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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이 좋은 공부 - 글쓰기 지도 길잡이 ㅣ 이오덕의 글쓰기 교육 2
이오덕 지음 / 양철북 / 2017년 5월
평점 :
사랑하는 배움책 44
작은 별님처럼 새로 태어나는 글
― 글쓰기, 이 좋은 공부
이오덕 글
양철북 펴냄, 2017.5.18. 16000원
스스로 배우는 삶이 있기에 글을 쓸 수 있다고 느낍니다. 스스로 배우는 삶이 없다면 글을 쓸 수 없다고 느낍니다. 오늘 하루 새롭게 배우는 이야기가 있기에 어제 글을 잔뜩 썼어도 오늘은 오늘대로 새롭게 글을 쓸 기운을 얻는다고 느껴요. 어제하고 다른 오늘을 살아가기에 오늘은 어제 쓰지 못한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배우는 삶이 있기에 글을 쓸 뿐 아니라, 글이나 책을 읽을 수 있다고도 할 만할까요?
저는 이 물음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스스로 배우려 하기에 글을 쓰기도 하지만 글을 읽기도 해요. 날마다 스스로 새롭게 배울 수 있는 삶이기에 스스로 새롭게 글을 쓰기도 하고 읽기도 한다고 느껴요.
글쓰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저마다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일인데 그것이 안 되고 있다.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16쪽)
글쓰기 교육의 목표가 아이들을 소설가나 시인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에 다른 의견을 제시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17쪽)
아이들이 글을 쓰는 행위는 밥을 먹는 행위와 같다. 먹고 싶어서,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이지, 먹기 위해 먹는 것은 아니다. (19쪽)
쓰고 싶은 것을 쓰게 해야 한다. 쓰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글을 쓰는 데 기쁨을 느끼는 아이만이 글을 쓰는 데서 성장한다. (20쪽)
우리는 둘레에서 구경한 이야기를 글로 써 볼 수 있습니다. 둘레에서 구경한 이야기를 ‘관전평’이라고도 합니다. 스스로 겪지는 않았으나 두 눈으로 지켜본 느낌을 적는 글이에요. 이 관전평은 보는 자리마다 다 다른 글이 나옵니다. 가까이에서 볼 적하고 먼발치에서 볼 적하고 다를 테니까요. 다만 스스로 겪거나 하지 않은 채 구경하며 쓰는 글은 으레 벽에 부딪혀요. 손수 김치를 담가 보고 나서 글을 쓸 적하고, 김치를 담그는 사람을 옆에서 구경하고서 쓰는 글은 달라요. 손수 씨앗을 심어서 돌본 끝에 거둔 살림을 짓고서 쓰는 글하고, 씨앗심기나 거두기를 옆에서 구경하고서 쓰는 글은 다르지요.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면서 쓰는 글하고,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를 옆에서 구경하면서 쓰는 글도 달라요.
요즈음 사회를 돌아보면 ‘구경글(관전평)’이 대단히 많습니다. 운동경기를 지켜보고서 쓰는 글은 모두 구경글(관전평)이지요. 연속극이나 책을 보고서 쓰는 글도 구경글에 들 만해요. 이러한 구경글이 ‘구경’을 넘어서려면 한 가지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본 이야기를 스스로 삶에 녹여야지요. 즐겁게 보았구나 싶은 대목을 속으로 삭여서 삶으로 펼칠 적에는 ‘구경’이 아닌 ‘삶’이 됩니다. 이를테면 흙살림 이야기를 책으로 읽기만 했을 적하고, 흙살림 이야기를 읽고 나서 이를 몸으로 옮겨서 흙을 만져 새롭게 느낄 적에는 사뭇 달라요.
아이를 돌보며 가르친 다른 어버이 이야기를 책으로만 읽다가, 비로소 우리 스스로 아이를 낳아 몸으로 부대끼며 돌보는 나날을 누려 본다면 이때에도 사뭇 다르구나 싶은 대목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몸으로 부대끼는 동안 ‘내가 내 나름대로 부대끼며 배운 이야기’를 ‘내 글’로 써 보자는 생각이 들곤 해요.
옛날부터 ‘글은 사람’이라고 했다. 글을 보면 그 글을 쓴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22쪽)
어린이들은 문학을 창조하지 않는다. 창조할 능력이 없다고 하기보다 그런 문학이란 것을 창조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왜 그런가? 어린이들이 어른들에 오염되지 않고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 그대로라면 그들의 말과 행동은 그대로 진이요, 미요, 선이기 때문이다. (28쪽)
땅과 어린이의 삶이 또 너무나 비슷하다. 땅은 그것을 가꾸고 섬겨야만 거기 생명이 싹트고 풍성한 열매가 맺을 수 있듯이, 어린이의 삶도 그것을 지키고 가꾸지 않으면 결코 아름다운 생명이 피어날 수 없고, 살아 있는 글이 써질 수 없다. (39쪽)
농사짓기와 글짓기는 그 원리가 사랑이라는 점에서도 같다. 농사일은 땅과 곡식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잘될 수 없다. 이해타산으로 화학비료와 농약을 함부로 뿌려 땅을 혹사하고 오염시키고 땅에서 빼앗기만 할 때, 농토는 척박해져서 곡식은 병들고 결국 농사는 파멸의 날을 맞을 것이다. (41쪽)
이오덕 님이 쓴 《글쓰기, 이 좋은 공부》(양철북,2017)를 읽습니다. 이 책은 1983년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이오덕 님은 이 책에서 밝힌 이야기를 이녁이 2003년에 숨을 거두고 흙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고이 가꾸었어요.
