙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는 게 뭐라고》라는 책을 보면, 사노 요코 님이 ‘암 진단을 받고, 몇 해쯤 더 살 수 있는가’ 같은 말을 들으면서 속이 아주 후련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암이라는 병과 ‘죽음을 앞둔 날’을 알기 앞서까지는 ‘참말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고 해요.




또다시 옛날 엄마들은 대단하다고 입을 모았다.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궁리해서 만들었던 것이다. (52쪽)


“무슨 일이야?” “있잖아, 나 착한 할머니가 되어야 할지 못된 할머니가 되어야 할지 모르겠어.” “새삼스럽게 왜 그래?” “나 점점 못된 할머니가 되는 것 같아.” “그럼 전엔 착한 할머니였단 거야?” “…… 더더욱 못된 할머니가 되어 간다고. 속도위반으로 달리는 폭주족처럼 말이야.” “뭘 좋은 사람인 척하는 거야. 난 말이야, 어릴 적부터 노코처럼 제멋대로인 애는 없단 소릴 부모님한테도 선생님한테도 들었다고.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90쪽)



  할머니는 굳이 ‘착한 할머니’여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나쁜 할머니’여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할머니입니다. 한류 연속극을 좋아하든 말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재규어를 짐차처럼 몰든 말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아들하고 오랫동안 말 한 마디 섞지 못하다가, 늘그막에 서로 소리를 높여 싸우면서 함께 살아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생각하면, 얼린 밥을 녹여서 먹여도 밥잔치입니다. 스스로 즐겁게 생각하지 못하면, 으리으리한 식당에서 멋진 요리사가 차려 주는 밥을 먹어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마음결을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따라서 삶이 달라집니다. 마음씨를 어떻게 건사하느냐에 따라서 사랑이 바뀝니다. 마음밭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서 생각이 거듭납니다.


  신나게 노는 아이들은 마음속에 늘 놀이가 있어요. 그래서 새로운 놀이를 언제나 찾아냅니다. 기쁘게 일하는 어른이라면 마음속에 늘 기쁨이 있어요. 그래서 어떤 일을 하든 늘 기쁩니다.


  착한 할머니라 하더라도 ‘사는 보람’이 없다면 하루가 재미없습니다. 짓궂은 할머니라 하더라도 ‘사는 보람’이 있으면 하루가 재미있습니다. 남한테만 잘 보이도록 착할 수 없고, 남한테만 드러나도록 짓궂을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 나라(한국)는 미국을 그처럼 좋아하는 것일까. 고바야시 총리도 미국에는 꼬리를 치지만 왠지 일본이 미국을 좋아하는 것과는 느낌이 약간 다르다 … (한국 연속극은) 스토리도 대부분 억지로 짜맞춰서 개연성이 없다. 보고 있으면 헛웃음이 나온다. 그런데도 행복하다. 엄청나게 행복하다. 잘난 사람들은 모두 이 현상을 분석하려 들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좋아하는 데 이유 따위 없다. (121, 126쪽)


선전에 휘둘린 것도 아니고 잘난 평론가들의 꼬임에 넘어간 것도 아니다. 아줌마들은 스스로 한국 드라마를 발견했고, 땅속 마그마처럼 쓰나미처럼 우르르 몰려들어 한류를 띄웠다 … 외교관도 훌륭한 학자도 예술가도 못한 일을 아줌마들이 해냈다 … 아줌마들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둑에 구멍을 뚫었고, 상대의 땅에 우르르 몰려갔다. (134, 140쪽)



  삶은 바로 오늘 여기에서 빛납니다. 웃는 사람이 빛나는 삶입니다. 삶은 언제나 내가 스스로 빛냅니다. 네가 빛내 주지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 빛나려고 할 적에 환하게 빛살이 터집니다. 놀이동무가 있어야 재미나게 노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놀이동무가 있든 없든 스스로 재미나게 놀려고 해야 하루가 재미납니다. 놀이동무도 있고 놀잇감도 많다 하더라도, 스스로 축 처지는 마음이라면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나한테 정규직 일자리가 있더라도 스스로 재미난 마음이 못 된다면, 내가 하는 일은 재미없습니다. 나한테 연봉 높은 일자리가 있더라도 스스로 기쁜 마음이 못 된다면, 내가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삶이 기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책을 갖추었기에 더 똑똑하지 않습니다. 더 넓은 집을 누리기에 더 넉넉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이웃을 사귀기에 더 즐겁지 않습니다. 더 많은 나라를 돌아다녀 보았기에 생각이 깊지 않습니다.




양반제라는 구제 불능 제도를 접한 나는 조선인도 아니면서 조선이라는 나라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144쪽)


흑심을 품은 게 아니다. 닷키나 나가세 도모야 같은 아이돌을 구경하듯 즐거웠을 뿐이다. 그래도 즐거운 마음은 건강에 좋다. (200쪽)


참모는 재미있겠지. 세계지도를 펼치고 작전을 세우는 건 가상 세계의 놀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피를 보지도 않는 최고의 게임이다. 가상 작전은 전쟁터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전쟁터에 있는 사람은 신분이 가장 낮은, 실제 몸뚱이를 가진 살아 있는 병사들이다. (209쪽)



  산문책 《사는 게 뭐라고》를 읽는 내내 사노 요코 님이 빚은 그림책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라는 그림책이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나 하는 실마리를 가만히 풀어 봅니다. 따사로운 사랑을 받을 적에 비로소 이 땅에 태어나는 이야기가 흐르는 《세상에 태어난 아이》입니다. 《백만 번 산 고양이》라는 그림책에 담으려던 숨결이나 넋은 참으로 무엇이었을까 하는 수수께끼를 조용히 풀어 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안 죽고 산다 하더라도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재미도 보람도 기쁨도 웃음도 이야기도 없다는 대목을 넌지시 들려주는 《백만 번 산 고양이》입니다.


  사노 요코라는 분한테 삶은 어릴 적부터 ‘큰 짐덩어리’였으나 ‘너른 사랑’이기를 바랐습니다. 사노 요코라는 분보다 이녁 오빠가 그림을 훨씬 잘 그렸다고 하는데, 오빠는 아주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고 해요. 삶을 ‘기쁨’으로 누리지 못한 나날을 할머니가 될 때까지 보내야 하던 이녁한테는, 죽음을 코앞에 두고 한 발씩 나아간다는 나날은 외려 ‘기쁨’을 찾은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웃지’ 못하고, 마음껏 웃을 수 없었으며, 신나게 웃는 하루를 누릴 생각조차 없이 몰아치던 나날뿐이던 그림책 할머니는 바야흐로 이제부터, 그러니까 죽음을 몇 해 앞둔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웃는 삶’을 온 기쁨으로 누리겠노라 하는 다짐을 단단히 할 수 있구나 싶습니다.



나는 누워서 프로(프로 기사)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왠지 마술처럼 느껴졌다. 필요한 패를 차례차례 끌어모은다. 하지만 프로들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음침하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마작은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해야 제맛 아닌가? (217쪽)


아주머니는 아흔이 넘어서도 귀엽고 섹시했다. 아주머니는 산과 들의 꽃 이름을 무척 많이 알려주었다. 나는 꽃 이름을 하나씩 외우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232쪽)



  솜씨가 좋은 ‘프로’나 ‘전문가’라 하더라도 웃으면서 일하지 못한다면 따분합니다. 솜씨가 어수룩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웃으면서 일한다면 아름답습니다. 얼굴이 예쁘장하거나 몸매가 빼어나야 멋진 사람이 아닙니다. 맑게 짓는 웃음에 환한 이야기꽃이 어리다면 누구나 아름답습니다.


