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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희디흰 눈속 같은 세상 - 성원근 유고시집 ㅣ 창비시선 146
성원근 지음 / 창비 / 1996년 2월
평점 :
품절
시를 노래하는 말 251
하늘에서 바람으로 만나는 작은 유고시집
― 오, 희디흰 눈속 같은 세상
성원근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6.2.28. 3500원
1958년에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고, 1977년에 대학교에 들어가서 1985년에 비로소 마친 뒤, 1989년에 혼인한 다음, 1991년에 아들을 낳고, 1992년에 대학원을 마치고 시인으로 등단을 하고는, 1993년에 악성골육종 진단을 받고 암하고 싸우다가 1995년에 고요히 숨을 거둔 사람이 있습니다. 이녁은 1994년에 대학교에서 첫 강의를 하기도 했다는데, 고작 한 해도 제대로 가르치기 어려운 몸으로 이 땅에 스러졌다고 합니다.
이녁은 가슴에 품은 이야기를 틈틈이 시로 적어 놓았고, 이 시 꾸러미를 엮어서 1996년에 조그마한 시집으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젊은 나이에 하늘로 가면서 언제까지나 젊은 마음인 시인으로 남을 성원근 님 이름으로 나온 유고시집 《오, 희디흰 눈속 같은 세상》(창작과비평사,1996) 이야기입니다.
그날, / 하늘이 맑을 때, / 노래가 생겼다. / 그날 감람산에 오르면 / 하늘을 볼 것이다 (하늘)
한장의 땅과 / 한겹의 하늘이 있으면 / 내 잠자리는 편안하다. // 땅은 땅으로 / 하늘은 하늘로 곧 / 그만인 것을. (물 흐르듯이)
성원근 님이 남긴 시를 읽으면 ‘산’과 ‘하늘’과 ‘바람’ 이야기가 잇달아 나옵니다. 시인 스스로 ‘이 땅에 오래 머물지 않고 저 하늘로 곧 날아가’리라 느꼈기 때문일까요. 어릴 적부터 이 땅에서 저 하늘을 그리는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일까요.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시집을 읽습니다. 2016년 여름에 전남 고흥에는 빗줄기가 거의 안 들고 내내 땡볕이었습니다. 구월로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빗줄기가 드는데, 이 빗줄기는 몹시 거셉니다. 석 달 동안 마른 못을 한꺼번에 채워 주려는 듯이, 석 달 내내 가늘게 흐르던 골짝물이 잔뜩 붇도록 하려는 듯이, 구월비가 참으로 세찹니다.
그런데 이 거세가 세찬 빗줄기가 쏟아지는 날, 아이들은 비를 맞으면서 놉니다. 우산을 받다가 우산을 치웁니다. 비옷을 입다가 비옷을 벗습니다. 아이들은 시골집 마당하고 고샅에서 마음껏 비를 맞으면서 뛰고 달립니다.
시골비는 맞을 만하지 하고 생각하다가, 나도 어릴 적에, 그러니까 이 아이들만 하던 날에 으레 비를 맞으며 놀았다고 떠오릅니다. 비를 맞으며 공을 차고, 비를 맞으며 술래잡기를 하며, 비를 맞으며 달리기를 했어요.
댓잎이 흔들린다. / 스치는 바람에 / 눈이 시리다. // 또다시 바람이 불면 / 내가 / 댓잎 되어 스치우리라. (푸른 대숲, 늘 바람 부는)
나는 왜 자꾸만 / 너를 닮아가는 거냐. // 사암길 켜를 벗으며 / 버섯꽃이 피는 / 너의 거친 피부를 (바위와 솔 2)
아무리 거센 비라도 곧 멎어요. 아무리 세찬 비라도 머잖아 그쳐요. 비가 그치면 밀린 빨래를 하고, 이불을 볕에 말릴 테며, 볕을 쪼이는 새로운 놀이를 누려요. 이 비가 지나가면 이 가을에 마을마다 벼베기로 부산해요.
봄에는 싹을 틔우던 볕이 가을에는 열매를 익힙니다. 봄에는 잎이 돋고 줄기가 굵도록 북돋우던 볕이 가을에는 오직 열매와 씨앗이 알차게 여물도록 이끕니다. 가을볕을 쐬는 열매는 아침저녁이 다르게 익어요.
꼭 한 권으로 남는 작은 시집을 베푼 성원근 님이 읊은 노래를 생각합니다. 꼭 한 번 열매를 맺은 작은 시집에 흐르는 노래를 생각합니다. 꼭 한 차례 피어난 작은 꽃송이 같은 노래를 생각합니다.
당신은 아는가. / 인간으로 태어나 노래 부르는 인간의 마음을. / 초록의 나뭇잎이 이슬을 달고 / 순금의 햇살 반짝이는 아침이 아니어도 / 억새풀만 우거진 벌판 같은 가슴이어도 / 바람이 부렁왔다 스치고 갈 때마다 / 노래 부르는 마음을. (노래 부르기)
내가 가진 모든 것과 / 네가 가진 모든 것으로써 / 우리 만나지 못한다면 / 우리가 못 가진 그것으로 만나기로 할까. (여백)
시인 한 사람이 채운 자리하고 시인 한 사람이 미처 채우지 못한 자리는 무엇이 될까요. 오늘 하루를 사는 우리가 채우는 자리하고 오늘 하루 우리가 미처 채우지 못하는 자리는 무엇이 될까요. 빗줄기를 가르며 뛰노는 아이들 웃음에는 무엇이 깃들까요. 빗물에 젖은 아이를 씻기고 말려서 입히고 먹이는 어버이 손길에는 무엇이 감돌까요.
하늘에서 바람으로 만나는 작은 유고시집을 책상맡에 놓습니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밥을 짓습니다. 빗소리에 섞이는 밥 끓는 소리를 듣고, 이 소리 사이에 스며드는 아이들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하늘을 가르는 바람이 되는 노래를 듣고, 빗줄기와 햇볕 사이를 넘나드는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를 듣습니다. 2016.9.17.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