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노래 창비시선 101
고은 지음 / 창비 / 199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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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25



사람들이 왜 시인더러 “꺼져버려라” 하는가
― 내일의 노래
 고은
 창작과비평사, 1992.4.25.


어느새 또 감쪽같이 빠져나가 아까 그 아가씨 손을 다시 잡고 노닥거리고, 그 사이 사타구니 속의 창창한 20대 젊음은 장작개비가 되어 벌떡거리고, 이번에는 숫제 숨까지 가빠올랐다. (145쪽/송기숙, 발문)

다음날, 그날 저녁 계획표에 강사와의 대환가 뭔가 하는 일정이 있었던지 우리를 찾아다녔던 한길사 직원들의 표정은 춘분 지난 우거지상이었다. 그러나 우리들 사정은 더 심각했다. 우선 속이 젓 담가놓은 속이어서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몰라라 내내 코만 골았다. (150쪽/송기숙, 발문)

토굴에서 당대 최고의 선승 곁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발발 기며 다소곳이 참선을 하다가 곡괭이로 방바닥을 파버리고 지리신만한 스승 앞에 대들던, 그 엉뚱한 행위의 이쪽과 저쪽, 금주의 실목걸이를 차는 결심과 그 목걸이를 차고 고주망태가 되어 술상을 치며 고담준론을 토하는, 그 이쪽과 저쪽, 이 극과 극의 머나먼 거리가 고은이라는 인간의 폭일 터이다. (151쪽/송기숙, 발문)


  ‘En시인’ 이야기가 불거지면서 고은 시인이 지난날 쓴 시집을 한 권 꺼내어 펼쳐 보기로 했습니다. 마침 1992년에 낸 《내일의 노래》(창작과비평사, 1992)가 저희 책숲집에 있습니다. 1992년은 최영미 시인이 등단한 해이기도 하기에, ‘En시인’이라는 사람 됨됨이를 이녁 글로 돌아보기에 맞춤하겠다고 여겼습니다.

  먼저 시집 끝에 붙은 글을 읽습니다. 웬만한 시집에는 문학평론가 한 사람이 시인이 어떤 문학을 펼쳤는가를 매우 딱딱하고 어려운 말로 풀어내기 일쑤인데, ‘En시인’이 쓴 《내일의 노래》에는 ‘작품 해설’이 없습니다. ‘발문’을 쓴 송기숙 소설가는 ‘En시인’하고 얽힌 이야기를 꽤 길게 늘어놓습니다. ‘En시인’이 스물 언저리였을 무렵 얼마나 땡중이었는가 밝히면서 “속수무책의 사나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래요, 절집에서 스님길을 걷지 않고 툭하면 몰래 절집에서 달아나 서울 한복판을 거닐며 술에 절다가 젊은 아가씨 손을 그윽히 잡고 살을 부비는 그런 땡중이 바로 ‘사나이’로군요.


오늘 나는 무엇인가
나는 짐승보다도 못하구나
반성이 없는 것과
반성이 있는 것 사이
그 질곡의 배회에 맴도는
나는 무엇인가 (다시 오늘/14쪽)

말 한마디 못하는 나무일지라도
사랑한다는 말 들으면
바람에 잎새 더 흔들어대고
내년의 잎새
더욱 눈부시게 푸르러라 (나무의 앞/24∼25쪽)


  시집 《내일의 노래》를 읽으면 이 시집을 쓴 분이 하루가 멀다하고, 아니 아침저녁을 가리지 않고 술에 절어 사는구나 하고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면서 시인 스스로 “나는 짐승보다도 못하구나” 하고 뉘우치는 말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멍가게로 달려가서 ‘딸한테 줄 우유’를 사는 길에 소주를 두 병씩 사들입니다.


안성으로 가지 않고
평택으로 가지 않고
15분쯤 잰걸음으로 가
동네 가게에서 우유 한 곽을 샀다
섭섭해서
소주 두 병도 샀다
알레그로 안단테 (동네 가게에서/35쪽)


  술을 마시는 하루가 나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루에 소주를 두 병 마시든, 또는 아침에 두 병 저녁에 두 병 마신들 대수롭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밤새 술자리를 벌여서 산다 한들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술이 좋다면 그토록 좋아하는 술하고 벗삼으면 되어요.

