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말) “삶을 읽는 눈”이라는 이름으로, 제가 살아온 이야기와 살아갈 이야기를 적어 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집 아이들한테 물려줄 제 이야기이면서, 제 둘레에서 살아가는 여러 이웃님이 저한테 궁금해 하는 대목을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부디 우리 젊거나 푸르거나 어린 이웃님이 씩씩하고 튼튼하고 사랑스럽고 넉넉하고 따사로운 마음결로 삶을 읽고 보고 느끼는 꿈을 키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글은 포항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젊은 이웃님이 편지로 물어본 이야기가 있어서, 그 물음에 대답을 공개편지로 띄웁니다.
어떻게 그 길을 갈 수 있나요
[삶을 읽는 눈] 뜻·꿈·사랑을 스스로 짓기
저는 1988년에 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가기 앞서 둘레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국민학교에서도 한 살 위인 언니한테 말을 놓았다가는 곧장 주먹이 날아왔습니다만, 중학교에서는 한 살 위라면 꼬박꼬박 높임말을 써야 한다고 했어요. 교사보다 선배가 더 무섭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들어간 중학교는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구석진 곳에 있었어요. 선배라고 할 이들이 ‘선배 없이’ 학교를 다니는 데에 익숙하다 보니 3회째로 들어간 우리(후배)를 그리 닦달하지 않았습니다. 귀여워했지요. 이와 달리 또래는 무척 거칠었엉요. 툭하면 싸움이고 걸핏하면 거친 말이나 주먹이 춤추었습니다.
사내만 모아 놓은 중학교는 날마다 몇 차례쯤 주먹다짐이 있지 않고서야 하루가 지나가지 않습니다. 어디에선가 누가 맞고 누가 때리고 책걸상이 날아다니고 밀걸레가 춤추었어요. 다들 바보스럽네 하는 생각이었는데, 그렇다고 이 중학교를 뛰쳐나갈 만큼 씩씩하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끝무렵에 중학교만 마치고는, 아니 중학교를 그만둔 ‘국졸’ 가방끈으로 무슨 일을 하며 돈을 벌며 살아갈 만한지 알 길이 없었어요.
날마다 싸움판이던 중학교를 가까스로 마친 뒤 고등학교에 가는데, 고등학교도 새로 생긴 곳입니다. 우리 형이 1회로 이 학교를 마쳤고 사촌 형이 2회 선배로 다닙니다. 저는 4회 새내기로 들어갑니다. 1회 2회 선배가 한집 사람으로 버젓이 있는 터라 중학교 적하고 대면 아주 조용합니다. 그렇지만 답답한 가슴은 엇비슷해요. 오직 대학입시만 바라보는 중·고등학교에서는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갈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배울 틈도 나지 않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쳇바퀴질입니다.
1980년대가 저물며 1990년대로 접어들지만, 아직 군사독재자가 대통령 자리에 있던 무렵이에요. 사회는 아프면서 어수선하고, 학교도 아프면서 어지럽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어떻게 이 고등학교를 그만두며 혼자 조용히 살 수 있나?’ 하는 생각에 늘 젖어들었습니다. 우리 어버이가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분이었으면 굳이 학교를 안 다니고 흙살림으로 살아갈 만하지 않았나 하고도 생각했어요. 그러나 도시에서 나고 자란 몸으로 어느 시골에 어떻게 가야 하는가를 하나도 알 길이 없고, 이를 여쭐 어른도 없습니다. 담임 교사하고 진로 이야기를 할 적에 꼭 한 번 ‘농부’가 되는 길을 꺼내 보았다가 “농대 가려고? 거긴 뭣 하러 가?” 하는 소리에 다시는 ‘농부’ 되는 길을 입밖으로 내지 않았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저로서는 1994년에 처음 발을 디딘 대학교를 첫날부터 ‘이런 곳은 더 다닐 까닭이 없이 돈도 시간도 아깝다. 얼른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할 씨앗이 마음속에서 자랐다고 할 만해요. ‘새내기 새로 배움터(이무렵에 이런 말이 생겨서 대학교마다 퍼졌습니다. 줄여서 ‘새터’라고들 했습니다)’를 한다며 처음 대학교에 갔더니, 이날부터 술을 얼마나 무섭게 먹이던지요. 대학교에 첫발을 디뎠으니 ‘가볍게 소주 한 병을 대접이나 주전자에 가득 부어 한칼에 비우라’고 하네요.
한 번만 치르면 되겠거니 하고, 이런 짓을 받아들였더니, 이튿날에도 다음날에도 이런 술자리는 이어집니다. 학기를 연 뒤로도 날이면 날마다 선배들은 새내기 대학생을 술자리로 이끕니다.
어디에서 어떤 돈으로? 이렇게 저녁 너덧 시부터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면서 어떤 공부를? 이러면서 책을 한 권이라도 읽나?
1994년 한 해 동안 선배가 날마다 마련하는 자리에 한 번도 안 빠지고 나가 보았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한 해를 치러 보자는 생각이 있었어요. 12월 31일까지 날마다 끝없는 술자리를 징하게 치르고 나서 1995년부터는 모든 술자리를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술자리에 가도 물만 한 모금 마시고 술상(술집이니까요)에 책을 척 올려놓고서 읽었습니다. 1995년 이해에는 집을 나와서 신문사 지국에서 먹고자면서 신문배달로 살림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새벽에 신문을 돌리려니 술을 마실 수 없기도 했어요. 신문배달은 술자리에서 빠져나오는 좋은 핑계였어요.
