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망네 우영팟듸 자파리 - 제주어 선싕이 들려주는 제주어 동시집 씨앗시선 5
김정희 지음 / 한그루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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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90


수수한 고장말이 사랑스러운 노랫가락
책이름 : 할망네 우영팟듸 자파리
 : 김정희
펴낸곳 : 한그루 2017.3.10.


저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인천이라는 고장은 서울이 곁에 있어서 쉽게 서울 문화에 젖으리라 여길 수 있지만, 어릴 적 인천에서 서울을 바라보면 서울은 참 멀기만 한 곳이었어요. 서울에 있는 작은아버지 집에 다녀올라치면 너덧 시간이 걸렸지요. 전철길은 까마득히 멀고, 전철에서 내려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 길도 멀었어요. 웬 자동차며 사람이며 이다지도 많은지. 무엇보다 서울에서는 서울사람이 쓰는 서울말 인천말하고 다르다고 느꼈어요.

대구나 부산에서 살던 분이라면 인천말하고 서울말이 무엇이 다르냐고 물을 만해요. 광주나 전주에서 살던 분이라면 인천말하고 부천말하고 수원말이 어찌 다른가를 모를 만해요. 그러나 경상도 분이라면 진주말하고 창원말이 다른 줄 알아요. 전라도 분이라면 나주말하고 고창말이 다른 줄 알지요.

고장마다 사람이 다르면서 말이 달라요. 고장마다 삶자리가 다르면서 말씨가 다르지요. 다만 우리는 이 다 다른 고장말을 매우 많이 잊거나 잃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은 모두 표준 서울말을 쓰고,교과서나 책도 언제나 표준 서울말을 써서 어린이하고 푸름이한테 가르쳐요.
 
할망네 우영팟듸 가민
애기호박이영 호박잎 부루 고치 ᄂᆞᄆᆞᆯ
우리 할망네 우영팟듸
명줖진품 세간살이덜은 덤
벗덜 불렁
자파리 ᄒᆞ게
 
어멍도 뒈곡
아방도 뒈곡
ᄒᆞ으로 밥도 ᄒᆞ곡
ᄂᆞᄆᆞᆯ쿡도 끌리곡
조물조물 ᄂᆞᄆᆞᆯ 무치고
밥 먹게 (할망네 우영팟듸 자파리)
 
할머니네 텃밭에는
아기호박 호박잎 상추 고추 배추
우리 할머니네 텃밭에
명품진품 살림살이는 덤
친구들 불러
소꿉장난 하자
 
엄마도 되고
아빠도 되고
흙으로 밥도 하고
나물국도 끓이고
조물조물 나물도 무쳐놓고
밥 먹자 (할머니네 텃밭 소꿉놀이)
 
제주에서 나고 자라서 제주에서 사는 김정희 님이 쓴 <할망네 우영팟듸 자파리>(한그루 펴냄)를 읽으며 깜짝 놀랍니다. 요즈음 고장말을 드러내어 쓴 동시를 만나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어린이하고 함께 읽을 시뿐 아니라 어른끼리 읽는 시에서도 고장말로만 쓴 시를 만나기란 대단히 어려워요.

동시집 할망네 우영팟듸 자파리는 두 가지 말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먼저 제주말로 이야기를 엮어요. 이런 다음에 서울말을 옆에 붙여요.
 
빗방울덜
하늘서 곱을락ᄒᆞ당
마당더레 툭 털어지민
어듸 곱으카
 
ᄇᆞ글ᄇᆞ글 거리당
이녁찌레 모다들엉
응상응상 거리당
우르르 쾅 (부끌레기 동동) 

빗방울들
하늘에서 숨바꼭질하다가
마당으로 뚝 떨어지면
어디로 숨을까
 
보글보글 거리닥가
끼리끼리 모여
웅성웅성 거리는데
우르르 쾅 (보글보글 빗방울)
 
책이름으로 나온 할망네 우영팟듸 자파리가 무엇인지 저로서는 가늠도 못 했습니다. 제주말 옆에 붙은 서울말을 읽고서야 할머니네 텃밭 소꿉놀이인 줄 깨닫습니다. 옳거니 하며 무릎을 쳤어요. 구성지면서 재미나거든요. ‘우영팟듸 텃밭이기도 하고 마당이기도 하대요. ‘자파리소꿉이거나 소꿉놀이라고 합니다.

고장말은 서울말이나 표준말이 아닌 고장말입니다. 그래서 빗방울덜처럼 시를 써요. “하늘에서라 하지 않고 하늘서라 시를 씁니다. “마당으로가 아닌 마당더레라 시를 써요.
 
꼬불꼬불
돌담 ᄉᆞ이로 난 족은 질 (올레)
 
꼬불꼬불
돌담 사이로 난 작은 길 (올레)
 
시에서 흐르는 감칠맛이란 무엇일까요? 요리조리 말장난을 하면 맛이 날까요? 이리저리 익살맞게 꾸미면 멋이 날까요?

