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게 묻는다
사소우 아키라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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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765



장님 사내가 ‘눈 뜬 아가씨’를 만나서

― 꽃에게 묻는다

 사소 아키라/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18.2.23.



“여기엔 아무것도 없어. 월급도 못 준다.” “괜찮아요. 내가 만지는 곳, 그 전부가 바로 내 세계가 되는걸.” (5∼6쪽)



  ‘두 눈이 멀쩡하’지만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입니다. 낯선 곳에 가면 모두 낯설기 때문에 내가 찾으려는 곳이 어디인가 못 찾기 일쑤예요. 코앞에 모든 것이 다 있어도 이 가운데 어느 것을 찾으려 했는지 못 알아본다고 할까요.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코앞에 둔 것을 못 알아챈 나머지 한참 동안 엉뚱한 곳에서 짐을 뒤지곤 합니다. ‘눈 뜬 장님’이란 말은 무엇을 나타낼는지, 또 왜 이 같은 말을 쓰는가를 헤아려 봅니다. 어쩌면 우리는 ‘눈을 뜬 사람’일는지 모르나, ‘눈을 감은 사람’일는지 몰라요. 우리는 두 눈으로 무엇을 본다고 여기지만 정작 못 보거나 안 보는 모습이 많을 수 있어요. 더구나 마음으로는 하나도 못 보거나 안 볼 수 있고요.



“너도 우산이 없구나. 하지만 다행이야. 오늘은 좋은 비라서.” ‘어. 오늘은 최악이었어. 신발 밑창은 떨어지고, 우산은 없고, 돈도 없고. 좋은 비가 세상에 어디 있어. 있을 리가.’ (30∼31쪽)


“뭐가 우는데. 들어 봐.” “새야. 새!” “새, 뭐하고 있어?” “그냥 있어! 그냥!” (40쪽)



  만화책 《꽃에게 묻는다》(사소 아키라/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18)를 읽으면서 두 사람을 마주봅니다. 한 사람은 눈을 감고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눈을 뜨고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눈을 감고서 살아가는 사람은 늘 한 손에 지팡이를 쥡니다. 천천히 걷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 우산을 안 받습니다. 빨리 가지 않습니다. 곧잘 넘어집니다. 말이 많습니다.


  눈을 뜨고서 살아가는 사람은 매우 바쁩니다. 해야 할 일이 많고, 벌어야 할 돈도 많습니다. 건사해야 할 식구는 늘 말썽이요, 일터에서는 얼간이 같은 윗사람 때문에 날마다 부아가 치밉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녁한테 벗이 될 사람이란 안 보이고, 모두 싫고 미우며 못된 사람으로만 보입니다.


  눈을 감고서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 으레 ‘장님’이라 일컫습니다. 장님인 사람은 비가 오든 말든 우산을 안 받는데, 우산을 쥐면 소리가 막혀서 길을 어림할 수 없다고 해요. 우산이 없어야 소리를 느끼며 길을 찾는다지요. 그런데 이런 삶을 몹시 싫어할 수 있지만, 만화책에 나오는 장님 사내는 싫어하지 않습니다. 비를 맞을 수밖에 없는 몸이지만, 비를 맞을 적마다 비내음을 맡고 빗물을 핥으면서 맛을 느껴요.


  눈을 뜨고서 살아가는 사람은 장님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듯’하지만, 막상 모든 것을 다 보지는 못합니다. 이것저것 다 볼 수 있기는 해도 귀찮거나 성가시거나 싫어요. 게다가 이녁을 둘러싼 사람들이 하나같이 밉고 짜증나고 거북하고 괴롭다 보니, 이 땅에 있는 아름다움이나 기쁨을 하나도 모릅니다. 아니 등돌리지요. 코앞에 아름다운 것이 있어도 그저 내치기 바쁩니다.



“전에도 그랬어. 구해 준 사람은 이름도 밝히지 않고 가더라고. 맹인 친구는 모두 한 번은 플랫폼에서 떨어진 경험이 있는데.” “그런 거야?” “다들 그러더라고. 이 세상에는 슈퍼맨이 잔뜩 있다고.” (85쪽)


“치하야, 여기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데.” “아아. 손질하는 사람이 없어서 잡초가 우거졌지만, 하얀 꽃이 한 송이 피어 있어.” (111쪽)



  만화책 《꽃에게 묻는다》에 나오는 장님 사내는 ‘눈 뜬 아가씨’를 처음 만난 날부터 어쩐지 마음이 갑니다. 눈 뜬 아가씨는 장님 사내하고 처음 스치던 날, ‘길잡이 지팡이’를 잘못해서 걷어찼어요. 자동계단에서 말이지요. 장님 사내는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손을 잃었거든요. 눈 뜬 아가씨는 이녁이 잘못해서 걷어찬 지팡이를 주워 주지 않습니다. 일터로 바삐 가야 한다는 핑계를 앞세웁니다. 그러나 내내 마음이 켕깁니다.