  삶이란 무엇일까요? 삶이란 노래입니다. 이름값이나 권력이나 훈장이나 돈 따위가 아닙니다. 삶이란 무엇인가요? 삶이란 춤입니다. 역사에 남아야 하지 않고, 예술을 해야 하지 않습니다.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잔뜩 거머쥐어야 하지 않습니다. 삶이란 참말로 무엇이 되려나요? 삶이란 이야기입니다. 소근소근 나누는 이야기가 있을 때에 삶이고, 하하호호 웃는 이야기가 있을 때에 삶이며, 어깨동무하면서 주고받는 이야기가 있을 때에 삶입니다.


  사노 요코 님 산문책 《사는 게 뭐라고》는 ‘이야기책’입니다. 이제 끝자락 삶을 붙잡으면서 마음껏 꿈을 펼치고 싶은 할머니가 노래하고 춤추면서 우리한테 나누어 주는 이야기꽃입니다. 삶이 뭘까요? 살면서 언제 기쁠까요? 깊은 한여름 밤에 풀벌레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셔요. 무더운 한여름 밤에 싱그러운 바람 한 줄기를 불러 보셔요. 깜깜한 한여름 밤에 별자리를 그리면서 두 팔을 벌려 보셔요. 4348.8.8.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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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우연성
니콜라스 지생 지음, 이해웅 외 옮김, 김재완 감수 / 승산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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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20



꿈꾸는 사람이 꿈을 이루는 ‘양자우연성’

― 양자우연성

 니콜라스 지생 글

 이해웅·이순칠 옮김

 승산 펴냄, 2015.7.6.



  아침마다 꿈을 꾸면서 일어납니다. 오늘 하루 누릴 삶을 마음속으로 가만히 그립니다. 어떤 일을 할는지 생각하고, 어떤 하루를 보내면서 기쁘게 웃고 노래할 만한가 하고 헤아립니다.


  밤마다 꿈을 꾸면서 잠듭니다. 오늘 하루 누린 삶을 마음속으로 차근차근 그리면서 이튿날 새롭게 맞아들일 이야기를 그립니다. 즐겁게 누린 삶을 되새기고, 아쉽게 보낸 삶을 돌아봅니다.


  틈틈이 종이에 그림을 그립니다. 내가 스스로 이루려는 꿈을 그립니다. 앞으로 이루려는 꿈을 담은 그림을 늘 새롭게 바라보면서 마음속에 아로새깁니다. 몸과 마음이 오롯이 꿈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내 그림’을 기쁘게 노래하고 웃으면서 바라봅니다.



고전물리학은 서로 끌어당기는 양전하와 음전하로 구성된 물질이 왜 붕괴하지 않는지를 설명하지 못했었다. 양자역학은 물질의 전기적, 광학적 특성의 정밀하고 정량적인 기술을 가능하게 했고, 초전도나 소립자들의 특이한 특성과 같은 놀라운 현상들을 기술하는 데 필요한 개념적 틀을 마련해 준다. (16쪽)


잠시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양자 비국소성의 이야기가 사실은 단순하고 매우 인간적임을 알게 될 것이다 … 우리는 특별한 시대에 살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들은 ‘상호작용’을 할 수 없다는 우리의 확고했던 직관이 옳지 않다는 사실이 물리학에서 발견되었다. (26, 27쪽)



  니콜라스 지생 님이 쓴 《양자우연성》(승산,2015)을 읽습니다. 이 책은 ‘양자’가 얽히는 물리학 가운데 ‘양자우연성’이 무엇인가를 놓고 벌이는 ‘벨 상자 게임’을 이야기합니다. 양자물리학은 양자이론이나 양자역학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지고, 이 책에서 밝히듯이 양자우연성으로도 알려집니다. 어떤 이름으로 알려지든, 가장 깊이 들여다볼 대목은 ‘양자’입니다. 오늘날 물리학뿐 아니라 과학은 ‘양자’를 한복판에 두지 않고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다고 할 만하며, ‘양자’를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양자’ 이야기가 비로소 불거진 뒤 다른 모든 이론을 버티던 바탕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이 낱낱이 드러났을 뿐 아니라, ‘양자’를 다루는 이야기는 ‘끝이 없는 끝’으로 온갖 이야기를 모조리 들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들이 메커너즘을 찾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야. 왜냐하면 메커니즘이 없기 때문이지 … 순수한 창조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질 때까지 존재하지 않아.” (40쪽)



  《양자우연성》은 아주 쉬운 길잡이책입니다. 양자물리학이나 양자과학이나 양자역학이 낯선 사람한테는 아무튼 어려울는지 모르고, 양자물리학이든 양자과학이든 양자역학이든 새롭게 배우는 사람한테까지 이래저래 어려울 수 있으나, 이 책은 아주 쉽게 풀어서 쓴 길잡이책입니다.


  요즈막에 선보인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는 바로 양자역학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예전에 나온 〈컨택트〉라는 영화라든지 〈사랑의 블랙홀〉 같은 영화도 바로 양자역학을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만합니다.


  ‘양자’ 이론은 언제나 ‘관찰자(보는 눈·보는 이)’가 모든 것을 이루거나 짓습니다. ‘관찰자(보는 눈)’가 없으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관찰자가 실험을 하면서 ‘이러한 결과’를 바란다면, 이러한 결과대로 이룹니다. 관찰자가 똑같은 실험을 다시 하면서 ‘저러한 결과’도 나올 수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면, 저러한 결과대로 이룹니다.



어떤 결과는 단지 우리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만 결정되지만, 어떤 결과는 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선택에도 영향을 받는다. (46쪽)


모든 과학 수업은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야기 없이 어떻게 에너지, 분자, 지질층, 상관관계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소개할 수가 있겠는가? (50쪽)



  흔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합니다. 한겨레 옛말입니다. 그러면, 왜 콩 심은 데에 콩이 날까요? 콩을 심으면서 콩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팥 심은 데에 팥이 나는 까닭도 팥을 심은 줄 지켜보면(관찰)서 알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콩을 심었으나 팥으로 여기면서 ‘팥을 키우듯이’ 돌보면, 콩씨가 팥씨로 바뀔 수 있습니다. 콩을 심고 팥으로 여겼으나 ‘아무래도 팥이 아닌 듯한데’ 하고 생각하면, 콩씨 그대로 나오지요. 콩을 심고 팥인 줄 알면서 팥으로 거두려 하면, ‘콩도 팥도 아닌 새로운 열매’를 얻기도 합니다.


  먼 옛날 한겨레 어느 스님이 이웃나라로 먼 길을 나섰다가 해골 바가지에 담긴 물을 아주 시원하게 마셨다지요. 이 스님은 해골 바가지에 담긴 물을 아주 달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바로 ‘실험을 하는 관찰자 뜻’입니다. 그러니, 이 스님은 아주 시원하고 좋은 물로 알고 밤새 달콤하게 잤어요. 이러다가 이튿날 아침 해골 바가지인 줄 알고 우웩거리지요. 이때에 이 스님은 깨닫습니다.


