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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허만하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8월
평점 :
책읽기 삶읽기 266
십 리 밖 나락 냄새를 맡는 한가을에
― 낙타는 십 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허만하 글
최측의농간 펴냄, 2016.8.12. 12000원
한낮에 돌담을 타고 올라가서 무화과를 땁니다. 큰아이가 아버지 뒤에 서서 소쿠리를 들고 기다립니다. 말벌이 웅웅거리면서 무화과 단물을 핥고 무화과 속살을 파먹습니다. 말벌 날갯짓 소리를 가만히 들으면서 통통한 무화과를 땁니다. 한손에 두 알씩 따서 큰아이한테 건네고, 소쿠리가 그득하게 차는구나 싶으면 그만 땁니다.
새롭게 접어든 구월에 무화과를 따면서 즐겁습니다. 철마다 다른 열매를 땅에서 얻고, 달마다 새로운 열매와 남새를 흙에서 얻습니다. 큼큼 달달한 냄새를 맡으면서 즐거운 선물을 얻습니다.
구월이 깊어지고 시월로 넘어설 즈음에는 온 들판을 채우는 나락 냄새가 고소해요. 이런 나락 냄새는 집에서도 맡습니다. 마을논에서도 나락 냄새가 퍼지고, 먼 들판에서도 바람에 실려 나락 냄새가 흩어집니다. 한가을에는 아마 십 리뿐 아니라 백 리까지도 샛노란 나락 냄새가 두루 퍼지리라 느낍니다.
사막을 가는 낙타는 십 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 이것은 작년 폐암으로 이 세상을 하직한 한 병리학자의 말이다. 그는 나의 스승이었다. 아름다운 말이다. (19쪽)
돌아오면서 시란 이름 없는 일상 속에서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가 사라지는 삶의 번득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7쪽)
병리학 박사이면서 시인이기도 한 허만하(1932년에 태어남) 님이 쓴 산문책 《낙타는 십 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최측의농간,2016)를 읽습니다. 이 산문책은 2000년에 한 번 나온 적이 있으나 널리 읽히지 못한 채 조용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최측의농간 출판사는 이 살가우면서 애틋한 산문책이 새롭게 읽힐 수 있기를 바라면서 새롭게 펴냈다고 합니다. 지난날에는 사랑스러운 손길을 널리 받지 못했어도 이제부터는 사랑스러운 손길을 널리 받을 수 있기를 꿈꾸면서 기쁘게 펴냈다고 합니다.
논리적으로는 날개를 단 천사가 하늘을 나는 쪽이 당연하다. 그러나 어깨에 날개를 달아야만 날 수 있다는 빽빽한 이야기는 정확하기는 하나 자연스럽지는 않다. (139쪽)
정년퇴직은 나에게 나의 시간을 찾아 주었다. 미친 듯이 책을 읽어야지. (194쪽)
사막에서 낙타가 맡는 물 냄새를 헤아려 봅니다. 온통 모래만 보일 법한 사막이지만, 그 사막에서 낙타는 온몸을 곤두세워서 물 냄새를 좇으려 하겠지요. 숲에서는 숲짐승이 저마다 먹이를 찾으려고 무척 먼 데 떨어진 냄새를 좇으려 할 테고요. 새끼를 낳은 짐승이라면 제 새끼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새끼 냄새를 맡으리라 생각해요.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이 아무리 먼 데 있어도 어버이는 아이들 마음을 읽지 싶어요. 아이들도 저희 어버이가 아무리 먼 데를 다녀오더라도 어버이 마음을 읽지 싶고요.
떨어진 자리는 그저 떨어질 자리일 뿐일 테니까요. 사랑하는 두 사람이라면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사랑하는 숨결이 같아요. 가까이에 있기에 더 사랑스럽지 않고, 멀리 있기에 덜 사랑스럽지 않아요. 언제 어디에서나 마음으로 아끼거나 보살필 수 있기에 비로소 사랑이지 싶습니다.