이렇게 하며 1995년 11월에 군대에 스스로 들어갔고, 1997년 12월 31일에 사회로 돌아왔으며, 1998년 한 해 동안 대학교에서 부전공으로 신문방송학 과정 네 해치를 몽땅 듣고서 아쉬움 없이 자퇴서를 냈습니다. ‘고졸’이 되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길을 어떻게 걸을 수 있었을까요?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네, 두려움은 따로 없었습니다. 중학교를 다니며 교실이며 운동장이며 어디에서고 주먹다짐이나 거친 말이 춤추더라도 ‘내가 내 마음과 말을 지키자’고 생각했습니다. 그 흔한 ‘○8’이라는 말을 한 번도 안 썼어요. 고등학교 세 해를 다닐 적에도 그 흔한 ‘개○○’라는 말을 혀에 한 번도 안 얹었어요. 같은 물에 섞이려는 마음이 없으니 누가 무어라 하든 한귀로 흘릴 수 있었어요. 내 입에서는 “그래? 그러냐? 그렇구나.” 하는 말만 흘렀어요.
비록 우리 어버이한테서 자급자족을 배우지 못했고, 흙살림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만, 돈이나 땅뙈기 하나 없는 몸이었으나, 저한테는 꿈이 있었어요. 제 몸뚱이조차 그리 안 튼튼하고 오랜 병을 마흔 살까지 달고 살기도 했습니다만, 이러거나 저러거나 저 스스로 이루려고 하는 뜻이 있었어요. 바로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입니다.
어른이 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 하고 늘 생각하고 찾아보았어요. 어른이 되어 아이한테 삶을 물려주거나 보여주거나 가르치려면 스스로 어떻게 거듭나야 하는가 하고 언제나 돌아보고 살폈어요. 오늘은 어설프거나 엉성하더라도 이튿날에는 조금씩 나아지면서 새롭게 태어나자고 생각했어요.
어느 분은 저한테 “그대가 살아온 길은 ‘세상 기준하고 하나도 안 맞아’”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대는 그렇게 살았어도 다른 사람더러 그렇게 살라고는 못 해.” 하고 말할 수도 있어요. “그대가 그렇게 사는 일은 그대 자유인데, 그게 돈이 되나?” 하고 물을 수도 있지요.
그런데 있지요, 저는 고졸 가방끈이지만 1999년 여름에 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뽑혔습니다. 스물다섯 살 일입니다. 2001년 1월부터는 ‘국어사전 짓는 편집장’ 일을 맡았습니다. 2003년 9월부터는 ‘돌아가신 이오덕 님 유고와 원고 정리 책임자’ 일을 했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 강사 노릇도 했고, 한글학회에서 ‘공공언어 순화 작업’을 할 적에 이러한 일을 업무책임자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6년에는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같은 한국말사전 한 권을 혼자 써내기도 했어요.
젊은 대학생 눈으로 보기에 아직 사회살이가 두렵거나 까마득하다고 느낄 수 있어요.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벌어야 집삯을 내고 살림돈을 댈 수 있다고 여길 수 있어요. 돈이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리라 생각할 수 있어요.
틀린 생각은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 삶은 언제나 우리 ‘뜻’하고 ‘꿈’이 가장 밑바탕이라는 대목을 헤아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 삶은 우리가 스스로 ‘사랑’할 적에 즐거울 길을 씩씩하게 찾아낼 수 있다고 알아채면 좋겠어요.
우리 길은 남이 알려주지 않아요. 스스로 생각을 기울여서 수수께끼를 풀어야 우리 길을 찾아내요. 우리가 스스로 수저를 들어 밥을 떠먹어야 배가 부르듯, 우리가 스스로 생각을 지어 삶을 이끌어야 꿈이나 뜻을 시나브로 이루어요.
저는 갓 스물이 넘을 무렵 ‘스무 살까지 학교를 다니며 배운 모든 것은 아무 쓸모가 없네’ 하고 느꼈어요. ‘스무 살까지는 학교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을 쓸모없이 가르쳤구나 하고 몸으로 아로새긴 나날이었네’ 하고도 느꼈어요.
저로서는 스무 살 적부터 0살이라고 생각했어요. 스무 살 나이를 모두 버리고, 그때부터 스스로 0살이니 처음부터 모조리 새로 하자고 다짐했어요. 남이 알려준 책이 아니라, 스스로 도서관하고 새책방하고 헌책방에 파묻혀서 책시렁에 가득 꽂힌 수많은 책을 통째로 읽어내자는 마음으로 날마다 새로 배우며 살았어요. 1994년에 0살인 셈이니 2017년은 스물세 살인 셈일까요? 이제 겨우 스물세 해째 삶을 배우는 셈이라고 할 만해요.
사회가 일그러졌다고 느낀다면 이 일그러진 사회를 펴려고 애쓰면 된다고 생각해요. 또는 스스로 이 일그러진 사회에서 뛰쳐나와 새로운 사회를 짓는 길을 걸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우리 이웃님한테 이야기해 주고 싶어요. 이제껏 몸으로 먹은 나이를 모두 털어내자고요. 우리 모두 0살이라는 마음으로 새롭게 한 걸음씩 내딛으면서 차근차근 다시 배우자고요. 이렇게 해 보면 되어요. 두려움이나 걱정을 마음에 심지 말아요. 즐거운 뜻과 기쁜 꿈을 고운 사랑으로 심어요. 둘레에서 부는 바람에 휩쓸리지 말고,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을 읽어 봐요. 2017.5.23.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