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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서재 - 정여울 감성 산문집, 개정판
정여울 지음, 이승원.정여울 사진 / 천년의상상 / 2015년 2월
평점 :
책읽기 삶읽기 262
한 손은 텃밭 일구고, 다른 한 손은 마음밭 가꾸고
― 마음의 서재
정여울 글
이승원·정여울 사진
천년의상상 펴냄, 2015.2.9. 15000원
시골집에서 귀를 기울이면 새벽부터 밤까지 온갖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여름에는 몇 가지 도드라진 소리가 있으니, 새벽부터 해거름까지 들리는 헬리콥터 소리입니다. 시골에 뭔 헬리콥터 소리가 나느냐 하면, 나날이 시골마을 어르신들은 몸소 농약을 뿌리기 어렵다 보니, 농협 무인헬리콥터를 빌어서 농약을 뿌립니다. ‘항공방제’를 하는 소리가 새벽부터 들려요.
농약철이 되어 곳곳에 농약바람이 불면서, 이 마을 저 마을 항공방제를 하는 무인헬리콥터가 수없이 뜨면, 그야말로 귀가 따갑고 눈이 따가울 만합니다. 그런데 항공방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항공방제를 하기 앞서 하늘을 신나게 가르던 제비가 자취를 감추고, 해오라기도 부쩍 줄며, 숱한 멧새도 더는 마을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잠자리하고 나비도 줄어들며, 귀뚜라미와 개구리 울음소리도 감쪽같이 사라지지요.
나는 잠시 새로운 책에 대한 조바심을 내려놓고 오직 내가 읽은 책들로만 이루어진 작고 아름다운 마음의 도서관을 가꾸기로 했다. (20쪽)
눈에 보이는 공간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관계의 빈 공간’이 필요하다. (67쪽)
여름이 한창 무르익는 요즈음 새벽부터 해거름까지 온갖 소리를 듣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나 스스로 마을 언저리에서 퍼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 소리에 사로잡힙니다. 나 스스로 아이들을 더 살가이 바라보면 아이들 말소리 웃음소리 노랫소리만 귀에 들립니다. 바깥소리가 안 들려요.
부엌에서 도마질을 하면 내 귀에는 도마질 소리가 들립니다. 여름이라 아이를 무릎에 앉히기는 힘들지만, 대청마루에 나란히 앉아서 그림책을 넘기면 종이가 팔랑 넘어가는 소리만 들려요. 그리고 아무리 항공방제가 춤을 추더라도 우리 집 마당하고 뒤꼍을 찾아오는 온갖 멧새가 있어요. 모과알이 굵는 소리라든지, 석류꽃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풋감이 떨어지며 지붕을 때리는 소리라든지, 물까치가 무화과를 쪼는 소리도 들을 수 있어요. 바야흐로 하얗게 터지려는 솔꽃(부추꽃) 소리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정여울 님이 쓴 《마음의 서재》(천년의상상,2015)를 읽으면서 문득 ‘마음으로 듣는 소리’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정말 우리는 사돈의 팔촌보다 더 머나먼 연예인들의 정보는 샅샅이 꿰고 있으면서 정작 주변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경험을 듣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 것 같다. (118쪽)
우리가 누군가에게 기적 같은 사랑을 베풀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신성한 힘’이 아닐까. (134쪽)
책을 바탕으로 가벼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마음의 서재》는 정여울 님 스스로 ‘더 많은 책을 소개하는 정보’가 아니라 ‘마음으로 읽은 책을 홀가분하게 이야기로 엮자’는 생각으로 쓴 글이라고 합니다. 새로 쏟아지는 수많은 책을 가리거나 훑어서 들려주는 이야기도 나쁘지 않을 테지만, 누구보다 ‘책을 좋아하는 내(정여울) 마음’을 읽으면서, 이 마음결에 기쁨이 솟도록 북돋우던 책에 서린 숨결을 말해 보자는 뜻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서재》라고 하는 책은 우리한테 넌지시 말하는 셈입니다. ‘더 많은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를 굳이 찾아서 읽지 않아도 된다’고, ‘바빠서 한 주에 책 한 권 못 읽어도 된다’고, 그예 홀가분한 넋을 고요히 바라보면서 살림을 즐겁게 짓는 길을 걸으며 책 한 권을 곁에 두자고 하는 이야기인 셈이에요.
인어공주는 신분상승을 위해 목숨을 거는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모두가 ‘이룰 수 없다’고 말하는 꿈, 누가 봐도 불가능한 꿈을 향해 묵묵히 전진하는 사람들의 영원한 친구다. (153쪽)
괴물과 마주친 자들은 그를 목격하자마자 냅다 도망치거나 다짜고짜 공격한다. 괴물의 겉모습을 볼 수 없었던 눈먼 노인만이 그의 대화 상대가 되어 준다. (204쪽)
나는 바람소리를 들으려고 시골에서 삽니다. 자동차나 손전화나 텔레비전 소리를 들으려고 시골에서 살지 않습니다. 나는 깊은 숲에서 솟는 맑고 시원한 골짝물을 마시려고 시골에서 삽니다. 댐에 가둔 물을 시멘트관으로 수백 킬로미터를 이어서 흐르도록 하는 수돗물을 마시려고 시골에서 살지 않아요. 나는 손수 밭을 가꾸면서 풀·흙·꽃·나무를 보살피려는 마음으로 시골에서 삽니다. 유기농도 화학농도 아니라, 손수 짓는 살림을 꿈꾸며 시골집을 보듬으려 합니다.
이리하여 내가 손에 쥐어 읽는 책은 바로 시골바람을 기쁨으로 북돋우는 길동무 같은 책입니다. 내가 나한테 사랑스러운 이웃님한테 건네거나 선물하고 싶은 책은 늘 숲바람이 시골에서 도시로 불어서 우리 모두 맑은 숨을 쉴 수 있도록 이끄는 파란하늘 같은 책이에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은 ‘TV에 나오는 맛집’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손님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영업시간에는 촬영을 금지할 정도로 고객중심주의를 고수한다. (252쪽)
제대로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인간의 영혼은 병들게 되어 있다는 것을. 너무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면 관계가 파탄 날 수 있고, 너무 간접적으로 에둘러 표현하면 솔직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어렵다. (277쪽)
가만히 헤아립니다. ‘맛집’에서 가서 ‘맛밥’을 먹는 일은 나쁘지 않아요. 그러나 나로서는 우리 보금자리를 ‘사랑집’으로 일구면서 ‘사랑밥’을 먹는 살림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맛나거나 좋은 밥보다는, 즐겁거나 기쁨이 샘솟는 웃음으로 누리는 밥을 지어서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어떤 책을 읽을 적에 마음을 곱게 살찌울 만할까요? 아마 모든 사람한테는 다 다른 책이 걸맞으면서 아름답겠지요? 다른 사람 앞에서 뽐내려는 서재가 아니라 ‘마음을 스스로 가꾸는 서재’일 적에 아름답습니다. 《마음의 서재》라는 책에서도 밝히듯이,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마음을 가꿀 수 있도록 생각을 일깨우는 책 한 권을 곁에 두면 됩니다. 한 손에는 책을 쥐고, 한 손에는 호미를 쥡니다. 한 손으로 텃밭을 일구고, 한 손으로 마음밭을 일굽니다. 2016.7.29.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