  누군가 숲이 좋다면 늘 숲하고 벗삼습니다. 누군가 바다가 좋다면 바다를 곁에 끼고 살아갑니다. 누군가 바람이 좋다면 싱그러이 바람이 부는 고즈넉한 터에 집을 지어 조용히 바람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술이 좋은 시인은 하루 내내 술에 절어서 살아갑니다. 이리하여 절집에서 얌전히 앉아 스님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얌전히 앉다가도 술이 떠오르고, 술을 한잔 걸치면 아가씨가 떠오르는데, 어떻게 스님길을 걸을까요.


나이 마흔다섯 마흔두서넛
이제 무얼 어쩌겠다는 건가
앞가슴 내려앉아버려
나바론에 건포도라
무얼 어쩌겠다는 건가
한밑천 잡아 무엇 하나 차리지 못하고
아직껏 이렇게 술상머리 나와
무얼 어쩌겠다는 건가 (돈암동 니나노/50쪽)


  언제나 술벗을 끼고 살아가는 시인은 무척 부지런히 글을 씁니다. 밤새워 술을 마시고 아침에는 아픈 속을 부여잡는다는데, 언제 글을 썼을까요. 술이 깨기 앞서, 술을 잔뜩 들이켠 뒤에, 또는 술판에서 글을 썼을까요.

  시집 《내일의 노래》는 1992년에 나왔습니다. ‘창비 시선 101호’라는 숫자를 받고 번듯하게 나왔습니다. ‘창비 시선’을 돋보이게 한다는 시집이라는데, 이 시집이 나온 1990년대 첫무렵 우리 글밭은, 글마을은, “속수무책 사나이”가 니나노집에 가서 늘그막 술집 색시 앞가슴을 훔쳐보면서, 아니 대놓고 바라보면서, 이를 고스란히 그리는 글판이었구나 싶습니다. 이렇게 쓰는 글이 문학이 되고 시가 되었구나 싶습니다.

  가시내를 술판 노리개로 삼는 문학으로 걸어온 우리 글밭이었을까요. 사내는 술자리에 가시내를 노리개로 곁에 두었던 우리 글마을이었을까요. 그리고 이를 따지거나 탓하거나 나무라거나 지청구하는 목소리는 하나도 없이, 이를 훌륭한 ‘문학’이라며 치켜세운 나날이었지 싶습니다.


그 거리 포장마차 안에서
소주 두 병째
술주정이 구원이었다
이런 판에 순정을 찾지 말라고

순정이라니 개에게나 던져주어라 (순정의 노래/66쪽)


  거나한 사나이는 술짓이 그리 깨끗하지 않은 듯합니다. ‘맑고 바름(순정)’ 따위는 개한테나 던져주라고 “순정의 노래”를 부릅니다. 밤새 술을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스스로 안 맑은 길을 걷겠노라 외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얼추 스무 해 남짓 흐르고 흘러서 ‘En시인’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2018년 시 한 줄로 불거졌어요. 아마 누군가 말할는지 몰라요. 이렇게 오래된 이야기를 왜 이제서야 건드리느냐고요.

  그러나 ‘En시인’은 예나 이제나 이녁이 했던 “맑지 않은 손길이나 손짓”을 제대로 뉘우친 적이 없지 싶어요. 이녁이 쓴 시에 스스로 “나는 짐승보다도 못하구나” 같은 글을 적지만, 막상 이런 글대로 스스로 뉘우치면서 새모습으로 거듭나려 한 적은 없지 싶어요.

  그동안 ‘En시인’한테서 생채기를 입은 숱한 사람들이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여겨, 오래오래 가슴에 묻은 아픔을 찬찬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부디 ‘En시인’이 이 땅에 있는 동안 지난날 잘잘못을 말끔히 밝히고 고개 숙일 줄 알라는 뜻이지 싶어요. 앞으로 이 나라 모든 “속수무책인 사나이” 시인이며 평론가이며 작가이며 얄궂은 지난날을 털어내라는 뜻이라고 봅니다.


