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 앨리스 민음의 시 237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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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12


겨울에 외려 반지하집에 햇살이 듭니다
― 반지하 앨리스
 신현림 글
 민음사, 2017.7.21. 9000원


토끼 굴에 빠져든 백 년 전의 앨리스와
돈에 쫓겨 반지하로 꺼져 든 앨리스들과 만났다 (반지하 앨리스)

내 눈물은 빚더미 속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내 발은 사막을 건너는 법을 익히고
내 길은 무엇을 잘못했나 살핀다 (사랑 밥을 끓이며)


  시를 쓰는 신현림 님은 언제부터인가 반지하를 떠도는 살림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창 젊은 나이가 아닌, 딸아이를 돌보면서 쉰 한복판을 지나는 나이에 반지하집을 떠돌면서, 삶이란 이렇게 쓴맛 신맛 매운맛인가 하고 느낀다지요.

  시집 《반지하 앨리스》(민음사, 2017)는 꿈나라를 누비는 ‘앨리스’가 아닌 반지하를 떠도는 앨리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앨리스처럼 살고 싶던, 앨리스와 같은 꿈을 키우고 싶던, 궁금한 것도 많고 싱그러운 사랑도 오롯이 품던 한 사람은 매우 고단한 벼랑길이나 가시밭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시도 성서도 안 읽기에
영혼 부패 속도는 더욱 빨랐다
책이 방부제인 줄 모르고, 곰쓸개, 개고기를 찾으며
개소리나 하는 남자는 바다 세탁소를 영영 잊었다
구하지 않으므로 바다는 출렁이지 않았다 (사랑을 잊은 남자)

사내 냄새는 맡고 살아야지 하고는 일하다 잊었다
해를 담은 밥 한 그릇이 얼마나 눈물겨운지
쌀 한 줌은 눈송이처럼 얼마나 금세 사라지는지
살아가는 일은 매일 힘내는 일이었다 (가난의 힘)


  어떤 이웃님은 어릴 적부터 반지하집에서 태어나 여태 반지하집에서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이웃님은 마당 있는 집에서 태어나 살다가 어느새 반지하집으로 옮겨서 살 수 있어요. 어떤 이웃님은 한동안 반지하집에서 살다가 마당 있는 집으로 옮겨서 살 수 있고요. 그리고 반지하집조차 못 되는 쪽방에서 사는 이웃님이 있고, 쪽방조차 깃들 수 없어 한뎃잠을 이루는 이웃님이 있습니다.

  반지하집이란 지하집보다는 한결 낫다고 느낍니다. 저는 반지하집에도 지하집에도 살아 보았는데, 반지하집은 그나마 햇살이 반 조각 즈음 들어오면서 하루가 흐르는 결을 느낄 수 있어요. 이와 달리 지하집은 아침인지 낮인지 밤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지하집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면 새벽이나 저녁에도 눈이 부시더군요. 마치 두더지가 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길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은 ‘지하집에 살던 나’하고는 아주 딴 나라에 사는 사람들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반지하집하고 지하집을 떠돌다가 옥탑집으로 옮겨서 산 적이 있어요. 드디어 낮에 불을 안 켜고 살 수 있구나 싶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비록 여름에는 불같이 덥고 겨울에는 오지게 추운 옥탑집이지만, 환한 햇빛을 누리며 빨래를 널거나 이불을 말릴 수 있으니 참으로 느긋하구나 싶었고, 앞으로는 반드시 마당 있는 집에서 해를 듬뿍 누리자는 꿈을 키웠어요.


금수저인 어린 날 10년이 있었고
지금은 흙수저라고 당신이 말할 때
나는 바람수저라 말한다 (절망의 옷을 벗겨 줘,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3)


  반지하 앨리스가 된 시인 아주머니는 금수저로 어린 날을 보내다가, 흙수저인 오늘날을 보낸다는데, 이녁 삶이란 문득 바람수저와 같다고 느낀다고 밝혀요. 바람수저. 바람수저. 새삼스러운 이름을 혀에 얹어 봅니다. 바람처럼 살아가는 나날을 곰곰이 되새깁니다. 바람이 되어 하늘을 날고, 바람과 같이 온누리를 푸르게 감싸는 숨결을 떠올립니다.

  가진 것이 없기에 빈털털이라 할 수 있지만, 가진 것이 없으니 홀가분하다고 할 수 있어요. 홀가분한 몸이나 살림이나 마음이라면 참말로 바람 같을 터이니 바람수저가 되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숱한 길을 걸어 보면서 숱한 마음이 되어 봅니다. 숱한 삶을 치르면서 숱한 눈길을 키웁니다. 숱한 가시밭길을 새삼스레, 늦깎이에도, 힘겹게 걸어야 하면서, 이 삶이란 어떤 바람결인가를 생각합니다. 우리한테 주어진 길마다 새롭게 배우며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면서 씩씩하게 한 걸음을 내딛는 마음이 될 수 있어요.


