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노래
파블로 네루다 지음, 고혜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노래하는 말 265



추위에 지지 않는 민들레 같은 중남미 역사

― 모두의 노래

 파블로 네루다 글

 고혜선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6.8.5. 22000원



  민들레가 꽃을 피우는 자리를 가만히 살펴봅니다. 겨울 추위가 닥칠 무렵부터 민들레는 아주 조그맣게 잎을 내밉니다. 한겨울에도 어느새 잎을 제법 넓게 내놓아요. 이러다가 겨우내 눈을 맞고 추위에 떨기도 하지만, 일월하고 이월이 지나면 외려 더 푸르게 빛나고, 삼월 즈음부터 꽃대를 올려 사월에도 오월에도 유월까지도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곤 합니다.


  십일월로 접어든 이즈음 우리 집 뒤꼍 한쪽에서 잎을 제법 넓게 벌린 흰민들레를 바라보면서 《모두의 노래》(문학과지성사,2016)라는 시집을 생각합니다. 파블로 네루다 님이 빚은 이 시집은 칠레라는 나라뿐 아니라, 중남미 모든 나라를 아우르는 기나긴 삶과 발자국과 사람 이야기를 다룹니다. 시 한 줄로 중남미 역사를 아로새겨요.



비오비오 강아 내게 말하려무나. / 내 입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것은 / 바로 너의 말들이다. 너는 내게 / 말을 주었고, 비와 나뭇잎이 / 엉켜진 밤의 노래를 주었다 (35쪽)



  민들레는 뿌리가 깊기로 이름이 높습니다. 민들레 줄기를 꺾어도, 누군가 군홧발로 민들레잎을 짓이겨도, 깊이 박은 뿌리는 씩씩하게 다시 줄기를 올리고 잎을 내놓아요. 밟히고 또 밟혀도 민들레는 사그라들지 않아요.


  어쩌면 밟히면 밟힐수록 더욱 기운을 내는 민들레일 수 있어요. 이처럼 중남미 사람들 발자국도 ‘서양 제국주의 군대’ 군홧발에 짓밟히고 짓이기면서도 꺾이거나 시들거나 주눅들지 않은 모습이었다고 할 만해요. 총칼에 아파하고, 총칼에 스러지기도 하며, 총칼에 눈물젖기도 하지만, 모진 추위를 이기고 하얗게 꽃을 피우는 민들레마냥 다시 웃음꽃으로 일어서는 사람이 바로 ‘민중’이라고 할까요.



코르테스에게는 고향이 없다. 차가운 번개. / 갑옷 속에 죽은 심장을 가진 사내. / “폐하, 옥토와 / 금 박힌 신전이 / 인디오의 손에 있나이다.” (80쪽)


그들은 스스로를 애국자라고 칭했다. / 클럽에서는 서로 훈장을 수여하고 / 역사책을 써 나갔다. / 의회는 칭찬 일색이었고, / 그 후에는 땅, 법 / 가장 좋은 길, 공기, / 대학, 구두를 / 나눠 가졌다. (289쪽)



  시집 《모두의 노래》는 책이름처럼 “모든 이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누구나 부르는 노래”입니다. 너랑 내가 서로 이웃이자 동무가 되어 부르는 노래입니다. 꺾이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꺾지도 않는 따사로운 손길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살가이 어깨를 겯으면서 수수하게 살림을 짓는 작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 땅에 뿌리박은 민들레 꽃송이처럼, 이 땅에 뿌리박은 사람들이 곱고 정갈하게 가꾸는 보금자리에서 피어나는 노래입니다.



형편없이 살았습니다. 쓰러져가는 집에 / 또다시 찾아온 배고픈 시절, 선생님. / 우리가 월급 1패소만 올려달라고 / 모이면, 선생님. / 경찰은 몽둥이, 불, 붉은 바람에, / 구타까지 했지요 / 그래서 저는 직장에서 / 해고되었습니다. (437쪽)


“어머니, 그분은 우리와 / 같은 가난한 분이에요. 그분은 우리의 / 헐벗은 삶을 조롱하지도, 비웃지도 않아요. / 그분은 그런 생활을 치켜세우고, 보호하세요.” /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그렇다면 / 오늘부터 이 집은 그분의 집이다.” (492쪽)



  외교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시인으로 삶을 지은 파블로 네루다 님은 ‘이웃’을 바로 곁에 둡니다. 저기 권력자나 벼슬아치 곁에 이웃을 두지 않아요. 흙을 두 손으로 만지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두어요. 기름밥을 먹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두어요. 지붕이 낮은 집에서 옹기종기 살림을 가꾸는 사람들을 이웃으로 두어요.


  이리하여 시집 《모두의 노래》는 중남미 사람들이 서로서로 부를 수 있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웃을 아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평화를 바라는 노래요, 민주와 평등을 바라는 노래입니다. 기쁨과 웃음을 바라는 노래요, 사랑과 아름다움을 바라는 노래예요.



영원한 젊은이, 시골 사람, / 밀과 봄의 씨앗이 넘치는 사람, / 순수한 광물처럼 주름지고 어두운 존재, / 너의 갑옷을 올려줄 시간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 (556쪽)


내 노래의 영역은 인간의 / 공통 책, 열린 빵이다. / 어떤 때 그 불을 모아 / 대지의 배에 다시 한 번 / 그 불꽃을, 그 잎을 심으리라. // 다시 이 말이 태어날 것이다. / 어쩌면 다른 시절에는 고통이 없이, / 내 노래에 검은 식물을 붙이는 / 불순한 실도 없이, / 다시 한 번 저 높은 곳에서 내 마음은 / 불타며 별에 부딪치며 타오를 것이다. (696쪽)



  권력자는 두 손에 권력을 거머쥐려 하면서, 이 권력으로 더 센 권력을 드높이려 합니다. 더 센 권력으로는 더 많은 돈을 가로채려 합니다. 더 많은 돈을 가로챈 뒤에는 더 으리으리한 이름을 드날리려 합니다.


  칠레뿐 아니라 중남미에 한때 들어섰던 ‘독재 권력자’는 ‘독재를 찬미하는 교과서’를 써서 그 나라 아이들한테 억지로 가르치려 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뜬금없는 국정 역사교과서’로 말썽이 생겨요.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교과서를 쓸 수 있어요. 국정교과서가 나쁠 까닭은 없어요. 그렇지만 ‘흙을 만지는 수수하고 작은 사람들 눈길에서 평화롭게 사랑을 가꾸려는 살림을 노래하려는 이야기’를 담는 교과서가 아니라면, 그만 독재 권력에 기울어지고 말기 일쑤예요.


  바람을 먹고 한결 새하얀 민들레꽃처럼 겨울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더욱 씩씩한 사람들 이야기가 《모두의 노래》에 흐릅니다. 겨울에도 햇볕 한 줌을 받으며 푸르게 잎을 내놓는 민들레처럼 이 겨울에 포근히 어깨동무를 하는 수수하고 투박한 사람들 이야기가 마치 꽃처럼 흰꽃처럼 들꽃처럼 도란도란 피어나는 《모두의 노래》입니다. 2016.11.8.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