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2월
평점 :
책읽기 삶읽기 306
고정희 시를 아무리 읽어 줘도 안 바뀌더라는
―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글
서해문집 펴냄, 2016.12.26. 13500원
글을 쓰는 ‘은유’ 님은 ‘고졸’이라고 합니다. 고등학교만 마친 배움길로 글을 쓰는 일을 하는 분은 매우 드뭅니다. 은유 님은 이녁 둘레에서 고등학교만 마친 배움길로 글을 쓰는 이웃이나 벗을 못 보았다고 해요.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만 마친 배움길로 한국말사전을 짓는 일을 합니다. 한국말사전을 짓는 일을 하든 국립국어원이나 한글학회에서 일을 하든, 고등학교만 마친 배움길로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이웃이나 벗은 아직 못 보았어요.
어느 일이든 스스로 즐겁게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한국 사회는 이 대목이 크게 가로막히지 싶어요. 적어도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일자리를 얻을 만하리라 여깁니다. 공공기관이나 여느 회사에서도 웬만하면 대학교 졸업장을 바라지요.
여의도에서 잠실로 남편과 같이 출퇴근하면서 차 안에서 여성주의 책들과 고정희의 시집을 소리내 읽어 주었다. 일상의 불평등 구조는 해소되지 않았다. 이론의 주입은 가능하나 감각의 세팅은 불가능했다. 두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었다. (5쪽)
박 대통령이 세월호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애를 안 낳아 봐서가 아니라 해결하지 않아도 권력을 유지하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권력을 떠받치는 것은 나쁜 관념에 휩싸여 주변의 여린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주변 사람들이다. (32쪽)
은유 님은 고등학교 가운데 ‘여상’을 나와서 돈을 꽤 잘 버는 금융기관에서 처음 일자리를 얻었다고 해요. 이렇게 살다가 마음에 드는 짝을 만났고, 혼인을 합니다. 아이를 낳았지요. 고등학교만 마친 뒤에 금융기관에 일자리를 얻어서 돈을 제법 잘 벌 적에는 어렵거나 싸워야 할 일이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는 길에서, 이러면서 새로운 삶길을 열려고 할 적마다 늘 싸울거리를 만나야 했다고 해요.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서해문집,2016)라는 책은 글님(글을 쓰는 사람)인 은유 님이 글을 쓰며 살림을 짓는 ‘고졸자’이자 ‘가시내(어머니이자 직업여성)’로서 언제 어떻게 왜 싸워야 했고, 이렇게 싸우면서 걸어온 길이 무슨 뜻이었는가 하고 스스로 묻고 우리한테 묻는 이야기책입니다. 한 마디로 ‘싸울 수밖에 없는 나라에 태어나 싸우면서 살아야 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책입니다.
김제동의 말은 여성을 치켜세우고 남자를 비하하는 듯하지만 아니다. 한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한 우주를 헤아리는 일이다. 친밀성 능력, 정서적·육체적 노동이 다 투여된다. 두 사람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왜 한쪽이 도맡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가족도 학교도 못한 ‘사람 만들기’를 한 개인이 할 수 있을까. (42쪽)
어느 남성 평론가의 평론집을 읽었는데 서문 마지막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어머니가 해 주신 밥 먹으면서 이 글들을 썼다. 어머니가 쓰신 책이므로, 어머니께 드린다.” 참으로 뻔하고 오래된 각본처럼 진부했다. 어머니를 밥하는 존재로 못 박는 듯해 갑갑했다. 칠백 쪽이 넘는 두툼한 책의 현란한 문학적 수사와 이론적 분석의 글에 압도될수록 나는 어머니의 밥이 떠올랐다. 한 사람이 이 정도 지적 과업을 달성하기까지 동시간대에 이루어졌을 칠백 그릇 이상의 밥을 지은 한 사람의 ‘그림자 노동’이 아른거렸다. (65쪽)
은유 님 곁님은 은유 님이 고정희 시를 읽어 주거나 여성주의 책을 읽어 주어도 ‘이론(머리)’으로만 받아들였다고 해요. 몸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지요. 이러다 보니 아무리 사랑스러운 곁님이어도 싸울 일이 있을밖에 없습니다.
여성주의나 성평등이란 어느 한쪽 성별인 사람을 높이려고 하는 몸짓이 아니에요. 서로 손을 맞잡는 길을 찾고, 즐거이 어깨동무하며 나아가는 길을 열려는 몸짓이에요.
아무리 진보나 노동을 말하더라도, 생태나 평화를 말하더라도, 적잖은 사내는 가부장 권력을 잘 못 놓곤 합니다. 이 대목은 이 나라 사내들이 곰곰이 돌아보고 차분히 되새기면서 슬기롭게 풀어낼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머리로만 진보나 평등이 아니라, 몸으로 즐거이 움직일 줄 아는 진보나 평등이 될 때에 아름다워요.
아름다움이란 겉모습이 아니에요. 잘 빠진 몸매는 ‘아름다움’이 아닌 ‘잘 빠진’ 몸매일 뿐입니다. 아름다움이란, 서로 사랑으로 보살필 줄 아는 따사로우면서 넉넉한 마음이 착하게 흐르는 숨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보나 평등이 아름다운 길로 갈 적에 여성도 남성도 서로 사람으로서 즐거이 어깨동무할 만하리라 생각해요.
