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마을 산책
노인향 지음 / 자연과생태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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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책 읽기 129


달콤한 바람 마시는 마실길에 책을 읽다
― 섬마을 산책
 노인향 글·사진
 자연과생태 펴냄, 2017.8.7. 12000원


  어릴 적에 바람이 달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다. 여느 때에는 바람이 매캐한 곳에서 늘 지내야 했기에 달디단 바람을 느꼈구나 싶어요.

  제가 어린 날을 보내고 국민학교를 다니던 마을에는 화학공장하고 연탄공장이 있었어요. 아침 낮으로 늘 이 앞을 지나다니며 코가 뚫어지는구나 하고 느꼈지요. 이러다가 갯벌이 보이는 바닷가로 나가면 바람이 시원하다고 느꼈습니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에 시외버스를 타고 당진 시골에 나들이를 갈 적에는 바람맛이 참 다르네, 바람이 달구나 하고 느꼈어요. 고작 여덟아홉 살 아이 코에도 시골바람은 달았습니다. 모깃불 태우는 밤이 지나고 새벽이 찾아올 즈음, 뜨끈뜨끈한 온돌과 달리 종이 한 장만 댄 나무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은 또 얼마나 달았나 모릅니다.


달뜬 마음을 가득 안고 노두길로 첫발을 내딛으려는 찰나 왼쪽 해변에서 “퐁퐁”, “다다다” 하는 소리가 난다. 고개를 돌려 보니 서서히 드러나는 펄에 점점이 박힌 돌이 가득하다. 돌에서 소리가 날 리는 없고, 뭔가 싶어 갯벌로 내려가는 순간 돌멩이 위에서 수많은 무언가가 다시 “퐁퐁”, “다다다” 뛰어간다. 짱뚱어 새끼들이다. (36쪽)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서울에서 일하면서 지내는 노인향 님이 쓴 《섬마을 산책》(자연과생태,2017)을 읽다 보면 섬마을 나들이를 하면서 ‘달콤한 바람’을 마시는 이야기가 곳곳에 흐릅니다. 시골내기 어린이로 살던 무렵에는 바람이 달콤한 줄 몰랐다고 해요. 서울내기 어른으로 살다가 섬마실을 하며 ‘어릴 적 늘 마시던 바람’이 참말 달콤했네 하고 깨닫는다고 합니다.


농어는 민박집 아저씨가 잡아온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아주머니가 직접 기르고 담근 것이다. 세상에는 값비싸고 흔하게 먹을 수 없는 진미도 많다지만 팍팍한 식당 밥을 주식으로 삼는 이에게는 이런 소박한 밥상이 가장 귀하고 맛나다. (50쪽)

별똥별은 이 하늘 저 하늘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고 밤하늘에 선명한 선을 그었다가 지우기를 반복한다. “전쟁이 난 것처럼” 휘황찬란한 하늘은 보지 못했지만 “별이 지나가는 길”을 수십 번이나 본다는 것만으로도 말도 못하게 마음이 벅차오른다.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순간이다. (57쪽)


  섬마을로 나들이를 다니면서 섬밥을 먹습니다. 섬에서 거둔 남새에 섬에서 낚은 물고기로 차린 섬밥입니다. 대단할 것 없는 수수한 차림인 섬밥이라지만, 서울내기 어른으로서는 이 수수한 섬밥이야말로 맛나면서 고맙다고 이야기합니다. 느긋하게 받아서 느긋하게 누리는 밥상입니다. 서둘러 그릇을 비워야 하지 않습니다. 빨리 먹고 일어나야 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밥알 하나 나물 한 점 천천히 헤아리면서 먹을 수 있습니다.

  섬마실을 다니면서 마주하는 별이란 무엇일까요. 별은 섬이나 시골에만 뜨지 않아요. 비록 서울에서는 별을 보기에 만만하지 않다지만, 서울 하늘에도 별은 언제나 있습니다. 건물에 가리거나 불빛에 막힌다고 하더라도 애써 찾으려고 하면 ‘서울별’도 얼마든지 볼 수 있어요.

  그렇지만 바쁘게 다니지 않을 수 있는 자리가 되고서야 비로소 별을 마주합니다. 땅바닥이나 풀밭이나 평상에 드러누워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비로소 별빛이 온몸으로 스며듭니다. 낱말이나 지식으로만 아는, 또는 책이나 영상이나 영화에서 보는 별똥별이 아닌, 맨눈으로 지켜볼 수 있는 별똥별은 매우 달라요.