“글은 사람”이라고 하는 대목을 깊이 돌아보았고, ‘글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람됨’을 헤아리면서 한길을 걸으셨어요. 억지로 꾸미거나 매만지는 글이 아니라, 스스로 짓는 삶을 스스로 즐겁게 글로 옮길 수 있도록 이웃들한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할 수 있어요.
《글쓰기, 이 좋은 공부》는 ‘글쓰기란 더없이 좋은 배움길’이라고 하는 뜻을 밝혀 주는구나 싶습니다. 글쓰기를 하면서 삶을 가꿀 수 있다는 뜻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삶을 가꾸기에 글을 쓰고, 날마다 즐겁게 배우며 좋은 살림을 짓기에 저절로 글감이 샘솟는다고 하는 얼거리를 찬찬히 알려주기도 해요.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 삶을 놓고 말해 본다면, 아이하고 부대끼며 가슴 가득 샘솟는 사랑이 있기에, 이러한 사랑을 신나게 글로 씁니다. 남한테 보여주려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스스로 가슴이 벅차면서 터져나오는 글입니다. 굳이 책으로 묶겠다는 뜻으로 쓰는 글이 아닙니다. 스스로 마음에 기쁜 숨결이 넘실거리기에 밤잠을 잊으면서 쓸 수 있는 글입니다.
여행길에 글을 쓰는 분들도 이러한 마음이기 마련이에요. 여행길에 새로 배우는 삶이 있기에, 이 좋은 배움을 차곡차곡 되새기려고 글을 써요. 날마다 새로 얻고 누리는 기쁜 삶을 누구보다 나 스스로 되돌아보려고 글로 쓰지요.
글이란 단순히 글자라는 부호를 집합시켜 놓은 것이 아니다. 글은 사람의 생각, 정신을 나타낸다. 글은 곧 길(진리)이다. (43쪽)
지금까지의 글쓰기 교육은 손끝으로 잔재주를 부리도록 가르쳐 왔다. 이러한 재주 부리기는 문예 교육이란 이름으로 초등학생들에게는 말장난을 일삼도록 하였고, 중고등학생들에게는 주로 애상과 회고 위주인 일부 문인들의 글을 흉내내도록 하였던 것이다. (63쪽)
어른들이 쓰는 글은 반드시 문학작품이어야 하는가? 문학이 아닌 글을 쓸 수는 없는가? 쓸 필요가 없는가? 문학작품이 아닌 글은 가치가 없는 것인가? (68쪽)
어른이 쓰는 시나 어린이가 쓰는 시나 다르지 않다. 시란 괴상한 말재주도 수수께끼 놀이도 아니고 가슴을 울리는 감동인 것이다. (85쪽)
이오덕 님이 들려주려는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입니다. 참말로 ‘글은 길’이라고 할 만하지 싶어요. 이 말씀마따나 ‘말은 마음’이라고 할 만할 수 있을까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요, 저마다 살아갈 길을 스스로 밝히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말’하고 ‘글’을 ‘마음’하고 ‘길’이라고 여길 수 있다면, 우리는 글쓰기를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될 만합니다. 글재주나 글솜씨를 굳이 안 키워도 되는구나 하고 느낄 만합니다. 그저 고운 마음이 되면 넉넉해요. 그저 즐겁게 삶길을 걸으면 되어요. 문학을 해야 글이 아닐 테니, 우리 스스로 시인이나 소설가나 수필가 같은 이름이 없더라도 흐뭇할 수 있어요. 따로 책을 써내지 않더라도 조용조용 우리 삶을 정갈하게 글로 옮기는 기쁨을 날마다 누릴 수 있어요.
글을 쓰는 동안 생각을 갈무리합니다. 글을 쓰는 사이에 우리가 스스로 걷는 길을 씩씩하게 바라봅니다. 글을 쓰고 나서 우리 생각을 새롭게 보듬습니다. 내가 쓴 글을 내가 스스로 되읽는 동안 내 마음을 새삼스레 깨닫고 내가 걸으려는 길을 더욱 알차게 가꾸려는 몸짓이 됩니다.
