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짓는 글살림 

14. 어깨동무하는 말로 거듭나기




  냇물이 흐릅니다. ‘내’는 ‘시내’보다 큰 물줄기입니다. ‘시내’는 ‘실 + 내’라고 하니 작은 물줄기예요. ‘시냇물’은 작고 ‘냇물’은 크지요. 그런데 다리가 놓인 냇가에 가 보면 나라에서 세운 알림판에는 ‘하천’이라고만 적혀요. ‘하천(河川)’은 어떤 낱말일까요? 한국말사전을 찾아보면 “하천 : 강과 시내를 아울러 이르는 말. ‘내’로 순화”로 풀이합니다.


  사람들이 쓰기에 알맞지 않아서 고쳐써야 할 한자말 가운데 하나가 ‘하천’인 셈입니다. 그렇지만 공공기관을 비롯해서 학계에서도 ‘내·냇물’이라는 낱말을 안 쓰고 ‘하천’만 쓰기 일쑤입니다.


  물이 흐릅니다. 반반한 곳이라면 물이 안 흐르지만, 어느 한쪽으로 조금만 기울어도 물이 흐릅니다. ‘반반하다’나 ‘판판하다’를 두고 한자말 ‘평평하다(平平-)’를 쓰기도 하고 ‘편평하다(扁平-)’를 쓰는 분이 있는데요, ‘반반하다·판판하다’ 두 마디로 넉넉하지 않을까요?




판판하다 : 물건의 표면이 높낮이가 없이 평평하고 너르다


평평하다(平平-) : 1. 바닥이 고르고 판판하다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판판하다’는 ‘평평하다’로 풀이하고, ‘평평하다’는 ‘판판하다’로 풀이합니다. 얄궂은 돌림풀이예요. 쉽고 수수한 한국말 한 마디이면 넉넉한데, 쉽고 수수한 한국말을 굳이 한자말로 옮기던 옛날 한문 말씨 버릇 때문에 여러모로 어지럽다고 할 만해요.


  한국말은 결을 살리는 대목이 남다릅니다. ‘빨갛다·발갛다·뻘겋다·벌겋다’처럼 결에 맞추어 가지를 치지요. 한 낱말만 제대로 알면, 결을 살려서 느낌을 살짝살짝 달리하는 낱말을 끝없이 지을 수 있어요.


  이 얼개를 헤아리면서 한국말을 새롭게 배우려는 마음이 된다면, ‘반반하다·판판하다’를 바탕으로 ‘번번하다·펀펀하다’를 쓸 수 있습니다. ‘뻔뻔하다·빤빤하다’로 가지를 칠 수 있고, 말놀이 삼아서 ‘뱐뱐하다·변변하다’나 ‘퍈퍈하다·편편하다’처럼 느낌을 재미나게 북돋울 만하지요.




  집에서 일하는 사람을 가리킬 적에 으레 ‘주부·가정주부’라는 한자말을 써요. 한자말을 쓰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만, 이제 한자말은 평등하거나 평화로운 새로운 터전에서 쓰기에는 꽤 낡은 결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잘 헤아려 보셔요. ‘주부·가정주부’에서 ‘주부(主婦)’는 가시내만 가리킵니다. 이는 무엇을 나타낼까요?


  집에서 집안일을 맡는 사람은 오직 가시내라고 하는 생각을 한자말 ‘주부·가정주부’로 나타낸다고 할 만해요. 다시 말하자면 가부장 권력 얼거리에서 쓰던 한자말 한 마디는 집에서 일하는 가시내한테뿐 아니라 집에서 일하고 싶은 사내한테도 평등하지 않고 평화롭지 않습니다. 집안일을 도맡거나 즐기는 사내한테는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요?


  한국말에는 ‘그녀’가 없어요. ‘그녀’라는 어설픈 말씨는 ‘she’를 옮기려고 애쓰던 일본사람이 지은 일본말이에요. 일본말 ‘피녀(彼女)’를 한글로 바꾸어 ‘그녀’처럼 쓰곤 하지만, 널리 퍼진 말씨라고 해도 한국말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왜 ‘그녀’는 한국말이라고 하기 어려울까요? 한국말에서는 사내하고 가시내를 가르는 말씨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 한 마디로 사내도 나타내고 가시내도 나타내요. ‘그이·저이·이이’라는 낱말로 사내랑 가시내를 나란히 나타내지요.