배 시간이 다 되어서 그만 가 봐야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살아온 세월만큼 투박하지만 따뜻한 손으로 내 등을 두드린다. 그리고는 “그래, 가 봐라. 그리고 내년에 또 온네이.”라며 손을 흔들어 주신다. (79쪽)

깊은 산골에 살던 어린 시절, 도시에서 온 손님들이 이따금 “공기가 달다”고 했었다. 그때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공기가 아이스크림도 아닌데 어떻게 달다는 것인지. 그런데 뭍에서 뱃길로 2시간 반이나 떨어진 섬에 서서 비로소 나는 그들의 말에 공감한다. (84쪽)


  여름이 흐릅니다. 일찌감치 말미를 얻어 여름마실을 다녀온 분이 있을 테고, 이제부터 말미를 받아 여름마실을 다녀올 분이 있을 테지요. 마실길에 《섬마을 산책》이라는 책 한 권을 챙겨 보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혼자 마실을 다닌다면 때때로 혼자 생각에 잠길 즈음 가방에서 꺼내어 읽을 만합니다. 아이를 이끌고 마실을 다닌다면,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이 곯아떨어진 뒤에 아이들 이마를 쓸어넘기면서 가만히 꺼내어 펼칠 만합니다.

  섬마실을 떠날 적에만 《섬마을 산책》을 읽어 볼 만하지 않아요. 섬마실에서는 나하고 다른 눈과 다리와 손과 마음으로 섬을 느끼는 이야기를 헤아립니다. 들마실이나 숲마실에서는 들이나 숲을 이루는 터전에서도 누리는 달콤한 바람처럼 섬에서 어떤 달콤한 바람으로 기쁜 이야기를 적바림했는가를 헤아립니다.


돈대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도 어김없이 붕붕 소리를 내며 이곳저곳으로 날아다니는 녀석들이 보인다. 풍이다. 꽃무지과 곤충인 풍이는 딱지날개를 벌리지 않고 옆에 있는 틈 사이로 속날개를 내밀며 난다. 처음에는 녀석들이 내는 이 날갯짓 소리에 벌인 줄 알고 깜짝깜짝 놀랐다. (146쪽)

열여섯. 한창 다른 세상이 궁금할 나이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는데 아이들이 또 하나같이 소리친다. “그래도 나이가 들면 다시 대청도로 올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괜스레 코끝이 찡해진다. (164∼166쪽)


  며칠 말미를 얻기에도 바쁜 몸이라면 이곳저곳 마실을 다닐 적에 자칫 바쁘게 움직일 수 있어요. 그렇지만 말미란 우리가 여느 때에 매우 바쁘게 살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느긋하고 스스로 넉넉하며 스스로 너그러운 마음을 되찾자는 하루일 때에 즐거울 만하지 싶습니다. 더 많은 곳을 둘러보지 않아도 돼요. 더 많은 뭔가를 느끼거나 보거나 누려야 하지 않아요. 섬 한 곳도 좋고, 골짜기 한 곳도 좋으며, 바닷가 한 곳도 좋아요. 그냥 수수한 시골집 한 곳도 좋습니다.

  매캐한 바람에 둘러싸인 채 살아온 나날을 며칠쯤 말끔히 잊고서 달콤한 바람을 마시는 마실길을 누려 봐요. 고작 서울에서 한두 시간을 벗어날 뿐인데 바람맛이 달라지는 하루를 누려 봐요. 때로는 솜사탕처럼 달고, 때로는 사탕수수보다 달며, 때로는 코코아는 댈 수 없도록 달디단 바람을 누려 봐요.

  달콤한 바람 한 줄기가 우리 몸을 감돌 적에 온갖 티끌을 씻어 줍니다. 달콤한 바람 두 줄기가 우리 몸을 스치면서 웃을 적에 갖은 앙금을 달래 줍니다. 달콤한 바람 석 줄기가 우리 몸을 어루만지면서 노래할 적에 바야흐로 맑은 마음으로 거듭나면서 새롭게 기운을 차립니다. 책 한 권으로 바람마실을 함께 누립니다. 2017.8.8.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숲책 읽기)

* 자연과생태 출판사에서 본문사진을 보내 주셔서 고맙게 싣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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