글을 쓰기 앞서 어수선해 보인 생각이라면, 글을 쓰는 동안 고요히 그러모아서 가꿀 수 있으리라 느껴요. 스스로 품은 생각을 알뜰살뜰 가꿀 수 있으면, 이 글쓰기란 배움이면서 기쁨이고 보람이면서 다짐이 되는구나 싶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어른의 그림을 베껴 그리게 한다면 얼마나 어려워하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베껴 그리는 노릇을 몇 번쯤 시키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전에 그렇게 재미있게 그리던 자신의 그림을 그만 못 그리게 되고, 언제까지나 남의 그림을 보고 흉내내는 짓밖에 할 줄 모른다. (101쪽)
어린이들에게 글을 쓰게 하는 까닭은 그들의 삶을 풍부하게 해 주기 위해서다. 삶을 가꾸는 일이 없이는 어떤 교육도 이루어질 수 없다. (109쪽)
말을 순화한다는 것은 겉도는 말이 아닌 살아 있는 말을 쓴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말은 살아 있는 사람의 창조성 있는 삶의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순수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찾아 가지는 것이 된다. (125쪽)
‘베껴쓰기’는 자칫 흉내내기로 그치기 쉽다고 느낍니다. 다른 사람이 쓴 훌륭해 보이는 글을 베껴서 적어 보는 일은 나쁘지 않을 터이나, 다른 사람이 쓴 훌륭하구나 싶은 글만 자꾸 베끼고 또 베끼는 동안 정작 우리 이야기는 한 줄도 못 쓰기 마련이에요. ‘다른 훌륭한 글’을 베끼다 보면 어느새 ‘내가 쓴 수수하거나 투박한 글’은 안 훌륭하다고 여길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 글만 훌륭하다고 여기는 사이에 우리가 저마다 짓는 살림살이는 글로 쓸 만하지 않다는 생각에 젖어들기도 해요.
이오덕 님은 《글쓰기, 이 좋은 공부》에서 ‘베끼는 그림’이 얼마나 고된 노릇인가 하고 이야기합니다. 아이들한테 ‘어른 그림을 베끼도록 시키’면 아이들은 이 짓을 괴로워하다가 어느새 이런 ‘흉내 그림’에 길든다고 이야기해요.
아이들이 ‘어른 글’을 베껴서 쓰도록 이끈다면, 우리 어른들 스스로 우리 이야기를 수수하거나 투박하게 써 보기보다는 자꾸 ‘훌륭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 글’만 베껴쓰기(필사)를 하다 보면, 참말로 자꾸자꾸 나를 나 스스로 낮보거나 얕보는 버릇이 몸에 붙으리라 느낍니다.
잘 그리든 못 그리든 우리 그림을 우리 손으로 그릴 적에 즐거워요. 잘 쓰든 못 쓰든 우리 글을 우리 이야기로 엮어서 쓸 적에 즐거워요. 잘 찍든 못 찍든 우리 사는 이야기를 우리 손으로 상냥하게 사진으로 찍어서 나눌 적에 즐거워요.
시를 읽고 맛보는 재미, 시를 느끼고 시를 붙잡아 쓰는 재미는 마음이 따뜻해지고, 또는 뜨거워지고, 풍성해지고, 깨끗해지고, 긴장하게 되는 재미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 착해지고 진실해지고 순화되는 데서 느끼는 기쁨이라 하겠다. (273쪽)
일기장을 ‘검사’한다는 말은 아주 나쁜 말이다. 검사할 것이 아니라, 읽어서 아이들의 마음과 생활과 가정환경을 알고 깨달아 교사가 배우는 것이다. (306쪽)
아이들의 글은 아이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을 자기 말로 정직하게 쓴 것이다. 그러니 글이 있기 전에 말이 있었고, 말이 있기 전에 삶이 있었던 것이다. ‘삶→말→글’이지, ‘글→글’이 아니며, 삶이 없이 글은 써질 수 없다. (343쪽)
살아서 싱그러이 숨쉬는 말을 글로 옮겨 봅니다. 꾸미지 않는 마음을 글로 담아 봅니다. 겉치레가 아닌 속가꿈이라는 생각으로 말 한 마디를 글 한 줄로 가만히 그려 봅니다.
착한 길을 걸으려는 뜻으로 글을 씁니다. 꼭 시나 수필 같은 갈래에 들지 않더라도 오늘 하루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씁니다. 대단한 문학이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 하루 새로 지은 살림을 일기로 꾸준하게 적어 봅니다.
삶이 말이 되고, 이 말이 글로 되는 흐름을 되새깁니다. 나한테 없는 모습이 아닌 나한테 있는 모습을 스스럼없이 바라봅니다. 어제를 되짚으면서 오늘을 씩씩하게 가꾸려는 마음이 글꽃으로 피어나도록 담금질을 합니다.
작은 들꽃을 마주하면서 기쁨을 배우기에 들꽃 이야기를 씁니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가로지르는 구름과 제비와 왜가리를 바라보기에 구름과 제비와 왜가리 이야기를 씁니다. 아이를 돌보며 짓는 보금자리를 즐겁게 맞아들이면서 아이 이야기를 씁니다. 삶을 글로 쓰고, 살림을 글로 씁니다. 생각을 글로 쓰고, 사랑을 글로 씁니다. 서로 아끼는 기쁨을 글로 쓰고, 서로 나누는 웃음을 글로 씁니다. 서로 짓는 노래를 글로 쓰고,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글로 씁니다. 오늘 이곳에서 작은 별님처럼 새로 태어나는 글 한 줄입니다. 2017.6.6.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이오덕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