  그러면 집에서 여러 일을 맡는 사람을 한국말로는 어떻게 가리킬까요? 바로 ‘살림꾼’입니다. 한국말 ‘살림꾼’은 살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나 살림을 훌륭히 하는 사람을 가리켜요. ‘살림꾼’은 가시내한테만 쓰는 말이 아닙니다. 사내도 살림꾼이고 가시내도 살림꾼이에요.




  우리 사회가 민주·평등·평화로 한 발짝씩 나아가는 길에 힘을 모으려 한다면, 우리가 여느 자리에서 쓰는 수수한 말씨를 더 깊고 넓게 헤아릴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집에서 밥을 짓고 옷살림을 건사하며 이모저모 치우고 쓸고 갈무리하는 알뜰한 사람을 두고 ‘주부·가정주부’ 아닌 ‘살림꾼’이라는 낱말을 쓸 수 있을 적에 참말로 민주나 평등이나 평화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어요.


  집안일은 사내하고 가시내가 어깨동무하면서 할 일이에요. 집살림도 사내랑 가시내가 손을 맞잡으면서 할 일이지요. 사내도 밥을 짓고 빨래를 잘 해야 합니다. 가시내도 밥짓기랑 빨래하기를 솜씨있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살림꾼’이라는 오래된 한국말에 새롭게 옷을 입혀 보고 싶어요.




 살림지기 / 살림님 / 살림이




  책방을 지키는 이는 ‘책방지기’입니다. 나라를 지키는 이는 ‘나라지기’입니다. 마을을 지키면 ‘마을지기’, 학교를 지키면 ‘학교지기’, 운동경기에서 안방을 지키면 ‘문지기’, 숲을 지키면 ‘숲지기’입니다. 가만히 보면, 광주시장은 ‘광주지기’요, 서울시장은 ‘서울지기’입니다. 시장이라는 공무원이 아닌 여느 사람들도 사랑으로 우리 고장을 지키려 한다면 모두 ‘지기’예요.


  지키는 씩씩한 마음을 헤아려 ‘살림지기’라는 낱말을 쓸 만합니다. 다음으로 ‘님’이에요. ‘살림님’이지요. 지키는 씩씩한 마음에다가 집안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으로 어루만질 수 있는 넋이기에 하느님 같은분이라는 뜻으로 ‘살림님’이라 할 수 있어요.


  둘레에서 “그대는 아름다운 살림지기입니다.”라든지 “아버지는 멋진 살림님이에요.” 하고 부추기거나 기릴 수 있어요. 이때에 살림지기나 살림님이라는 이름이 아무래도 멋쩍다 싶으면, “아니에요. 저는 그저 수수한 ‘살림이’입니다.” 하고 한 마디를 할 만해요. 살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수수하게 밝혀서 ‘살림이’예요.




  한국말은 ‘-꾼’이나 ‘-이’를 붙여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나타내곤 해요. 여기에 ‘-지기’나 ‘-님’을 가만히 붙이면 한결 재미있고 뜻있기까지 합니다. 아이들은 아직 일꾼이 아니고 심부름꾼이에요. 심부름을 잘 하는 아이들한테 ‘심부름님’이라 해 볼 수 있습니다. 심부름을 도맡는 멋지고 씩씩한 아이들한테는 ‘심부름지기’라 해 볼 수 있어요.


  글을 잘 쓰거나 가다듬는 분이라면 ‘글지기’가 되는데, 이 글지기는 ‘편집자’라는 이름하고 잘 어울려요. 그렇다면 작가는? ‘작가’는 ‘글님’이 되겠지요. 글지기하고 글님이 만나서 글꾸러미(책)를 엮습니다. 글꾸러미를 읽어 주는 이웃님은 ‘글벗’입니다. 함께 글을 쓰는 이웃이라면 ‘글동무’예요. 여기에서도 ‘


글벗지기·글벗님’이나 ‘글동무지기·글동무님’처럼 더 살을 붙일 만합니다.


  즐겁게 생각을 북돋우면서 즐겁게 말을 북돋아요. 상냥하게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상냥하게 말을 북돋웁니다. 어깨동무하려는 평등한 생각에서 어깨동무하는 평등한 말이 태어나고, 손을 맞잡는 평화로운 마음에서 손을 맞잡는 평화로운 말이 싹틉니다. 2017.9.15.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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