  해골 바가지에 담긴 물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달고 시원한 물’로 여기면, 그저 달고 시원한 물로 내 몸에 스며들어서 내 몸을 살립니다. 한낮에 멀쩡한 바가지에 담긴 물을 바라보면서 ‘맛없어’ 같은 생각을 하면, 그냥 멀쩡한 물이지만 내 몸에 나쁘게 스며들어서 내 몸을 망가뜨려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누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인가? 예측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존재하지만 그 일들이 이해하기 너무 복잡한 과정들의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에, 또는 그러한 결과가 나오도록 영향을 준 모든 세부사항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예측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정한’ 우연성에 의해서 발생되는 진실로 우연적인 결과는 본질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하므로 예측할 수 없다 … 진정으로 우연한 결과는 이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필요하지도 않았으며, 순수한 창조 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예측 불가하다. (59쪽)



  ‘양자’ 이야기는 ‘물 결정’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는 물 결정을 얼려서 사진으로 찍는 과학자가 있습니다. 마사루 에모토 님이라고 하는데 한국에도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이 여러 권 나왔습니다. 이 일본 과학자는 물한테 좋은 말하고 궂은 말을 따로따로 들려준 뒤 하룻밤을 그대로 두고는 이튿날 결정을 얻어서 사진으로 찍어요. 어떻게 될까요?


  좋은 말을 들은 물은 대단히 아름다운 결정이 됩니다. 궂은 말을 들은 물은 결정이 나오지 않거나 일그러집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들은 물은 아름다운 결정이 되고, 시끄러운 소리를 들은 물은 시끄럽거나 일그러진 결정이 됩니다.


  이러한 ‘물 결정’ 모습이란, 양자우연성이나 양자역학이라고 할 ‘양자’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짚거나 밝히는 여러 보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마시는 물 한 방울을 고마이 여기면서 기쁘게 웃으면서 꿀꺽꿀꺽 받아들이면, 이 물은 달디단 샘물이 될 뿐 아니라, 포도술도 되고 맥주도 됩니다. 그러나, 깊은 두멧자락 정갈한 샘물에서 길은 물이라 하더라도 찡그리거나 골을 내면서 마시면, 이 물은 지저분한 공장 폐수하고 똑같은 물로 바뀝니다.



이 부등식을 보면 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좋은 음악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듯이 이 부등식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63쪽)


더구나 앨리스와 밥은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 필요도 없다. 그들은 각자 상자를 가지고 아무도 모르는 송수신처로 갈 수 있다. (72쪽)


벨 게임과의 차이점은 벨 게임에서는 이기기 위해서 통신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결과가 무작위적으로, 그러나 계획된 방식에 따라 나오기만 하면 된다. 앨리스와 밥의 상자들은 상대방이 뭘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지만, 앨리스와 밥은 이 ‘아는 것’을 이용해서 정보를 전달할 수는 없다. (83쪽)



  ‘양자우연성’이라고 하는 ‘우연’이란, 미리 못박지 않은 대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미리 못박은 대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지구별 자연은 사람(관찰자)이 바라는 대로 모두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 ‘누가나 똑같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관찰자)는 마음속으로 꿈을 지어서 생각으로 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관찰자)가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마음에 깃들어, 이처럼 깃든 생각이 씨앗이 되어 삶(현실)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양자우연성》에서 다루는 ‘벨 상자 실험’은 ‘생각을 지어서 마음에 담아 삶을 짓는 흐름’을 과학 실험과 수식으로 보여줄 뿐입니다.



그 후의 많은 실험들이 아인슈타인의 직관에는 위배되며, 양자이론이 옳음을 증명하는 결과들을 보여주었다. 자연은 멀리 떨어진 두 상자가 하나의 물체인 것처럼 조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허용한다. (84쪽)


아인슈타인처럼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대신, 오히려 “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가”라고 묻자. 그에 대한 답은, 자연은 전달 없는 통신의 가능성 없이도 비국소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 진정한 무작위성은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93쪽)



  생각하여 꿈을 꾸는 사람은 생각을 엮어서 꿈을 이룹니다. 생각하지 않고 꿈을 안 꾸는 사람은 생각도 없고 꿈도 없으니, 스스로 이루는 삶이 없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을 꿈으로 가꾸면서 새로운 하루를 짓습니다. 생각이 없고 꿈이 없는 사람은 정치권력이나 사회권력이나 문화권력이나 종교권력 따위가 시키는 일만 하는 쳇바퀴 놀음에 얽매일 뿐입니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첫머리에서 재미난 대목이 나옵니다. ‘예전 교과서’는 모두 거짓된 지식과 정보를 다루기 때문에 ‘미래 세계에서는 새로운 교과서를 쓴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래 세계에서 쓰는 교과서도 ‘미래 세계를 이끄는 정치권력자 입맛에 맞게 조금 고친 교과서’일 뿐이에요.


  이런 대목을 우리는 얼마나 알아채거나 느낄까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르치는 교과서가 ‘진실·진리’로 여기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입시지옥에 내몰아 대입시험을 치르도록 하나요? 아니면, 교과서가 진실도 진리도 아니지만, 대학교 졸업장이 없이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니 억지스레 아이들을 학교에 내모는가요?


  하느님(신)은 주사위 놀이를 합니다. 하느님(신)은 주사위 놀이를 매우 즐깁니다. 아인슈타인이 한 말과 달리, 하느님(신)은 언제 어디에서나 기쁘게 주사위 놀이를 합니다. 왜 하느님(신)은 주사위 놀이를 기쁘게 즐길까요? 재미있기 때문이고, 삶을 새롭게 짓고 싶기 때문입니다.



양자물리의 기묘한 이론은 멀리 떨어진 두 물체가 하나의 실체로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흔하다고까지 얘기한다! 그것이 얽힘이다 … 양자이론은 각각의 결과들이 측정될 확률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결과가 선택되는지는 우연이며, 따라서 얽혀 있는 실체가 단일체로서 반응한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정보를 보낼 수는 없다. (109∼110쪽)



  사람(관찰자)들이 양자 이야기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깨달을 수 있다면, 거짓된 지식이나 정보에 휘둘릴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관찰자)들이 양자 이야기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깨닫는다면, 스스로 꿈을 짓는 길을 걸어가겠지요.


  어마어마한 돈을 바라든 커다란 집을 바라든 다 괜찮습니다. 우리가 꿈을 꾸는 대로 모두 이룹니다. 다만, 꿈을 꾸되 ‘못미덥다(의심)’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꿈을 꾸기는 했으나 ‘아마 안 이루어지겠지’ 하고 생각하면 안 이루어지지요.


  꿈을 꾸는 사람은 ‘이 꿈은 꼭 이룬다!’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 꿈을 꾸는 사람은 꿈만 꿀 노릇입니다. 꿈을 꾸고서 ‘안 이루어져’ 하고 생각하면 이 생각대로 안 이루어져요. 그러니까, 지구별 아주 많은 사람들은 꿈을 못 이룹니다. 내가 꾸는 꿈만 깊은 마음으로 헤아리고 언제나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고 싶기는 하지만 스스로 ‘꿈’을 터무니없다고 여기거나 ‘배부른 소리’로 여기고 말아, 처음부터 아예 아무 꿈을 꾸지 않기 일쑤입니다. 그저 월급이나 꼬박꼬박 받기를 바라는 ‘소박한 꿈’을 꾼다고 하지요. 그러니,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저 월급이나 꼬박꼬박 받는’ 꿈을 이룹니다.



양자상태의 형태로 보내지는 것은 물질의 궁극적 구조이다. 마지막 큐비트가 처음 큐비트의 상태를 지닐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완벽히 동일하다 … 송신자와 수신자조차도 이동되는 큐비트의 내용을 모른다. 그러므로 앨리스와 찰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찰스가 밥에게 전달하게 할 수 있다. (163쪽)



  사회가 달라지거나 거듭나는 까닭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회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사회가 바뀝니다. 그런데, 사회를 바꾸려는 꿈을 꾸는 사람은 언제나 얼마 안 됩니다. 사회를 바꾸려는 꿈이 터무니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늘 아주 많습니다. 대안언론이나 독립언론은 말도 안 된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고, 대안학교나 독립학교도 터무니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요.


