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선 한 켤레



  구멍난 양말을 한 켤레 기웁니다. 아이들이 놀다가 아버지가 바느질을 하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 양말 기워?” 하고 묻습니다. “응.” 뒷꿈치에 난 구멍을 기우는데 몇 분쯤 걸리려나 하고 어림해 봅니다. 십 분 만에 기운다고 하더라도 ‘시간 노동’으로 치면 새 양말을 장만하는 쪽이 ‘돈이 적게’ 든다고 할 만합니다. 요새는 양말 한 켤레에 천 원도 하고 오백 원도 하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돈으로만 쳐서 새 양말을 장만하면 쓰레기가 늘 테지요. 더 따진다면 양말을 사려고 움직이는 길이나 품을 돈으로 치면 천 원이나 오백 원만 들지 않아요. 더 들겠지요. 두 짝을 다 기울 무렵 다른 생각도 듭니다. 어릴 적에는 누구나 양말을 기워서 신었어요. 구멍 안 난 양말을 신는 동무는 찾아볼 수 없었어요. 기운 자국 없는 양말을 신는 동무도 찾아보기 어려웠어요. 열 살 나이쯤 되면 구멍난 양말은 스스로 기워 신으라 했어요. 그런데 양말은 왜 양말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발을 감싸는 천이라면 ‘버선’이라는 낱말이 버젓이 있으니까요. 버선이라는 낱말을 안 쓰고 굳이 양말이라는 낱말을 쓰는 한겨레는 스스로 제 말을 아끼지 못하거나, 오래도록 즐겁게 쓰던 말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살찌우는 길은 헤아리지 못하는 셈일 수 있다고 느낍니다. 2017.1.12.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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