동시도 어른시도 굳이 말장난이나 말놀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즐겁게 놀이하듯이 시를 쓰면 놀이를 하듯이 즐거운 시가 되어요. 신나게 노래하듯이 시를 쓰면 참말 노래를 부르듯이 신나는 시가 되어요.

지름ᄂᆞᄆᆞᆯ고장으로 저고리 ᄒᆞ영 입엉
살랑거리는 어욱 머리 찰랑거리멍
ᄀᆞ슬ᄁᆞ정 철철이 옷 ᄀᆞᆯ아입는
할망 웃이는걸 베릴 수 잇일거우다 (할락산)

유채꽃으로 저고리 해 입꼬
살랑거리는 억새 머리 흔들며
가을까지 계절 따라 옷 갈아입는
할망 웃음 볼 수 있지요 (한라산)
 
제주 어린이가 제주말을 되새기면서 마음밭에 고이 담기를 바라는 뜻을 펼쳐 보이는 할망네 우영팟듸 자파리를 읽으면서 새삼스레 기운을 얻습니다. ‘서울말로 옮긴 시 제주말로 쓴 시하고 대면 매우 밋밋하지 싶어요. 이와 달리 제주말로 쓴 시는 대단히 수수하거나 투박한 이야기를 그저 그대로 적을 뿐이지만 구성질 뿐 아니라 싱그럽습니다. 펄떡펄떡 살아서 춤추는 숨결이 흘러요. 고작 제주 고장말을 쓸 뿐이지만 싯말이 사뭇 다릅니다.

이 대목을 눈여겨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물려줄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한 가지라면 바로 이요 살림이지 싶어요. 돈이나 이름값이 아니라, 재산이나 물질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을 물려주고 사랑스러운 살림을 물려줄 적에 넉넉하고 따스하지 싶어요.

두고두고 이어온 아름다운 삶을 수수한 말에 담아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즐거이 가꾼 사랑스러운 살림을 투박한 말에 실어 아이한테 넘겨주어요.

여느 어른들은 그냥 유채꽃이나 청개구리라 하지만, 제주 고장말로 살피면 지름나물고장(지름ᄂᆞᄆᆞᆯ고장이나 풀개구리(풀ᄀᆞᆯ개비)’가 됩니다. 고장말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말이며 노래이며 삶이 살아나기도 하고, 이 고장말을 한껏 살리는 길을 헤아린다면 여느 서울말을 더욱 새롭게 가다듬어 볼 수 있어요.
 
조용ᄒᆞᆫ 도서관 못듸
어린 풀ᄀᆞᆯ개비 (도서관 못) 

조용한 도서관 연못에
어린 청개구리 (도서관 연못)
 
이를테면 지름나물꽃(유채꽃)’이나 풀개구리(청개구리)’ 같은 이름을 가만히 얻습니다. 하찮다고 여길는지 모르겠으나 수수한 자리에서 수수하게 길어올리는 말 한 마디가 새롭게 깨어납니다.대단한 우리말 사랑이 아니라 하더라도 작은 고장 작은 말에서 넉넉하며 따스한 기운이 피어납니다.

먹당 냉긴 정거
밧듸 걸름으로 묻언 놔둬신디
봄 나난
뾰족뾰족 올라오는 잎셍이덜
걸름 소곱서
노랑꼿이 올라오고
간잘귀가 지랑지랑 ᄃᆞᆯ려신게 (간잘귀)
 
먹다 남은 음식
밭에다 거름으로 묻었더니
봄이 되어
뾰족뾰족 올라오는 싹
거름 속에서
노란 꽃이 올라온다
개똥참외가 주렁주렁 달린다 (개똥참외)

다만 할망네 우영팟듸 자파리에서도 살짝 아쉬운 대목이 있어요. 제주말로는 철철이 으로 적으면서 서울말로는 계절(季節)’하고 친구(親舊)’로 옮긴 싯말입니다. ‘계절이나 친구도 흔히 쓴다고 하지만 하고 을 더 알뜰히 다룰 수 있었어요. 이러한 대목을 조금 더 마음을 기울일 수 있다면 제주말로 쓰는 동시는 제주말을 제주 어린이한테 선물로 건네는 책을 넘어서,한국 어린이 모두 살가이 선물로 받을 만큼 자라리라 생각합니다.

전라도에서 전라말로 동시를 쓰는 분이 나오면 좋겠어요. 경상도에서 경상말로 동시를 쓰는 분이 나오고, 강원도에서 강원말로 동시를 쓰는 분이 나오면 좋겠어요. 교과서를 고장마다 두 가지 말로 적어 볼 수 있기를 바랄 수 있을까요? 고장말하고 서울말을 나란히 적어서 시골 아이가 시골살이와 시골살림을 자랑스레 배우고 보람차게 물려받도록 이끄는 교육 정책이 있기를 빌어 봅니다.

수수한 말 한 마디에 가락이 붙어 노래가 되어요. 투박한 말 두 마디에 새로운 숨결이 깃들어 동시로 거듭나요. 고장마다 흐르는 여느 말 세 마디에 사랑스러운 씨앗을 심으니 기쁜 이야기로 태어나요.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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