  자,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꿈을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사람은 꿈을 이루는 길로 갑니다. 꿈을 이루려고 언제나 씩씩하고 즐겁게 부딪히지요. 꿈을 안 바라보고 꿈이 아예 없는 사람은 ‘이루려는 꿈이 없’으니 ‘무엇을 해야 하는가’조차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보스러운 사회가 무너지는 까닭은, 또 그악스러운 독재자를 몰아낼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사람들(관찰자)이 스스로 생각을 짓고 꿈을 빚어서 가슴에 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보스러운 사회를 무너뜨리고 독재자도 거꾸러뜨렸으나, 사회가 다시 바보스럽게 뒤집어지면서 독재자가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람들(관찰자)이 다시 생각도 꿈도 접거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통과하려는 두 학생이 서로의 답안을 베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반드시 공간적 간격으로 떨어뜨려 놓아야만 하는 것은 아님을 실험을 준비하는 과학자들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77쪽)


영향이 임의의 먼 지역을 순식간에 연결할 수 있다면 도대체 우리는 공간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할까? 이런 영향을 비국소적 상관관계의 설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런 영향이 공간을 퍼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간의 바깥으로 거리 0인 지름길을 따른다는 말하고 같다. (185쪽)



  양자우연성은 물리학이나 과학에서만 다루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 모든 곳에서 다룰 이야기입니다. 사회나 권력이나 교육이나 문화나 종교에서 양자 이야기를 다루려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관찰자)이 생각도 꿈도 없이 ‘맹신·맹종·복종’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생각 없는 사람은 바보처럼 휘둘립니다. 이른바 ‘종(노예)’이 됩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남이 시키는 일’만 합니다.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못 찾습니다. 꿈을 키우지 않는 사람은 정치권력이나 사회권력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톱니바퀴’가 되고 말아요.


  아이들이 꼭 대학교에 가야 하나요? 아이들을 꼭 대학교에 보내야 하나요? 대학교 없이 아름다운 사회를 일굴 꿈을 못 꾸나요? 수출이나 수입이 없이 한국 사회가 저마다 자급자족을 하면서 아름다운 숲집과 보금자리를 누리면서 맛있는 밥을 즐기는 삶을 꿈꿀 수 없나요? 도시에서도 누구나 ‘마당 있는 집’에 나무를 심고 아이들이 실컷 놀도록 하는 꿈을 꿀 수 없나요?


  꿈을 꾸지 않으니 꿈을 이루지 못하는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양자이론이고 양자과학입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니 생각을 아예 잊고 말아서,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채 삽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이 뇌를 많이 썼다고 하지만, 아인슈타인도 정작 뇌를 다 쓰거나 많이 쓰지는 못했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이 까닭은 한두 가지가 아닐 테지만, 아인슈타인은 양자과학을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안 받아들였습니다. 스스로 한계를 지은 셈이지요. 스스로 생각을 넓게 뻗지 않았지요. 스스로 한계를 지으면 뇌를 그만큼 못 쓰고, 스스로 생각을 더 넓게 뻗으려 하지 않으면 그만큼 뇌를 조금만 쓰기 마련입니다. 뇌를 쓰는 이야기는 영화 〈루시〉에서 잘 드러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절대 자연과학 이론을 테스트할 수 없을 것이다 … 나는 당신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증명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만, 나는 확실히 자유의지를 즐기고 있으며 당신은 절대 그 사실이 틀렸다고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 자유의지는 존재할 뿐 아니라 이것은 과학과 철학 그리고 우리가 의미 있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의 전제조건이다. 자유의지 없이는 이성적 사고란 없다. 따라서 과학과 철학에서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그냥 불가능하다. (190∼191쪽)


측정의 결과란 것 자체가 없다고 가정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우리가 N가지 가능한 결과가 있는 측정을 행한다는 환상을 가질 때마다, 우주가 모두 다른 결과를 갖고 있으며, 또한 똑같이 실재적인 N개의 가지로 갈라진다. 실험도 N개의 복사본으로 갈라지고 각자가 N개의 가능한 결과 중 하나를 ‘본다’. 이것이 다중세계 해석 혹은 다중우주 해석으로. (196쪽)



  서양에서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이를 돕는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돕는다’가 무슨 뜻인가 하면, ‘스스로 무엇이든 하려는 생각을 품는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무엇을 하려는지 생각을 품을 적에, 이러한 생각을 도와줄 이웃이 나타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면, 이웃은 나를 못 돕지요.


  자, 생각해 보셔요. “이봐, 뭘 도와줄까?” “응, 도와줘. 그런데 뭘 도와 달라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네?” “뭐라구? 도와 달라는 소리야, 아니야?” “나도 내가 무슨 도움을 받아야 할는지 모르겠다니까?” 이런 이야기가 오가면 어찌 될까요? 나는 내가 나를 돕지도 못하고, 내 이웃도 나를 못 돕습니다.


  도움을 바란다면 내가 바라는 도움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하고, 이 생각을 꿈으로 지어서, 이 꿈과 생각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맨 먼저 나 스스로 이 꿈대로 나아가는 길을 찾습니다. 스스로 꿈길을 찾으면 이웃이 하나둘 나타나서 어느새 내 짐을 덜어 줍니다.



자연은 진짜로 우연적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219쪽)



  《양자우연성》은 아주 쉽고 가벼운 이론을 딱 한 가지(벨 상자 실험)만 보여주는 얇은 책입니다. 이 대목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양자 이야기를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너무 어렵기 때문에 하나도 못 알아듣습니다. 양자 이야기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라고 여기는 사람은 참말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구나 하고 느끼면서 배웁니다. 그리고, 양자 이야기를 ‘내 삶과 꿈을 짓는 이야기’로 여기는 사람은 저마다 스스로 삶과 꿈을 어떻게 지어서 스스로 기쁘며 아름답게 하루를 열까 하는 길을 여는 실마리를 얻습니다.


  우리(관찰자)는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도 할 수 있고 성공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실패이거나 성공일 뿐입니다. 실패나 성공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실패이든 성공이든 모두 ‘스스로 지은 꿈’으로 가는 길목에서 겪는 온갖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니, 꿈을 바라는 사람은 실패를 몇 차례 했대서 주눅 들 일이 없고, 가볍게 성공을 몇 가지 했대서 자랑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고요하면서 사랑스러운 숨결이 되어 ‘하늘을 가르는 작은 새처럼 홀가분하게 구름을 타’고서 꿈을 지으면 됩니다. 4348.8.5.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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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
한도숙 지음 / 민중의소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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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98



농사꾼은 없이 ‘맛집·쉐프’만 있는 한국

―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

 한도숙 글

 민중의소리 펴냄, 2015.7.3. 15000원



  우리 집 꽃밭에 맥문동이 보라빛 꽃송이를 터뜨린 지 열흘쯤 됩니다. 작은아이는 마당에서 놀 적마다 “보라 꽃이 피었네?” 하고 말하면서 고개를 가만히 숙여서 들여다봅니다. 한여름에 피어나는 맥문동 보라빛 꽃송이는 새삼스럽도록 시원합니다. 그런데 맥문동 꽃송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꽃송이 한복판에 노란 무늬처럼 꽃가루가 있어요. 먼발치에서는 안 보이지만 코앞에서 들여다보면 알아볼 수 있습니다. 벌이나 나비가 찾아들어서 이 노란 꽃가루를 살살 건드려서 암술이랑 수술이 만나도록 하면, 맥문동도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황금 들녘이 점점 좁아져 간다. 들판은 풍년인데 농심은 흉흉하다. 정부의 거짓말에 넌더리가 난단다. 언제나 관료 권력은 거짓으로 점철했다.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것이 농심이다. (36쪽)


구조적으로 근대농업은 자본의 수탈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된 것이다. 보라, 농사를 짓는 농민보다도 농사 주변의 것들이 농사를 통해 이익을 보고 있지 않는가. 종자, 농약, 비료, 자재 어느 하나도 농민들이 직접 만들어 쓰지 못하는 구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친환경농업도 다르지 않다. 친환경 농약, 자재, 비료들이 생산되고 농민은 그저 그것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되고 있다. (48쪽)



  농민운동을 오랫동안 하셨다는 한도숙 님이 쓴 글을 묶은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민중의소리,2015)를 읽습니다. 630쪽을 웃도는 두툼한 글꾸러미를 찬찬히 돌아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아무런 농사 정책이 없는 정부를 나무라고, 농사꾼을 옥죄거나 단물을 쪽쪽 빨기만 하는 농협을 꾸짖습니다.