난생 처음 군부대라는 곳을 들어갔다 … 사격 훈련장이 보였다. 우리 아이도 저런 걸 하겠구나. 총은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도구인데 내 아이에게 총을 들라고 떠밀은 걱구나. 그제야 실감 났다. (107쪽)
고졸의 불편을 느낀 건 결혼할 때였다. 시가에서 노골적으로 내 학력을 문제 삼았다. 2세를 생각하면 엄마 머리가 좋아야 한다면서 … 그때부터 유심히 지켜봤다. 지나가는 말로라도 학벌 중심 사회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거의 고학력자였다. 학벌 중심 사회를 비판하면서 학벌 중심 사회를 공고화했고 그 틀을 깨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113, 114쪽)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김제동과 어느 남성 문학 평론가를 짚으며 나무라기도 합니다. 김제동 님은 방송에 나와서 ‘(여성은) 너희들보다 훨씬 더 상위에 있는 종족들이에요’라든지 ‘여자들이 불쌍한 남자 좀 잘 보살펴 줘요’라든지 ‘남자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개라고 생각하면 싸울 일이 전혀 없습니다’ 같은 말을 흔히 한대요. 은유 님은 이러한 말을 들으며 몹시 거북했다고 합니다. 어느 모로 보면 익살을 섞은 말이지만, 어느 모로 보면 ‘사내 스스로 사내를 깎아내린들 평등을 이루지는 못하’거든요.
아무리 적잖은 사내들이 진보나 평등을 몸이 아닌 머리로만 생각하는 데에서 그친다 하더라도, 이러한 사내를 ‘가시내가 잘 보살펴’ 주기만 해야 할 노릇인지는 곰곰이 따져야지 싶어요. 사내 스스로 ‘나(사내)는 개야. 그러니 나는 엉터리 짓을 함부로 하겠어.’ 하고 생각해 버리지는 않을까요? ‘나(사내)는 개야. 그러니 이론밖에 몰라. 게다가 이론도 잘 몰라.’ 하면서 스스로 배우려는 길을 닫아 버리지는 않을까요?
사내도 가시내도 똑같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대목을 생각해야지 싶어요. 사내도 가시내도 똑같이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배움길을 걸어야지 싶어요. 이런 테두리에서 은유 님은 수많은 ‘진보 남성’하고 ‘평등을 외치는 남성’이 놓치는 대목을 짚으려 합니다.
사는 게 총체적으로 낭비라는 걸 인지하지 못할 때는 살림만 미워했다. 살림이, 정확히 가사 노동이 지겹고 하찮게 느껴져서 제발 집안일 안 하고 살길 간절히 염원했다. 지금은 아니다. 좀 나아졌다. 콩나물을 다듬고 깻잎을 씻고 쌀을 씻으면서, 땅에서 난 그것들을 만지면 마음이 순해지고 위로를 얻는다. (285쪽)
요즈음 저희 집에서는 아이들이 날마다 여러 가지 새로운 살림을 배웁니다. 예전부터 늘 배우곤 했는데, 한 해 두 해 나이를 더 먹으며 팔다리에 힘이 더 붙으니 더 즐겁게 여러 살림을 배웁니다. 두 아이는 곁님한테서 빵 반죽을 배웁니다. 두 아이는 아버지한테서 밥짓기를 배웁니다. 두 아이는 곁님한테서 뜨개질을 배웁니다. 두 아이는 아버지한테서 빨래이며 청소이며 톱질이며 못질이며 배웁니다. 두 아이는 어버이하고 나란히 살림을 새로 배우면서 새로 맞아들입니다.
아이들한테 여러 가지 살림을 보여주고 가르치면서 생각해 보지요. 온누리 모든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스스로 먹고 입고 자고 살아가는 길’을 차근차근 지켜보고 배울 적에 ‘사람다운 숨결로 사내와 가시내 자리에 설 수 있구나’ 싶어요. 손수 밥을 지을 줄 모른다면, 손수 밥상을 치우거나 차릴 줄 모른다면, 손수 설거지나 빨래를 할 줄 모른다면, 손수 나무를 켜고 자르고 맞추며 살림을 마련한 줄 모른다면, 손수 씨앗을 심을 줄 모르거나 호미질을 할 줄 모른다면, 이 아이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며 어떤 자리에 설까요? 아마 ‘이론은 있되 몸은 안 움직이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를 쓴 은유 님이 따갑게 나무란 어느 남성 평론가 이야기처럼, ‘밥을 차려 준 어머니가 고맙다’고 말하는 사내가 아닌, ‘스스로 즐거이 밥을 지어 먹었다’고 밝히면서 ‘스스로 밥을 지어 먹고 보니 글이나 책이나 삶이나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더라’ 하는 이야기를 펼칠 줄 알면 좋겠어요.
스스로 살림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이를 글로 펼친다면, 스스로 살림하는 보람을 나누면서 이러한 마음으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한다면, 우리는 굳이 고정희 시를 읽어 주지 않고도 성평등이나 진보를 아름다이 이루는 나라에서 살아갈 만하지 싶습니다. 우리 아이들한테 입시 참고서나 문제집은 그만 보여주고 살림을 보여주어야지 싶습니다. 우리 어른들도 이론만 잔뜩 다룬 책은 고이 내려놓고 기쁘게 살림을 지어 보아야지 싶습니다. 2017.5.22.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