이용악 선생님
선생님 살아계실 때
소가 웃는 걸 보셨나요?
저희 동네 하마정마을
농사꾼 이득환 집
검정소 한 마리
이 녀석이 자꾸 웃었지요 (소가 웃는다/97쪽)

20년 혹은 30년
이 세월을
0.7평짜리 감방에서 보내는 양심범이 있다면
그런 늙어버린 양심범 몇백명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인가 도대체

함부로 술 생각 따위 내지 말라
우리는 무엇인가 (너와 나/99쪽)


  1992년 고은 시인한테 어떤 해였을까요? 이해에 고은 시인은 얼마나 많은 ‘갓 글밭에 나온 앳된 가시내 시인’을 술자리에서 마주했을까요? 얼마나 많은 ‘고은 술벗 시인’은 ‘앳된 가시내 시인’을 얼마나 고은 시인 곁에 착착 앉히며 술을 따르라고 시켰을까요?

  한 입으로는 “함부로 술 생각 따위 내지 말라”를 노래하지만, 다른 한 입으로는 “순정이라니 개에게나 던져주어라”를 노래하는 삶이란 무엇일는지요? 한 입으로는 평화나 민주를 말하지만, 다른 한 입으로는 술이랑 니나노를 말하는 살림이란 무엇일는지요?


나의 딸 차령이는
아직 분단이라는 말을 모릅니다
휴전선이라는 말을 모릅니다 (나의 딸/102쪽)


  이제 1992년 시집 《내일의 노래》를 덮을 때입니다. 그러고 보니 시집 이름이 “내일 노래”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하루를 그리는 시집입니다. 이 시집에는 고은 시인 딸아이 이야기를 다룬 시가 하나 있기도 합니다. 분단이나 휴전선이라는 말을 아직 모른다는 이녁 딸아이 이야기를 시로 그립니다.

  ‘En시인’이 이녁 딸아이를 이야기하는 시를 읽으며 마음이 아립니다. ‘En시인’은 이녁 딸아이를 노래하면서 왜 딸 같은 앳된 가시내 시인을 그렇게 괴롭혀야 했을까요. 이녁 딸아이한테뿐 아니라 온누리 딸아이한테 어떤 몸짓과 말짓이 되어 하루를 그려야 했을는지 묻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시인을 꺼져버려라 했다. 그들에게는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가 시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이 죽자 나이팅게일도 죽었다. 시인과 나이팅게일은 하나였던가. 하지만 새소리는 남아 있지 않으나 시는 남아 있다. (153쪽/고은, 후기)


  새소리는 안 남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저는 어릴 적에 들은 아름다운 새소리를 오늘에도 떠올려 우리 집 아이들한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En시인’은 새소리는 남지 않아도 시는 남는다고 말씀하시는데, 네, 틀린 말이 아닙니다. ‘En시인’이 남긴 시는 고스란히 남습니다. 한 입으로 두 가지 말을 하는 시가 고스란히 남고, 이녁 술벗이 이녁이 얼마나 모진 술짓을 벌였는지를 이녁 시집에 낱낱이 남겨 줍니다.

  사람들이 왜 시인더러 “꺼져버려랴” 할까를 ‘En시인’ 스스로 깨닫기를 빕니다. 사람들이 왜 시 아닌 새소리를 곁에 두고 싶어하는지를 이제는 알아차리기를 빕니다. 새처럼 맑고 상냥하게 노래부를 수 있는 시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언제나 “꺼져버려랴” 하고 말할 뿐입니다.

  ‘En시인’이여, 그리고 ‘En시인’ 곁에서 둘레에서 함께 술판을 벌이며 가시내뿐 아니라 젊은 사내 손이랑 허벅지랑 볼이랑 허리를 주무르고 쓰다듬었던 모든 “속수무책인 사내” 시인이랑 평론가랑 작가들이여, 그대들이 저지른 짓은 잊혀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2018.2.17.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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