  한국에도 틀림없이 ‘농업을 다루는 부서’가 있습니다. 농림부장관이라든지 수많은 공무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농사꾼을 헤아리는 정책은 없다시피 하다고 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농림부장관이 되는 분 가운데 농사꾼으로 살아온 사람은 없다고 할 만합니다. 농림부 공무원이 되는 분 가운데 농사꾼으로 살아온 사람도 없다고 할 만합니다. 공무원 시험을 치러서 공무원이 될 뿐이니, 책이나 법전은 뒤적일 줄 알아도 땅을 살피거나 헤아릴 줄 모릅니다. 여러 가지 지식은 갖추었을지라도, 시골에서 흙을 부치며 살아온 사람들 마음을 읽거나 살피는 길은 모릅니다.



우리가 미신이라고 배운 것은 민족혼의 말살에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대한민국도 미신으로 규정하고 가르쳤다. 그러나 가만히 따져 보니 엄청난 철학과 실천이 그것(굿)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 우선은 하늘에 대한 경배의식이다. 하늘의 이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거기에 따라 행동한다는 근신의 철학이다. (62쪽)


1980년 토종벌이 40만군이었던데 비해 작년에는 약 4만군으로 추정하고 있다. 30년 만에 10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 꽃가루 매개충의 대표적인 벌이 없으면 과일과 곡류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는 인간의 먹거리에 치명적이다. 벌이 없어지는 이유는 다 아는 대로 농약 때문이다. (84∼85쪽)



  시골 읍사무소나 면사무소에서 일하는 분들도 공무원 공부를 한 분들뿐입니다. 시골 군청에서 일하는 분들도 하나같이 공무원 공부를 한 분들뿐입니다. 흙 한 줌을 아끼거나 고깃배를 몰거나 나물을 캐면서 이 땅을 사랑하는 길을 걷다가 공무원이 된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다고 할 만합니다.


  흙을 모르던 이들이 공무원이 되고 정치 일꾼이 되었기에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풀 지붕’을 ‘슬레트 지붕’으로 바꾸었고, ‘흙 고샅’을 ‘시멘트 포장도로’로 바꾸었습니다. 요즈음은 ‘흙 도랑’을 ‘시멘트 도랑’으로 바꾸는 토목건설을 벌이고, 골짜기 바닥을 까뒤집어서 시멘트를 깔아 놓는가 하면, 깊디깊은 시골까지 샘물이 아닌 수돗물을 쓰도록 하는 토목건설을 벌입니다.


  샘물은 ‘안전하지 않다’고 하면서 ‘수도물을 마시라’고 하는데, 정작 시골마을을 흐르는 샘물이 어떤 성분인지 살펴서 밝히는 공무원은 없습니다. 게다가 샘물이 안전하지 않다면, 수많은 대기업이 이 나라 땅과 바다를 파헤치면서 뽑아올리는 ‘먹는샘물’은 어떻게 값을 붙여서 페트병에 담아 가게에서 파는지 아리송한 노릇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먹는 모든 밥과 반찬은 ‘샘물과 빗물’에 기대어서 얻습니다. 벼농사도 밭농사도 모두 ‘땅밑을 흐르는 물’을 길어올려서 댑니다.



조선일보가 사설을 통해 쌀 생산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 농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농업에 대해 이런 막말을 할 수 있으려면 충분한 논거가 있어야 한다 … 논조인즉 운동장에 남아도는 쌀이 썩어 가고 있는데 보조금 줘 가며 쌀을 생산하는 것은 세금 낭비란 것이다. 대안으로 콩이나 잡곡 채소들로 대체하면 된다고 했다 … 이는 임모다. 분명. 정부는 올해도 700억 원 정도의 식용쌀 수입 예산을 책정하고 있다. (182∼183쪽)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를 쓴 한도숙 님은 ‘어려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쌀조차 자급률이 100퍼센트가 아닐 뿐 아니라 80퍼센트 언저리로 떨어지는 판에, 정부는 해마다 거의 천 억원에 이르는 돈을 들여서 다른 나라에서 쌀을 사들인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쌀이 모자라서 쌀을 사들이지 않습니다. 한국에 있는 시골지기를 하루 빨리 짓밟아 죽이려는 생각으로 쌀을 거의 천 억원에 이르는 세금을 들여서 사들입니다. 이렇게 외국 쌀을 사들이면 한국 쌀은 값이 ‘똥값’이 되지요. 그러니까 한국 정부는 한국이라는 나라 스스로 ‘식량자급’도 ‘식량안보’도 하나도 안 헤아리는 꼴이니, 적어도 이런 바보짓을 멈출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를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책을 빌어서 털어놓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하더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 공부만 하느라 막상 시골일을 모르는 이들이 도시로 가서 공무원이 되고 장관이 되며 법관이 되고 시장이나 군수가 됩니다. 고향이 시골이라고 해서 시골일을 알지 않습니다. 고향만 시골일 뿐, 시험공부만 하느라 모내기도 모르고 풀베기도 모르며 ‘나물로 삼는 풀’이나 ‘약으로 얻는 풀뿌리’를 하나도 모르기 마련입니다. 이런 정치 일꾼이나 공무원한테서 제대로 된 농사 정책이 나오기를 바라기는 대단히 어려울 만합니다.


  그러니, 아예 생각이 없다면 아예 아무 정책이 없는 쪽이 훨씬 나을 수 있어요. 농협을 거쳐서 시골 농사꾼이 도시 소비자한테 쌀이나 푸성귀를 팔도록 하지 말고, 시골 농사꾼이 곧바로 도시 소비자한테 쌀이나 푸성귀를 팔면 됩니다. 농협은 농사꾼하고 소비자 사이에 서면서 ‘귓돈’만 신나게 떼며 배가 부르거든요. 농협이 가로챌 귓돈을 농사꾼이 받고, 도시 소비자는 ‘농협이 붙인 귓돈 바가지’를 쓰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쉬운 것은 먹을거리가 어디서 나고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관심은 도통 없다는 것이다. 제 생명을 이어 주는 먹을거리가 음식점에 있고 돈을 주면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씨앗에서부터 물, 바람, 농부의 땀, 지렁이와 베짱이의 노랫소리가 음식재료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사라진 채 오늘 점심은 어쨌느니 저쨌느니 강평으로 재잘댄다. (246∼247쪽)


양복을 입은 관료들이 생각하는 것은 서양의 경쟁체제가 세상 모든 이치의 중심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농민들이 국민으로 보이지 않고 오로지 경제 대상으로만 보여, 어떻게 하면 경쟁에서 뒤떨어지는 농사를 퇴출시킬 것인가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03쪽)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면, 농사꾼은 없이 ‘맛집·쉐프’만 있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았으니 볼 일이 없습니다만, 이웃집이나 친척집에 찾아가면 으레 텔레비전을 볼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에 흐르는 온갖 이야기 가운데 맛집 이야기나 요리사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어디에 가면 어떤 맛집이 있다는 이야기가 방송하고 인터넷에 넘칩니다. 어떤 솜씨를 부려서 어떻게 요리를 하면 훌륭하다는 요리사나 쉐프 이야기가 방송과 인터넷에 차고 흐릅니다.


