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 세계사 속의 어린이
피터 N. 스턴스 지음, 김한종 옮김 / 삼천리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읽기 삶읽기 323


아이들은 성노예도 소년병도 바라지 않았다
―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피터 N.스턴스 글/김한종 옮김
 삼천리, 2017.8.4. 19000원


농업이 가져온 가장 명백한 변화는 일을 할 때 어린이가 얼마나 효용성이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었다. 수공예품 생산이나 가내 제조 활동을 포함하는 대부분의 농업 사회는 수렵채집 사회보다 훨씬 더 명백히 어린이의 핵심적인 속성을 유용하다고 규정했다. (47쪽)


  사람들은 예부터 아이를 어떻게 다루었을까요? ‘다루다’라는 낱말이 걸립니다만, 어른은 아이를 때로는 ‘다룹’니다. 때로는 ‘보살피’고 때로는 ‘가르치’며 때로는 ‘이끌’어요. 때로는 ‘사랑’하고 때로는 ‘굴리’기도 할 텐데, 이러면서 아이하고 함께 살림을 ‘꾸리’거나 ‘지으’려는 몸짓이 있었으리라 생각해요.


서양의 가난한 가정에서는 종종 아이를 내다버렸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문 앞에 갖다놓는 것이 즐겨 쓰는 방식이었다. (131쪽)

근대적 모델은 대체로 아동기와 성인기 사이를 농업 사회에서 나타났던 것보다 더 크게 분리했다. 어린이는 더 이상 부모 곁에서 일하지 않았다. 산업화와 함께 부모는 일하러 집 밖에 나가야 했고, 어린이는 학교에 다녔다. (158쪽)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삼천리, 2017)를 읽습니다. 유럽을 바탕으로 이 지구라는 별에서 ‘어른’이 아이를 마주한 몸짓이나 눈길을 여러 자료를 살피면서 이야기를 엮습니다. 지나온 발자국이라면 책이나 벽그림에 나온 대목을 작은 실마리로 삼아서 돌아볼 만합니다. 따로 책이나 벽그림이 없더라도 입에서 입으로 이어온 노래하고 이야기에서 어른이 아이를 가르친 몸짓이나 살림을 엿볼 수 있어요.

  서양에서는 ‘아기 버리기’가 제법 흔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사랑스러운 아기라 하더라도 입에 풀을 바르기가 너무 벅찼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지난날 아기를 그토록 흔히 버리던 서양은 오늘날 온누리 여러 나라 아이들을 널리 받아들이곤 합니다. 이른바 ‘입양을 많이 하는 나라’가 지난날에는 ‘아기를 쉽게 흔히 버리던 나라’였어요.

  우리는 옛날에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이 나라 이 겨레도 지난날에는 먹고살기 벅찰 적에 아기를 버릴 수 있었을까요? 아무래도 우리는 서양하고 달라서 ‘아기를 버릴 만한 예배당’이 그리 흔하지는 않았겠지요. 다만 이 나라에 절집이 생긴 뒤로는 절집 앞에 아기를 놓고 간 일이 더러 있었으리라 생각해요. 그리고 오늘날 한국은 아직도 유럽이나 미국에 아기를 많이 내보내는 손꼽히는 나라입니다.


1980년대에 이르면 점점 더 많은 미국 어린이들이 17살 이전에 방과후 파트타임이나 방학 기간에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 그러나 일과 다른 활동 때문에 학업과 집안일에서 멀어지고 청소년들이 피곤해서 공부에 열중하지 못함으로써 실제로 갈등이 자주 일어났다 … 학교가 끝난 다음 일을 하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주로 자기 자신, 예컨대 자동차 같은 소비 상품을 사거나, 미국에서는 특히 마련하기 힘들었던 대학 공부에 들어가는 비용에 보태려는 목적이었다. 또한 대체로 어른이 되어 가질 직업을 준비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낮은 수준의 서비스 업무에 종사했다. (248쪽)


  살림에 보태려고 일하는 어린이나 푸름이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살림에 보태는 ‘어린이·푸름이 노동’보다는 ‘자동차 소비’ 같은 데에 쓰려고 일하는 푸름이가 많았다고 합니닫. 오늘날 한국에서 푸름이 노동은 어떤 모습일까요? 편의점을 비롯한 여러 시설이나 가게에서 일하는 푸름이는 어떤 뜻으로 학교 밖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할까요? 그리고 학교 밖이나 집 밖에서 일하는 어린이하고 푸름이는 무엇을 배울 만할까요? 앞으로 전문 자리를 얻을 만한 일을 해 보면서 일솜씨를 갈고닦을까요, 아니면 적은 일삯으로 오래도록 고단한 하루일까요?


