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문턱을 넘어 보지 않았다면



  강은교 님 시집이나 수필책을 제법 읽었다고 여겼는데, 막상 강은교 님이 한창 젊은 날에 뇌출혈로 죽음 문턱을 오갔다는 대목은 이제서야 처음으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아니, 예전에 읽은 적이 틀림없이 있을 텐데, 까맣게 잊었다고 해야 맞지 싶어요.


  강은교 님은 아기를 밴 몸으로 뇌출혈로 이녁뿐 아니라 아기까지 죽음 문턱을 오갔다고 하니 얼마나 아프고 힘든 나날이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나는 오늘 《벽 속의 편지》라는 묵은 시집을 비로소 읽었습니다. 어두컴컴한 시외버스에서 큰아이는 왼쪽에서 자고, 작은아이는 오른쪽에서 내 어깨에 기대어 자는 동안, 눈을 밝히며 읽었지요. 이 시집에 추천글을 써 준 분이 붙인 글에서 ‘죽음 문턱을 넘나들다가 일어선 이야기’를 보았어요. 그리고 생각해 보았지요. 죽음 문턱을 넘어 보지 않았다면 삶을 얼마나 말할 수 있을까 하고요. 아마 그때에는 그때대로 삶을 말하겠지요. 깊이가 있든 없든, 너비가 있든 없든, 그냥저냥 그 결대로 삶을 말하겠지요. 죽음 문턱을 넘나들어 본 삶을 누린 이라면 이녁은 이러한 삶길대로 ‘삶하고 죽음을 새롭게 바라보는 숨결’로 삶을 말할 수 있을 테고요. 그러나 죽음 문턱을 넘어 보았대서 삶을 꼭 새롭게 바라보면서 말할 수 있지는 않다고 느껴요. ‘나 스스로 넘어 본 죽음 문턱’을 깊이 돌아보고 헤아리고 생각할 때에 비로소 삶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말할 만하다고 느껴요.


  나는 내가 겪은 ‘죽음 문턱 넘나들기’를 돌아보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죽음 문턱에서는 ‘시간이 없’고 ‘공간이 없’어요. ‘때와 곳이 하나도 없’어요. 때와 곳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아주 다른 테두리(차원)예요. 죽음 문턱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아주 짧은 동안에, 그렇지만 때와 곳이 없기 때문에 아주 느긋하게, 참말로 모든 것을 넉넉히 바라본 뒤 깨닫고 배워서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 문턱에서 빠져나와 삶자리로 돌아가려고 할 적에 ‘죽음 문턱에서 보고 깨닫고 배운 모두 다 잊거나 잃을’ 수 있어요.


  죽음 문턱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제대로 생각하지 않던 지난날 《벽 속의 편지》라는 시집을 읽었다면 나는 아마 이 시집이 영 재미없네 하고 여겼을 만하다고 느낍니다. 그렇다고 이제는 더 재미있게 읽는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오늘 나는 두 아이를 시외버스에서 새근새근 재우면서 이 시집을 읽는 동안 빙그레 웃었습니다. 2016.9.19.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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