  맛집이나 쉐프는 으레 ‘깨끗한 식재료’를 말합니다. 유기농이라든지 친환경이라든지 자연식 같은 말도 요즈음 곳곳에서 흘러넘칩니다. 그런데, 정작 손수 땅을 일구어 ‘깨끗한 식재료’를 얻는 몸짓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손수 땅을 일구어 밥을 얻는 사람들 이야기는 방송에도 인터넷에도 없다시피 합니다.


  농사꾼이 없이 무슨 ‘식재료’가 있을까요? ‘깨끗한 식재료’이건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에 절디전 식재료’이건, 농사꾼이 있어야 있습니다. 농사꾼 없는 맛집과 쉐프 이야기는 ‘도시 소비자’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만할까요? 이러한 방송과 인터넷이 우리 삶을 제대로 밝힐 수 있을까요? 정규직하고 비정규직을 갈라서 푸대접하는 사회 얼거리뿐 아니라 ‘농사꾼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사회 얼거리’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이라도 대북지원을 시급해 재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북에 동포들이 쌀이 모자라 전전긍긍하는 터에, 쌀이 남아 개사료 돼지사료로 쓰겠다는 것은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밥을 굶는 서러움이 없도록 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421쪽)


농업 문제를 대하는 국민 다수의 의식도 마찬가지다. 자본시장에 농업을 맡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여념이 없다. 또한 일부 농민들도 기업농을 통한 농업적 성공을 확신하면서 정부 정책을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조건반사적 반응에 할 말을 잃고 만다. (615쪽)



  한국에서 쌀은 남아돌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쌀 자급률이 80퍼센트 언저리에서 맴돌다가 이제 끝없이 떨어질 텐데, 쌀을 뺀 곡식은 자급률이 아주 바닥을 칩니다. 시골지기는 돈이 안 된다고 여겨서 다른 농사는 안 짓는 흐름이고, 도시 소비자는 가게에 온갖 푸성귀가 골고루 있으니 그냥 골고루 사다 먹기만 합니다. 사람들이 맥주를 많이 마셔도 맥주에 쓰는 보리를 한국에서 거두지 못하고 외국에서 사들이기만 합니다. 빵에 쓰는 밀은 자급률이 1퍼센트도 안 됩니다. 이웃나라에서 한국에 밀을 하루라도 안 판다고 한다면 한국에 있는 모든 빵집이랑 피자집은 문을 닫아야 할 테지요.



거머리가 없어진 농사가 오래갈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진즉에 하지 못했다. 거머리가 없어 논에 들어갈 때 맘이 놓이는 것에만 정신을 팔았다. 그러는 동안에 자본이라는 거머리에 둘러싸이고 있었다. 아무도 그런 사실을 알려고 안 했고 알지도 못했다. (143쪽)



  맥문동꽃이 피는 요즈음은 까마중꽃도 함께 핍니다. 아니, 까마중꽃은 훨씬 일찍부터 피었습니다. 까마중은 아직 조그마한 풀포기일 적부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서 키를 부쩍 키웁니다. 새까만 까마중알을 바지런히 훑어서 먹으면 까마중풀은 일 미터가 넘게까지 자라서 마치 나무처럼 되다가 한겨울로 접어들어 된서리가 내려야 비로소 숨을 거두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아주 조그맣고 하얀 까마중꽃은 사람이 손으로 하나하나 꽃가루받이를 해 줄 수 없습니다. 온갖 풀벌레와 개미와 진딧물과 딱정벌레와 무당벌레와 나비와 벌과 파리가 오가면서 꽃가루받이를 해 줍니다. 감꽃도 모과꽃도 탱자꽃도 모두 온갖 ‘숲이웃’이 꽃가루받이를 해 주어요.


  이웃마을에 사는 여러 시골지기도 이웃입니다. 도시에 사는 수많은 사람도 이웃입니다. 그리고 들과 숲에서 조용조용 삶을 잇는 온갖 크고작은 목숨들도 이웃입니다. 저마다 사랑스러운 이웃입니다.


  감자꽃이 피고 지면서 감자알이 굵고, 고추꽃이 피고 지어야 고추알이 붉으며, 오이꽃이 피고 지어야 오이알이 소담스럽습니다. 농업 정책을 맡는 공무원이 되는 분들은 해마다 ‘농활’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농활보다는 ‘농업 정책 공무원’ 스스로 텃밭을 일구면서 ‘밥이란 참말 무엇인지’ 스스로 몸으로 느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러지 않고서야 시골 농사꾼이 등허리가 휘면서 농약에 찌들다가 쓸쓸히 숨을 거두어 마을이 하나둘 사라지는 흐름은 멈출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4348.8.5.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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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거짓말 - 2000년대 초기 문학 환경에 대한 집중 조명
정문순 지음 / 작가와비평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책읽기 삶읽기 196



‘참말’이 없는 문단권력은 ‘돈만 잘 번’다

― 한국문학의 거짓말

 정문순 글

 작가와비평 펴냄, 2011.12.30. 17000원



  아이들은 얼마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다만,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으면 잘못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매직으로 벽에다 그림을 그리든, 물잔이나 접시를 떨어뜨려서 깨뜨리든, 열매를 맺어야 할 꽃송이를 함부로 꺾는다든지, 작은아이가 누나를 때리거나 큰아이가 동생을 때린다든지, 돈을 떨어뜨려서 잃는다든지, 이런저런 몸짓은 ‘잘못’일 수 있으나 ‘아무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무엇을 알면서 어떤 일을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저희 나름대로 부아가 나서 일부로 돌을 뻥 차다가 유리가 깨지더라도 이를 ‘잘못’이라고 여기면서 탓할 수 없습니다. 아이를 더욱 따스하고 너그럽게 아끼면서 돌보지 못한 ‘어른(어버이) 탓’을 할 만한데, 어른(어버이) 탓도 굳이 할 까닭이 없습니다. 유리가 깨졌구나, 유리가 깨졌으면 갈면 되지 하고 여길 수 있습니다. 방바닥에 물을 가득 쏟았으면 물을 가득 쏟았구나, 물을 가득 쏟았으면 신나게 치우면 되지 하고 여길 만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아이들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배웁니다. 다만,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는 온갖 일’을 스스로 겪으면서 배웁니다.



신경숙은 1980년대의 민중가요, 정확하게는 민중문학이 사람을 ‘억압’했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이러한 1980년대 문학에 대한 전면적 부정에서 그녀의 소설은 둥지를 틀고 있다 … 〈딸기밭〉 말미의 각주에는 본문 중 ‘유’의 어머니가 ‘나’에게 보낸 편지의 출처가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소설이 처음 발표될 때는 이런 문구조차 없었다. 신경숙이 남의 글에서 멋있는 부분을 출처도 밝히지 않고 무단으로 따온 것이 문제가 생기자 책으로 낼 때야 밝힌 것이다. (13, 26쪽)



  소설을 쓰는 신경숙 님이 다른 사람 글을 훔쳤다(표절)는 이야기가 2015년에 크게 불거집니다. 이 이야기는 열 몇 해 앞서부터 불거졌다고 하지만, 그동안 한국 사회에 ‘터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학인이나 비평가 가운데 이를 따지는 사람이 드문드문 있었다고 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모르는 척 넘어간다든지 여러 출판사와 언론사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든지 아예 꾹 눌러서 감추려고 했답니다.