은행도 없던 시절 시골 약사였던 엄마는
환자 고쳐 버신 돈을 늘 신문지에 싸서 두셨다
통일되면 외가 식구 나눠 주려고 모으셨다

돈은 때로 사람을 찌르는 흉기인데
나누려는 돈은 따스하고 말랑말랑했다

엄마 돌아가신 후 발견한
먼지 가득한, 그 슬픈 돈뭉치 (이산가족을 찾는 긴 여행, 엄마를 기리며)


  포항에서 매우 큰 지진이 났고, 나라에서는 수능 시험을 이레 늦추었습니다. 대학시험을 앞둔 푸름이는 이레 동안 더 마음을 졸여야 했고, 이제 대학시험을 지나면서 홀가분한 벗님이 있을 테고, 오히려 마음이 무거운 벗님이 있을 테지요. 대학교를 눈앞에 그릴 수 있는 푸른 벗님이 있을 테며, 대학교는 그만 더 멀어진 푸른 벗님이 있겠지요.

  고등학교를 마치면서 바로 대학교에 가도 좋은 삶길입니다. 대학시험을 한두 차례나 서너 차례나 너덧 차례 더 치러서 대학교에 가도 좋은 삶길입니다. 그만 대학교 문턱을 밟을 수 없이 사회로 나아가도 좋은 삶길입니다. 대학교를 처음부터 바라보지 않은 채 당차게 새로운 길로 나아가도 좋은 삶길입니다.

  어느 삶길을 걷든 푸른 벗님은 새로운 하루를 배웁니다. 단맛을 보면 단맛을 배워요. 쓴맛을 보면 쓴맛을 배우지요. 단맛 쓴맛 고루 보면서 우리를 둘러싼 숱한 이웃이나 동무를 새롭게 바라보거나 느낄 수 있습니다. 신맛 매운맛까지 보는 동안 우리 곁에 있는 아프거나 슬프거나 외로운 이웃이나 동무를 더욱 깊거나 넓게 살피거나 헤아릴 수 있습니다.


좋은 집에서 살기를 더는 꿈꾸지 않는다
욕조에서 글 쓴 나보코프
부엌에서 글 쓴 하루키
쫓기면서 시 쓴 아흐마토바
창녀촌 아랫방서 글 쓴 마르케스
거울을 가진 그들에게 위안을 갖는다
반지하 방에 살아도
거울 알이 있기 때문이다 (거울 알)


  시집 하나 함께 읽어 봐요. 드디어 대학시험을 마친 푸른 벗님도, 삶에서 벼랑끝에 내몰린 이웃님도, 고단하거나 씁쓸한 살림이 그치지 않아 그저 캄캄한 앞날만 보이는 이웃님도, 아침마다 새로 뜨는 해님을 바라보면서 시집 하나 함께 읽어 봐요.

  마음을 새로 가다듬으면서 시를 읽어요. 마음을 곱게 추스르면서 시를 읽어요. 마음을 찬찬히 북돋우면서 시를 읽어요.

  시를 읽다가 웃음을 지어도 좋고, 눈물을 지어도 좋습니다. ‘나도 내 기쁨이나 슬픔을 시로 써 봐야겠다’ 하고 마음을 먹으면서 연필을 쥐고 공책을 펴도 좋습니다. 오늘 하루를 가만히 그리면서 함께 시를 읽어요.


당신이 곁에 없어도 당신을 느낀다고 쓰니
식탁으로 햇살 설탕이 쏟아졌다
아무도 없어도 나 혼자가 아니었다
자꾸 창을 열어 보라고 바람이 불었다 (햇살 설탕)


  11월이 저물고 12월이 찾아들면, 햇살꼬리는 더 늘어집니다. 제가 깃든 고흥 시골집 대청마루로 첫겨울 햇살꼬리가 길게 스며들어요. 종이를 바른 문으로 아침볕이 퍼집니다. 여름에는 높던 해가 겨울에는 낮아지면서 온 집안에 아침저녁으로 포근한 볕살을 나누어 줍니다. 겨울에 낮아지는 볕살이기에 대청마루를 거쳐 방문에까지 볕살이 퍼지거든요.

  무슨 말인가 하면, 여름에는 반지하집에 그야말로 햇살이 안 들어옵니다. 그런데 오히려 겨울에는 해가 길게 누우면서 반지하집에도 살몃살몃 햇살이 스미더군요. 추운 겨울에 뜻밖에도 반지하집에 조그마한 햇살이 퍼지며 살짝 포근한 볕까지 퍼져요.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쐽니다.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습니다. 이 겨울에 모든 이한테 고루 찾아드는 해님처럼, 마음에 빛이 되는 시를 한 줄 읽어 봅니다. 2017.11.27.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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