낙타가 물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바탕도 물 한 모금을 온몸으로 바라는 애틋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어버이가 아이를 그리고 아이가 어버이를 그리는 숨결도 서로 살가이 어우러지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 싶어요. 그리고 이러한 사랑처럼 ‘조용히 사라진 책 한 권’을 새롭게 옷을 입혀 되살리려고 하는 책마을 일꾼 손길이 있어서 《낙타는 십 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가 다시 태어날 수 있구나 싶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시인이 탄생한 것은 인간이 최초로 개념을 발견한 그 순간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개념을 발견한 그때가 곧 말이 꿈을 읽기 시작한 그 순간이고, 또 그 순간부터 말은 꿈과 개념이 하나였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숙명의 에너지를 지니게 된 것이라고. (232쪽)
그가 찾아 헤매었던 것은 살며 숨쉬며 있어 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시라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해 본다. (250쪽)
병리학 박사이자 시인인 허만하 님은 ‘산문’을 쓰면서 ‘시’를 노래하려 합니다. 사람들 삶을 밝히는 시 한 줄을 산문 한 줄로 찬찬히 되새기면서 말넋을 헤아리려 합니다. 먼발치에 있는 듯하지만 늘 가까이에 있고, 가까이에 있구나 싶더니 저 먼 데에서 어렴풋하게 번지는 가느다란 물 냄새 같은 시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옹알옹알 말을 새로 익히는 아기는 배냇짓으로 시를 그립니다. 두 다리로 서고, 두 발로 걸으며, 두 팔로 춤추고 뛰노는 아이들은 온몸으로 시를 씁니다. 머리통이 굵고 조잘조잘 떠들 줄 알며 글을 익혀서 혼자 책까지 읽어내는 어린이는 맑은 눈빛과 환한 웃음으로 시를 들려줍니다.
어버이는 밥 한 그릇을 차리는 손길로 시를 보여줍니다. 어버이는 옷 한 벌을 짓거나 손질하거나 빨래하는 손길로 시를 보여줍니다. 어버이는 집살림을 건사하고 집일을 보듬는 손길로 시를 보여줍니다. 호미를 쥐어 밭을 일구는 손길도 시쓰기입니다. 괭이를 쥐어 땅을 갈아엎는 손길도 시쓰기입니다. 마늘을 뽑고 씨감자를 묻으며 고구마싹을 놓는 손길도 시쓰기입니다. 깨를 털고 콩을 훑는 손길도 모두 시쓰기예요.
솔바람 소리가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모래 쓸림 소리를 들으며 나는 지구에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의 바다를 생각했다. 시의 탄생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그것이 번득이는 일순의 계시인지 풀잎에 맺히는 이슬 같은 증류작용의 결과인지는 알 길 없으나, 시는 말을 재료로 하는 끊임없는 새로운 현실 만들기다. (341∼342쪽)
십 리 밖 나락 냄새를 맡는 한가을에 《낙타는 십 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를 읽으면서 시를 생각합니다. 삶을 밝히는 말 한 마디로 짓는 시 한 줄은 우리 가슴을 어떻게 촉촉히 적시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시는 때때로 이슬이 되고 구름이 되며 바람이 됩니다. 시는 때로는 해님이 되고 달님이 되며 별님이 됩니다. 시는 곧잘 꽃이 되고 나무가 되며 풀이 됩니다. 그리고 시는 이 모두가 되어 우리 곁에서 아름다운 말 한 마디로 피어납니다.
시인이기에 시를 노래합니다. 시인이 아니어도 시를 사랑합니다. 시인이기에 시 한 줄을 씁니다. 시인이 아니어도 시 한 줄을 읽습니다. 시인이기에 시집 한 권을 곁에 둡니다. 시인이 아니어도 온마음으로 말넋을 가꾸어 시처럼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가을바람이 싱그럽습니다. 2016.9.6.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