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순 vol.2
고형렬 외 지음 / 삼인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노래하는 말 323



철없는 바람인 ‘중년 남성 시인’이 부끄럽다
― 몬순 vol.2
 고형렬·린망·시바타 산키치·꾼니 마스로한띠와 열세 사람
 삼인, 2017.12.29.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밥을 먹는 동안에도 또 다른 지진이 있었는지.
부서져 내린 흙이 밥 위에 떨어져 내렸는지.
그릇들은 다시 쟁강거리고
책장에서 남은 책들이 쏟아져 내리고
벽시계가 곤두박질치며 시계바늘이 멈춰 버렸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흔들리는 나날 밖에서
희미한 파동을 몸으로 느낄 뿐
그곳의 슬픔과 공포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흙 묻은 밥을 먹었다/나희덕, 35쪽)


  이른바 ‘예전·옛날’에 있었다는 일을 놓고서 여러 시인이 입방아에 올랐습니다. 다만, 입방아에 오르는 시인은 하나같이 사내입니다. 입방아에 오르는 이들 시인은 하나같이 가시내인 젊거나 어린 시인을 추근댔습니다. 이름이 낱낱이 드러나는 시인이 있고, 아직 이름이 안 드러난 시인이 있습니다.

  여태 갖은 막짓이나 막말이 바깥으로 널리 드러나지 않은 시인을 떠올려 보면, 속내가 어떠할는지 모를 이분들이 쓴 시집을 좀처럼 손에 쥐기 어렵습니다. 제법 나이가 있고,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시집을 여럿 낸 사내라면, 이분들이 얼마나 정갈하거나 말끔하거나 깨끗한지를 도무지 알 길이 없기까지 합니다. ‘나이와 이름 있고 교수라는 자리에 있는 40∼60대 사내인 시인’을 모두 못미덥게 보는 셈이라고 할까요.

  이런 마당이지만 막상 이들 ‘이름 있고 교수라는 자리까지 있는 사내인 시인’ 가운데 ‘추근질 시인’이 했던 짓을 함께 아파하거나 슬퍼하거나 뉘우치거나 나무라려는 목소리는 좀처럼 듣기 어렵습니다. 이와 함께 지난일을 되새기면서 고개를 숙이거나 털어놓는 목소리도 듣기 어렵습니다.


(바람은 영혼)이라고 심리학은 말하고
(바람은 신)이라고 문화인류학은 말하고
(바람은 방향에 주목)하라고 사회학은 말하고
(바람은 수평의 대기)라고 기상학은 말하고
(바람에 요주의)라고 소방서는 말하고
(바람을 타고 싶다)고 가수는 말하고 (마음의 비유/사소 겐이치, 68쪽)

무기가 아닌, 한 송이 꽃을
꺼지지 않고 조용히 퍼져 가는
양초 불꽃 같은 꿈을 (한 송이 꽃, 촛불/나카무라 준, 77쪽)


  시를 쓰는 손길이 시를 쓰는 손길다이 아름답지 않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끼는 이즈음, 여러 나라 시인이 함께 엮은 《몬순 vol.2》(삼인, 2017)을 읽습니다. 이 시집은 한국,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에서 시 한 줄로 삶을 노래하는 열세 사람 목소리를 담습니다. 열세 사람이 열세 갈래 목소리로 지구별 평화와 꿈과 사랑을 바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무기가 아닌 꽃을 바라볼 줄 알기를 바라는 마음을 시에서 읽습니다. 무기를 앞세운 전쟁이 아닌, 꽃을 가꾸는 호미를 함께 손에 쥐어 삶터를 가꾸자는 뜻을 시에서 엿봅니다.


국가를 탈출할 자유는 있다
하지만 그 저 편에
국가가 아닌 장소가 있을까?

국가란
인간의 환상이 만들어 낸 감옥 (아무것도 아닌 내가/시바타 간키치, 91쪽)


  글만 잘 쓴다고 해서 글로 먹고살아서는 안 될 노릇이지 싶습니다. 착한 마음이 없이 글만 잘 쓴다면, 글쓰기 빼고는 모두 바보스러울 수 있습니다. 상냥한 마음이 아닌 채 글만 꾸역꾸역 쓴다면, 글쓰기 빼고는 모두 멍청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글은 허울이 좋으나 속내는 빈 껍데기일 수 있어요. 삶은 없는 채 목소리만 큰 시라면 우리한테 거짓말을 들려주는 셈입니다. 삶을 사랑으로 짓지 않으면서 목소리만 이쁘게 꾸민 시라면 우리를 속여넘기려는 셈입니다.

  우리는 공직자한테 겉속이 같은 착한 마음과 몸짓을 바랍니다. 여느 공무원뿐 아니라 시장이나 군수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의원이나 군의원 모두 겉속이 정갈하고 상냥하기를 바랍니다. 글을 다루는 시인이며 소설가이며 기자이며 교사이며 모두 참답고 착한 눈길에 손길에 마음길을 건사하기를 바랍니다.


저 멀리 윤리 하나하나를 응시한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우리 아이들의 미소를 나는 발견한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손으로 가슴을 탁탁 치는 아이들
우리가 바로 인도네시아예요 (근원의 이유/꾼니 마스로한띠, 157쪽)


  아이들 앞에서 활짝 마음을 열고 웃을 수 있는 시인을 바랍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을 뿐 아니라, 아이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아니 아이들하고 손을 맞잡고 삶을 노래하고 가꿀 줄 아는 시인을 바랍니다.

  아이들한테 전쟁무기를 물려준다면 바보스러운 어른이겠지요. 아이들한테 겉속 다른 시를 문학이랍시고 물려준다면 멍청한 어른이겠지요. 우리는 참말로 가장 아름다운 터전을 아이들한테 물려줄 어른으로 살아야지 싶습니다. 그리고 말 한 마디 또박또박 가다듬고 가장 고운 한국말로 갈무리한 시 한 줄을, 덧붙여 삶하고 말이 하나로 흐르는 정갈한 노래일 시 한 줄을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있는 어른으로 살림을 가꾸어야지 싶습니다.

  여러 나라 시인이 모여 빚은 시집 《몬순 vol.2》을 돌아봅니다. ‘몬순(monsoon)’은 한국말로 옮기자면 ‘철바람’쯤 됩니다. 철이 든 어른으로서 철을 아는 노래를 읊기에 시가 됩니다. 아직 철이 덜 든 몸이나 마음이라면, 찬찬히 철을 익혀서 이제는 슬기롭고 올바로 살아갈 줄 아는 모습으로 거듭나기에 시를 씁니다.

  막삽질을 일삼은 정치도 권력이지만, 추근질을 해대는 사내들 손길도 권력입니다. 모든 사내들이 권력을 버리고 호미질 쟁기질 낫질 키질 써레질 바심질을 하기를 바랍니다. 맑은 숨을 짓는 글을 쓸 수 있기를 빕니다. 2018.2.16.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