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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지펴야겠다
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시를 노래하는 말 287
글을 쓰는 사내가 걷는 길
― 불을 지펴야겠다
박철 글
문학동네 펴냄, 2009.3.2. 7500원
아빠는 마음이 가난하여 평생 가난하였다
눈이 맑은 아이들아
너희는 마음이 부자니 부자다
엄마도 마음이 따뜻하니 부자다
넷 중에 셋이 부자니
우린 부자다 (반올림, 수림이에게)
지난날에는 그저 파묻히고 말던 이야기였으나, 이제는 바깥으로 환히 드러납니다. 지난날에는 힘이 없던 이들한테 쓰라린 이야기였으나, 이제는 힘을 휘두르던 이들 몸짓이 낱낱이 드러나고요. 고은 시인이 저질렀다는 성추행이 널리 불거지면서, 다른 문인들이 저질렀다는 성추행이나 막짓도 하나하나 불거집니다. 이 가운데에는 송기원 소설가가 술자리에서 새내기 시인 볼에 뽀뽀를 했다가 뺨을 맞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문단에서 힘이 있다면서 여린 이한테 더럽거나 지저분한 짓을 일삼은 이들은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까요? 그들이 저지른 더럽거나 지저분한 짓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고개 숙이거나 무릎 꿇거나 빌거나 뉘우친 적이 있을까요?
어느 날 나는 아내 앞에서
나도 모르게 북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 학원비로 분위기가 냉랭한 가운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툭 던지고 말았다
몸이 아파도 주눅들지 않는 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
고개를 돌리며
아내는 신경질적으로 낮게 읊조렸다
“당신은 거기 가면 아오지 감이야” (아오지)
고은 시인 막짓과 함께 새삼스레 불거진 송기원 소설가 막짓 이야기를 듣고 나니, 송기원 시인이 1990년에 낸 《마음속 붉은 꽃잎》(창작과비평사)이라는 시집을 읽던 무렵 매우 거북하던 일이 떠오릅니다. 이 시집은 송기원 소설가가 전라도에서 ‘술과 몸을 파는 늙은 가시내’를 만나서 술 마시며 나눈 이야기를 가득 다룹니다.
박철 시인이 2009년에 낸 시집 《불을 지펴야겠다》(문학동네)에는 이녁이 ‘지방에 일을 보러’ 가서 ‘가시내를 옆에 끼고 잔 이야기’를 쓴 시가 나오기도 합니다. 송기원 소설가는 ‘술과 몸을 파는 늙은 가시내하고 술 마시며 나눈 이야기’를 시로 담았다면, 박철 시인은 ‘가시내를 옆에 끼고 잔 이야기’를 〈인연〉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시집에 실었습니다.
둘 다 괜찮다고 말하며 몸을 내려올 때 문밖에서 호각소리가 들렸다
새벽녘, 잠이 든 그녀를 두고 골목을 빠져나오다가
모퉁이 구멍가게에서 계란 한 봉지를 사서
되돌아가 슬며시 문을 열고 들여놓았다
방문 소리에 잠이 깬 그녀가 아유, 이걸 뭘, 하며 몸을 일으키곤
밥이나 좀 끓여 먹고 가라고 손을 잡았다
첫차 타고 산에 올라야 한다며 돌아나오는데
아침 해가 까맣게 떠오르고 있었다 (인연)
《불을 지펴야겠다》라는 시집을 읽은 지 여러 해이지만, 이 시집을 두고 뭐라 말해야 좋을는지 아리송합니다. 한쪽에서는 이녁 아이하고 곁님하고 늙은 어머니를 그리는 이야기를 시로 쓰는데, 다른 한쪽에는 ‘가시내를 돈으로 사서 잠자리에 든 이야기’를 시로 써요.
이러한 시는 ‘안과 밖은 모두 같다’는 빗댐말일까요. ‘사람은 어디에서나 똑같은 사람으로서 만나고 헤어지는 삶도 같다’는 빗댐말일까요. 아니면 다른 어떤 깊거나 거룩하거나 대단한 뜻을 담은 시짓기일까요.
추운 날
아궁이에서 불 때는 엄마 모습 보기 좋았다
저녁 밥 짓는 겨울 석양 무렵
부엌 문턱에 앉아보다가
디딤돌에 섰다가
조금조금 다가가 부뚜막에 앉으면
얘야 연기 난다 맵다 매워 저리 가라 저리 가
눈물 찍어내며 엄마 손사래를 치면 (부뚜막)
서로 살을 섞는 이야기가 소설에 퍽 자주 흐릅니다. 시에서도 서로 살을 섞는 이야기를 다루지 말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한국에는 틀림없이 성매매업소가 있습니다. 시인이나 소설가라 해서 성매매업소를 들락거리지 말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하고 곁님이 있다 하더라도, 늙은 어머니를 애틋하게 그리더라도, 얼마든지 성매매업소를 들락거리면서 그곳에서 만난 이를 ‘인연’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시라는 문학으로 얼마든지 담아내어도 됩니다.
싼 것이 편한 인생이 있다 팬티도 양말도 런닝구도
싼 것을 걸쳐야 맘이 편한 사람들이 있다
한번 산 운동화를 사골 고듯 신고 다니는
그런 사람들이 보석처럼 지키는 한 가지가 있다 (보석)
피뢰침의 뒷주머니에 등굣길 뽑기장수의 연탄불 속에
나의 작은 책상을 하나 놓아두어야겠다
지우개똥 수북이 주변은 너저분하고
나는 외롭게 긴 글을 한 편 써야겠다
세상의 그늘에 기름을 부어야겠다
불을 지펴야겠다 (불을 지펴야겠다)
글을 쓰는 이들이 부디 착하고 고울 수 있기를 빕니다. 겉보기로 착하거나 얼굴이 고운 글쟁이가 되기보다는, 속마음이 착하고 마음결이 고운 글님이 되기를 빕니다. 어제까지는 얄궂거나 아쉬운 걸음을 걸었다면, 오늘부터는 상냥한 걸음걸이로 다소곳하게 삶을 짓고 글을 지을 수 있기를 빕니다. 부디 마음 가득 참다운 보석을 품으면서 하루를 열기를 빕니다. 2018.2.15.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