  장님 사내는 왜 눈 뜬 아가씨가 마음에 남았을까요? 어쩌면 장님 사내는 ‘걷어차인 길잡이 지팡이’에 파르르 남은 기운을 느꼈을 수 있어요. 비록 눈으로는 볼 수 없으나 마음으로 알아차렸을 수 있어요. ‘이 지팡이를 걷어찬 아가씨는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고, 뭔가 대단히 힘든 마음이로구나. 그 아가씨를 다시 만나서 그 힘든 마음을 다독여 주고 싶네’처럼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치하야 씨 손은 나랑 전혀 다르네요. 내 손은 아무것도 모르는 손이에요.” (137쪽)


“이치타로 씨는 항상 치하야 씨를 봐요. 눈이 보이지 않아도 늘 보고 있어.” (146쪽)



  어떻게 장님이 눈 뜬 사람을 달래거나 보듬거나 이끌 수 있느냐고 물을 만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어른을 이끄는 일이 흔합니다. 마음이 맑은 사람이 마음이 흐린 사람을 이끌기 마련이에요. 맑은 물이 흐린 물을 씻어 주듯이, 맑은 손길이 흐리거나 아프거나 고단한 손길을 부드러이 녹여 줄 수 있어요.


  늘 너무 바쁜 나머지 달음박질로 살아가던 ‘눈 뜬 아가씨’는 아주 조금씩 마음을 열려고 합니다. 맨몸으로 비를 맞으면서 웃음을 짓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님 사내를 보고 놀랐고, 장님 사내가 꽃내음을 따라 걷기도 하는 모습을 보며 놀랐으며, 마을 할머니하고 실뜨기를 하며 노는 모습을 보며 놀라요.


  다른 ‘눈 뜬 사람들’처럼 어떤 일자리를 얻어서 돈을 벌 재주는 없는 장님 사내이지만, 외로운 이웃을 알아보고서 수다쟁이처럼 말을 걸 줄 압니다. 큰일은 해내지 못하지만 손이 모두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기에, 눈을 감고도 고칠 수 있는 것은 잘 고칩니다. 게다가 전철을 타다 미끄러져서 철길에 떨어졌어도 떨지 않아요. 으레 미끄러지고 으레 떨어지니 걱정을 하기보다는 스스로 갈 길만 바라보네요.



“나, 아기를 죽이고 싶지 않아.” “알았어. 협력할게. 집을 나오는 거야. 바보 점장 따윈 필요 없어. 여자 힘만으로 아이를 키우는 거지.” (213쪽)


‘이치타로는 눈이 보이지 않아도 나를 찾아 줬어. 이번에는 내가 찾는 거야.’ (232쪽)



  눈 뜬 아가씨는 참말로 눈 뜬 아가씨가 되기로 다짐합니다. 이녁을 둘러싼 바보스럽거나 얼빠지거나 밉거나 나쁜 사람들은 그만 쳐다보고 그만 부아를 내기로 합니다. 이제는 짜증질을 멈추고, 넉넉하면서 포근한 마음이 되기로 합니다. 힘든 길에 빠진 동무를 돕기로 합니다. 장님 사내가 바라는 길을 곁에서 지켜보기로 합니다. 마을 아주머니들이 아기를 안고 어르는 몸짓을 꾸밈없이 마주하면서 ‘아기를 더는 싫어하지 않기’로 합니다.


  ‘눈을 떠서 볼 수 있다’는 까닭 하나로 ‘섣불리 이 사람을 이리 재거나 저리 따지는 짓’을 모두 그치기로 해요. 살며시 눈을 감고 마음으로 먼저 보기로 합니다. 장님 사내를 만난 뒤로 ‘눈을 뜬 마음’하고 ‘눈을 감은 마음’을 처음으로 생각할 수 있었으니, 바야흐로 눈을 뜬 몸이 더없이 아름답게 눈을 뜬 마음으로 거듭나도록 눈물을 쏟고 웃음을 터뜨리면서 삶을 사랑하기로 합니다. 2018.3.30.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 숲노래 2018년 '으뜸책' 후보로 선뜻 올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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