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히 모르는 글쓰기
코앞에 두고도 모른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코앞에 두고도 모르기 일쑤이다. 오리나무를 모르는 사람은 코앞에 오리나무를 두고도 오리나무인지 쥐똥나무인지 돌배나무인지 탱자나무인지 모른다. 눈앞에서 뻔히 보면서도 모른다고 한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픈지 슬픈지 참말로 모르기 일쑤이다. 나도 이렇게 살아왔고, 둘레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흔하다. 말을 안 하기에 서로 모를 수 있지만, 말을 하더라도 마음을 열지 않기에 그냥 모른 채 지나친다. 함께 영화를 보더라도 못 알아보거나 놓치기도 하고, 함께 읽은 책이더라도 못 듣거나 빼먹기도 한다. 어느 책을 읽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책에 흐르는 줄거리나 이야기를 다 알거나 잡아채지는 못한다. 다른 보기를 들자면, 나는 눈앞에서 영화배우나 가수나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를 보더라도 누구인지 모르고, 내 앞에 선 자동차가 어떤 자동차인지 하나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나무를 쪼는 새가 딱따구리인지 어떤 딱따구리인지 못 알아채는 사람이 많지 않나? 쇠딱따구리를 가려내어 알고자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곳·자리·데·터’가 어떻게 다른가를 알려고 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늘 스스로 보고 싶은 만큼만 보고, 이제껏 머리에 쌓아둔 만큼만 느낀다. 모르는 사람한테는 가르칠 수 없고, 알려 하지 않는 사람한테는 알려줄 수 없다는 말을 새삼스레 되새긴다. ‘아는 사람’하고 ‘알려 하는 사람’하고만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글을 나눌 수 있네. 2018.2.3.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