20세기와 21세기의 어떤 단일 사건도 홀로코스트처럼 많은 어린이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폭력의 패턴은 제2차 세계대전과 그에 이은 수십 년 동안 점점 더 심해진 것 같다. (276쪽)

1930년대와 1940년대 초 일본 군대는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붙잡아 강제로 성노예로 삼는 폭력을 저질렀다. (278쪽)


  지구라는 테두리에서 어린이를 바라볼 적에 ‘성노예’하고 ‘소년병’이 불거진다고 합니다. 사회나 정치에 평화 아닌 전쟁을 끌어들이는 어른은 아이들이 평화롭고 사랑스레 자라는 길이 아니라, 두 성별에 따라 벼랑으로 떨어지는 길로 내몬다고 하지요.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라는 책에서 다루기도 합니다만, 왜 어른은 전쟁무기하고 군대를 단단히 붙잡으려고 할까요? 전쟁무기로 평화를 지키겠다는 말은 참으로 얼마나 올바르다고 할 만할까요?

  어른으로서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로서 이 대목을 자꾸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무기를 새로 뽑아내고 군대를 자꾸 키우는 이는 바로 어른입니다. 아이들은 소년병으로 끌려가기는 하지만, 아이들 스스로 이웃나라로 쳐들어가는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자라서 군인이 되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첨단무기나 미사일이나 원자폭탄 따위를 뽑아내지 않습니다.

  전쟁무기를 거느릴 돈으로 민주와 평등을 이룰 사회 터전을 닦을 노릇이 아닐까 궁금합니다. 군대를 키울 돈으로 평화와 사랑과 복지를 나누는 정치 얼개를 바로세울 노릇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많은 소년병들은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몹시 잔혹해질 수 있었다. 그들은 총이 발휘하는 파괴력에 환호해서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것 이상의 다른 아무런 이유 없이 종종 사람을 죽이고 불구로 만들고 성폭행을 저질렀다. 이런 활동을 한 소년들은 강제로 전쟁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집에 돌아가기가 힘들었다. 집에서는 고분고분해야 했으며, 부모들이 없는 경우도 많았고 지역사회는 당연히 적대적이었다. (285쪽)


  몸뿐 아니라 마음이 다친 아이들이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합니다. 몸뿐 아니라 마음이 다치도록 아이들을 내모는 어른들은 언제쯤 이 쳇바퀴를 멈출 만할까요. 남녘에서는 사드라는 미사일이, 북녘에서는 핵무기 실험이, 그야말로 남북녘 모두 전쟁무기 소용돌이에 휩쓸리기만 합니다.

  미사일 하나를 만들지 않으면 그만큼 평화하고 멀어질까요? 오히려 미사일 하나를 만들지 않을 적에 그만큼 평화하고 가까울 수 있지 않을까요? 군대를 더 늘리지 않으면 평화를 못 지킬까요? 도리어 군대를 더 늘리거나 군사비를 자꾸 늘리기 때문에 평화를 잊거나 잃지는 않을까요?

  2000년대로 접어드는 지구별 아이들 살림살이를 돌아보는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인데, 앞으로 2050년쯤 이르면 이 나라를 비롯한 온누리 아이들은 어떤 살림을 누리고 어떤 사랑을 나눌 수 있는지 헤아려 봅니다. 앞으로 이 나라 아이들하고 온누리 아이들은 전쟁 아닌 평화로 나아갈 만한지, 민주와 평등이 어우러지는 정치로 거듭날 만한지, 이러면서 마을마다 서로 아끼는 따사로운 꿈을 이룰 만한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2017.9.30.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