  2015년에 신경숙 님 표절문학을 말하는 분들은 ‘문단권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단권력 이야기도 요즈음 처음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꽤 예전부터 문학인과 비평인 사이에서 오르내린 이야기입니다. 요즈막에는 ‘문학인 아닌 일반 독자’까지 이를 느낄 만큼 말썽이 터졌을 뿐입니다.


  소설을 쓰는 신경숙 님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까요? 이녁이 한 일은 얼마나 ‘잘못’일까요? 다른 사람이 쓴 글이나 책을 ‘있는 힘껏 옮겨쓰기(필사)를 하면서 글솜씨(문장실력)를 키우려고 했던 몸짓’은 어느 만큼 ‘잘못’이라고 할 만할까요?


  어린이문학에서 이원수나 권정생을 사랑하는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어린이문학을 하는 어른이 된다면, 어릴 적부터 즐겨읽고 사랑한 ‘옛 작가’ 글투하고 사뭇 닮거나 비슷한 느낌이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느낌이 감돌면 ‘새로운 젊은 작가’를 두고 ‘아무개 작가 흐름을 이어받는다’고 말하지요. 어른문학에서도 이 같은 결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를테면, 신경숙 소설문학을 놓고 ‘미시마 유키오를 이어받은 작품’을 선보였다고도 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소설을 쓰는 신경숙 님은 ‘미시마 유키오를 이어받은 작품’을 쓴다는 말을 반길 만할까요? 아니면 이러한 문학길은 아니라고 할 만할까요? 이때에 신경숙 소설문학은 ‘누군가를 이어받은 문학길’이 아닌 ‘표절을 저지른 문학길’이라고 따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쓴 글이나 책에서 많이 배운 숨결이나 글멋을 제 나름대로 삭힌 새로운 글이 아니라 한다면, ‘베낀 글’이나 ‘훔친 글’일 테니까요.




신경숙이 어떤 연유로 군국주의를 한껏 미화한 소설의 인물들을 비판 없이 따왔는지 참으로 괴이쩍은데 … 신경숙이 견고한 작품 세계를 갖춘 작가라도 표절의 유혹을 피할 수 없었을까? 또 문단이 실력보다 무늬가 큰 작가를 자기네 취향과 상품성을 고려하여 띄워 준 점이 과연 표절을 낳은 요인과 무관하다고 볼 수 있을까 … 신경숙이 표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도 허약한 그녀의 내면이 밟아 갈 수순이었다. (30, 31, 32쪽)



  2015년 여름에 이응준 님이 ‘신경숙 표절 문제’를 인터넷신문 한 곳에 올렸습니다. 새삼스러운 이야깃거리는 아니지만, 그동안 아주 조용하게 파묻히다시피 하던 말썽거리가 비로소 널리 알려졌습니다.


  정문순 님이 쓴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거짓말》(작가와비평,2011)을 읽습니다. 이 책을 읽어 보면, ‘문학인 신경숙’ 님이 어떤 표절을 얼마나 했고, 표절하는 문학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실마리를 차근차근 풀어내는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응준 님이 2015년에 따지기 앞서, 정문순 님은 2011년에 비평집을 내놓았고, 이 비평집에 실은 글(신경숙 표절 비판)도 2000년에 선보였습니다.



은희경이나 공지영을 포함하여 상품성이 뛰어난 작가로 떠올랐던 이들의 작품에서도 통념에 대한 거부나 사회 변화에 대한 소망을 읽어내기는 매우 어렵다. 시장과 문단이 원하는 소설은 중산층의 안일한 욕망에 부합하는 작품이면 족했다. 그러나 문학이 잘 팔리는 데 대해 의구심을 갖는 시선은 드물었다. (47쪽)


불행히도 기존의 평론 중에는 천운영 서사의 특이한 소재에 압도되어, 작품을 비평하기보다 글쓴이 자신이 작품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급급하거나, 서사의 이면에 도사린 세계를 읽어내지 못하는 글들이 적지 않다고 본다. (99쪽)



  문학비평 《한국문학의 거짓말》을 들여다보면 ‘신경숙 표절 비판’만 있지 않습니다. ‘조경란 표절 비판’도 이 책에 함께 나옵니다. 소설을 쓰는 신경숙 님은 ‘이웃나라 일본’에서 문학을 하던 다른 사람 글을 훔쳤고, 소설을 쓰는 조경란 님은 ‘같은 나라 한국’에서 문학을 하던 다른 사람(신인 작가, 또는 미등단 작가) 글을 훔쳤다고 합니다.


  평론가 정문순 님은 “한국문학의 거짓말”이라는 이름을 이녁 평론집에 붙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느낍니다. 거짓말을 일삼아도 거짓말이 알려지지 않을 뿐 아니라, ‘책만 신나게 잘 팔아’서, 한국에서 온갖 문학상을 타고 ‘문학상 심사위원’까지 맡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니, 게다가 이런 모습을 비평하는 글을 꾸준히 써도 하나도 안 바로잡히는 한국문학을 쳐다보아야 하니, 얼마나 아프고 괴롭고 답답할까 싶습니다. 아니, 한국문학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허술하거나 바보스러운 모습이라고 할 만하니, ‘노벨문학상을 노릴 만한 때가 되었다’ 같은 말은 그야말로 우스꽝스럽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표절 논란 작품’이든 ‘표절 확정 작품’이든 ‘표절 비판’을 받을 적에 출판사와 문단권력은 무엇을 했을까요? 《한국문학의 거짓말》이라는 평론집에도 잘 나옵니다만, ‘인기작가 책을 펴낸 출판사’하고 ‘한국에서 이름난 어르신 작가 자리에 선 문단권력’은 아무 일도 안 하고, 입을 다물기만 했습니다.



공지영이 정말 말하고 싶은 건 역사상의 한 시대가 아니다. 그가 그 시대에 집착하고 매달릴수록 젊은 날 한때 떵떵거리며 편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대의를 위해 기꺼이 청춘을 바친 자기 세대를 특권화하고 싶은 욕망과 함께 남들이 자신들을 몰라줄 것에 대한 두려움과 초조감을 숨기지는 못한다. (130∼131쪽)



  한국문학은 왜 거짓말을 일삼는 권력이 되었을까요? 한국문학은 왜 참말을 널리 나누는 문화하고 멀어질까요? 한국문학은 왜 거짓말에서 벗어나지 못할까요? 한국문학은 왜 참다운 넋을 북돋우는 아름다운 길로 접어들지 못할까요?


  돈 때문일까요? 이름값 때문일까요? 권력 때문일까요? 아마 이 세 가지 모두 때문이라고 할 테지요.



이문열 자신이 아무리 수구 보수세력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들, 그가 정치를 챙기느라 소외시켜 버린 소설은 되레 그의 정치평론이 가리는 본색을 들추어낼 수밖에 없다. (268쪽)



  글을 쓰는 사람은 돈을 벌려고 글을 쓰지 않습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문학상을 타려고 문학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갈래를 보아도 이와 같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사진작가)은 돈을 벌려고 사진을 찍을까요? 사진작가는 사진상을 타려고 사진작품을 선보이거나 전시회를 열까요?


  한국 사진계를 돌아보면, 널리 이름난 사진상조차 ‘사진계 중견끼리 나누어 받기’를 벌인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한국 사진계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그동안 제대로 비평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문학에는 문단권력이 있다면, 사진계에는 ‘사단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진계에서 ‘중견끼리 나눠 받는 사진상 논란’은 사진잡지 《포토닷》에서 2015년 7월호에서 공식으로 처음 다루었고(‘최민식 사진상’ 논란), 2015년 7월 24∼26일에 벌어진 ‘동강사진축제’ 워크샵에서 여러 사진비평가가 낱낱이 다루었습니다.


  사진과 문학을 견주어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여 본다면, 사진에서도 ‘표절 논란’이 무척 잦습니다. 외국 작가가 선보인 작품을 한국 작가가 슬그머니 흉내내어 찍은 뒤 사진공모전 같은 곳에서 상을 받는 일이 흔합니다. 이러다가 수상 취소가 되기도 하지요.


  글이나 사진을 ‘창작하는 사람’은 어떻게 똑같거나 비슷한 작품을 선보일까요? ‘창작하는 사람’은 왜 ‘창작’이 아닌 ‘흉내내기’나 ‘베끼기’를 해야 할까요? 아름답거나 멋진 글을 옮겨쓰기(필사)를 해 보아야 글솜씨가 늘어날까요? 아름답거나 멋진 사진을 똑같이 흉내내어 찍어 보아야 사진솜씨가 늘어날까요? 옮겨쓰기나 흉내내기를 하는 동안 ‘작가 스스로 깨닫지 않는 사이에 훔치기’가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나중에는 ‘여느 독자가 이 대목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품으면서 ‘슬그머니 훔치기’를 하지는 않을까요?




두 작품 〈혀〉(주이란)와 《혀》(조경란,문학동네,2007)는 여러모로 유사하다. 조경란은 둘이 별개라고 강하게 반발하지만, 이는 어느 누가 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닮았다는 것이 표절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아니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베끼지 않는 한 대개의 표절작은 베낀 것과 닮으면서도 닮지 않았다. (274쪽)


조경란의 책 뒷표지에는 “사랑하고, 거짓말하고, 맛보는 혀”라는 문구가 박혀 있다. 이것은 주이란의 소설을 정확히 세 마디로 축약한 문구일 뿐, 조경란의 소설과는 틈새 없이 맞물리지 않는다. (279쪽)



  한국문단에 권력이 없다면, 표절 같은 일은 생기지 않으리라 느낍니다. 문학을 아끼는 독자가 ‘우상 섬기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인기작가 자리에 들어선 이들이 섣불리 표절 같은 글쓰기를 안 하리라 느낍니다.


  문단권력은 독자를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 문단권력은 권력을 더 키워서 장사(상품 팔기, 다시 말하자면 ‘책 팔기’)를 신나게 할 생각일 뿐입니다. 독자를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인기작가는 표절을 조용히 저지르고, 문단권력은 이를 눙치거나 못 본 척합니다.


  인기작가이든 기성작가이든 원로작가이든, 참말 ‘작가’라 한다면, ‘창작하는 사람’이라 한다면, ‘글을 쓰는 사람’이라 한다면, 이들은 누구보다 ‘나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보아야 하고, ‘내 글을 읽어 주는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느 시인이 외친 말마따나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몸짓이 없도록 글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를 속이는 짓을 일삼지 말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 글투를 흉내내는 버릇’이 들지 않도록 ‘필사 아닌 창작’을 하는 몸짓이어야 합니다.


  내 글을 읽어 주는 수많은 사람이 바로 ‘이웃’이요 ‘동무’인 줄 가슴 깊이 깨달아야지요. 이웃한테 읽힐 글을 ‘훔친 글(표절)’로 건넬 생각은 아니겠지요? 더 생각해 본다면, 내가 쓴 모든 글을 ‘아이한테 물려주겠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설마 아이한테 ‘훔친 글’을 물려줄 마음은 아니겠지요?



만약 섬에 사는 사람이 서울을 경이롭고 낯선 세계로 다룬다면 응당 촌스럽다는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도시 사람이 지방을 다루는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자기가 보고 듣는 것만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촌스러움은 역사와 현실을 피상적으로 다루는 태도와 연결되기도 한다. (312쪽)



  평론집 《한국문학의 거짓말》은 한국문단이 거짓말을 일삼으면서 저지른 슬픈 모습을 찬찬히 따지고 나무랍니다. 여기에 숱한 기성작가와 인기작가가 시장 논리에 얽매여 ‘아름다운 문학’이 아닌 ‘팔리는 문학’에 기울어진 대목을 낱낱이 짚고 꾸짖습니다.


  ‘잘 팔리는 문학’이 나쁘다거나 잘못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다만, 잘 팔리는 문학은 잘 팔리는 문학일 뿐, ‘아름다운 문학’이 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잘 팔리면서 아름다운 문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아름다운 문학일 때에 나중에 잘 팔리는 문학이 되어도 아름다운 숨결을 잇습니다. 처음부터 잘 팔리기만 하는 문학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겉치레와 껍데기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문학을 하는 이들은 ‘멋진 글’이나 ‘빼어난 작품’을 선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문학을 하는 이들 스스로 ‘아름다운 삶’으로 ‘사랑을 담아 쓰는 글’이 되면, 독자는 이내 이러한 글을 알아봅니다. 독자가 재빠르게 알아볼 수도 있고, 독자가 알아보기까지 여러 해가 걸리거나, 때로는 백 해가 걸릴 수도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문학을 하는 사람, 창작을 하는 사람)은 ‘잘 팔릴 만한 상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오직 ‘글(창작)’을 쓰는 사람입니다. 온 넋을 기울여 아름다운 꿈을 사랑스레 빚어서 글로 선보이는 사람이 바로 ‘작가’입니다.


  작가는 연예인도 아니고 배우도 아니며 대통령이나 기자도 아닙니다. 작가는 언제나 작가입니다. “짓는 사람”은 이웃한테서 배우고, 나무와 꽃한테서 배웁니다. “짓는 사람”은 아이한테서도 배우고, 하늘과 우주한테서도 배웁니다. “짓는 사람”은 너른 마음으로 기쁘게 배운 뒤에 ‘새로운 이야기를 짓’습니다. “짓는 사람”은 “훔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짓는 사람”은 삶과 꿈과 사랑을 지으면서 이야기를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칼의 노래》와 《검은 꽃》이 독자의 인식적 지평을 넓혀 주거나 무언가 깨달음을 줄 만한 대단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를 푸념하는 통속적인 수준의 소설로도 평단의 주목과 독자의 환호를 받는 것이 오늘날 한국문학의 현실이다. (336쪽)



  ‘표절 논란’이 불거진 뒤에도 문단권력은 바뀌지 않습니다. 문단권력이나 상업 출판사가 바뀐 모습은 아직까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주 단단하고 무시무시한 쇠밥그릇입니다. 표절 논란이 조용히 잊혀지는 이즈음에도 ‘표절 작가 책’은 잘 팔립니다. 아무래도 문단권력과 상업 출판사는 이 대목을 노리겠지요. 지난 2000년부터 ‘표절 비판’이 있어도 이를 모르쇠로 넘어온 까닭은, 2015년에 아주 크게 표절 비판이 일어도 꿈쩍하지 않는 까닭은, 이러거나 저러거나 ‘인기작가 상품’은 잘 팔려서 돈이 됩니다.


  “훔친 글”로 돈을 잘 벌고 이름값하고 권력도 그대로 이어가는 모습을 이 나라 아이들과 젊은 작가들이 고스란히 지켜봅니다. 문단권력 어르신하고 인기작가 어른들은 아이들과 젊은 작가들한테 무엇을 보여주거나 가르치는 셈일까요? 참말이 없는 문단권력은 돈만 잘 법니다. 4348.7.30.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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