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 여림 유고 전집
여림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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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16



고졸 아닌 대학 중퇴라는 실랑이

―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

 여림 글

 최측의농간 펴냄, 2016.5.25. 11200원



  1967년에 태어나 2002년에 흙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여림 님입니다. 여림 님은 1999년에 〈실업〉이라는 시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뽑혔다고 해요. 시인 최하림 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름 끝 자를 빌어 ‘여림’이라는 글이름을 따로 지었다고도 합니다. 1999년에 신춘문예에 뽑힌 뒤 2002년에 숨을 거두었으니 시 한 줄로 글빛을 펼칠 겨를이 얼마 없었다고도 할 만합니다.



즐거운 나날이었다 가끔 공원에서 비둘기 떼와 / 낮술을 마시기도 하고 정오 무렵 비둘기 떼가 역으로 교회로 가방을 챙겨 떠나고 나면 나는 오후 내내 / 순환선 열차에 앉아 고개를 꾸벅이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실업)


허름한 옷에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 요즘은 도시 공공 근로자 일을 합니다 / 은빛 피라미 떼 같은 햇살이 자욱한 점심때 / 양은 도시락 하나씩을 찬 손에 꺼내 들고 / 저희들은 잔디밭에 둘러앉아 밥을 먹습니다 (나는 공원으로 간다)



  여림 님이 숨을 거두고 열 몇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시집이 나옵니다. 시와 산문을 모은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최측의농간,2016)이 바로 이 시집입니다. 시집을 읽으면서 아련한 옛 자취를 곰곰이 그려 봅니다. ‘실업’이라는 자리에 서서 고개를 꾸벅이며 졸기도 하고, 비둘기하고 말을 섞던 모습을 그려 봅니다. 공공근로를 하는 시인 모습을 그려 보고, 출판사에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대학 자퇴-고졸’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을 그려 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고졸인 학력입니다. 나는 여림 님이 신춘문예에 뽑히던 그해에 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들어갔는데 ‘고졸’이면서 이런 자리에 뽑히기란 아주 어려웠다고 합니다.



대학 중퇴의 학력은 고졸이라는 출판사 사장과의 면접에서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 뒤 방송국 스크립터로 일하는 대학 동창을 만나 늦도록 술추렴을 하다 귀가한 다음날 나는 책상 위에 커다랗게 대체로 사는 건 싫다라고 써붙여 두었었다. (대체로 사는 건 싫다)



  장마철을 맞이해서 줄줄이 내리는 비가 때때로 멎곤 합니다. 빗줄기가 멎으면 바로 멧새가 노래하는 소리가 퍼집니다. 빗줄기가 몰아치면 새도 풀벌레도 모두 숨을 죽이는데, 빗줄기가 그치기 무섭게 새랑 풀벌레는 싱그럽게 노래를 불러요.


  나는 내가 고졸인 가방끈으로 이런 일 저런 일을 했기에 나로서는 ‘나만 누릴 수 있는 발자국’을 찍습니다. 여림 시인은 여림 시인대로 고졸에다가 실업자로 지낸 발자국이 있기에 ‘여림 님만 쓸 수 있는 시’를 써서 남깁니다.



나 / 오랜 시절 / 꿈으로 지은 집에 세 들어 살았노라고 / 그 집의 세간들에 정 들 무렵 / 홀연 / 먼길을 떠났노라고 (木에게)


몇 년 전 계단에서 굴러 다리를 다친 다음부터 / 나는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무서워졌다 (계단밟기)



  아침에 밥을 끓이면서 빗자루를 들고 마루하고 방을 쓸었습니다. 밥물하고 국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비질을 했어요. 밑반찬은 미리 해 두었으니 오늘은 아침을 차리면서 손 갈 일이 적어서 ‘불 앞에서 멀거니 지키기’를 하기보다는 비질을 하자고 생각했어요.


  가운뎃방을 쓸고 나서 끝방을 쓸 때인데, 구석진 한쪽에서 조그마한 뭔가가 폴짝 뜁니다. 뭔가 하고 허리를 숙여서 쳐다봅니다. 옳거니, 조그마한 풀개구리입니다. 내 손톱보다 작은 가녀린 목숨입니다.

  이 녀석은 어떤 구멍으로 우리 집에 들어왔을가요? 창호종이로 얇게 가린 문에 구멍을 내어 들어왔을까요? 아니면 모기그물 한쪽에 틈을 내어 살살 비집고 들어왔을까요? 비질을 멈춥니다. 한손으로 풀개구리를 낚아채려고 바쁩니다. 예닐곱 번 손을 휘드른 끝에 잡습니다. 아이들을 부른 뒤 섬돌에 섭니다. “우리 집에 개구리가 들어왔네.” 하고 말하니 두 아이는 “어디! 어디?” 하면서 우르르 달려옵니다. “자, 보렴.” “안 보이는데?” 풀개구리가 워낙 작아서 처음에는 안 보인다고 하더니, 이 풀개구리가 제 손가락에 살그마니 올라타니 그제야 알아챕니다.


  풀개구리는 몇 초쯤 제 손가락을 올라타고 가만히 있다가 힘차게 폴짝 뛰어서 마당에 내려앉습니다.



구름은 바람의 뼈 / 바람은 제 뼈를 조금씩 화장시키며 이 도시를 지난다. (폭죽처럼 터지는 첫눈, 그리운 사람들.)


노래가 없는 밤은 쓸쓸하다 / 어둠을 뒹굴고 있는 / 바람 몇 줄을 잡아 음을 고르고 (낯선 도시의 밤)



  차분하면서 낮술 내음이 흐르는 시를 돌아봅니다. 고즈넉하면서도 힘차게 폴짝 뛰어오르고 싶은 꿈이 깃든 시를 돌아봅니다. 김치도 잘 담근다고 하고 살림도 잘 할 줄 안다고 하는 여림 님이었다는데, 집안도 늘 정갈하게 추스르면서 살았다고 하는 여림 님이었다는데, 참말로 “비 고인 하늘을 밟고 바람을 타면서 저 먼 길을 떠난” 여림 님이라고 하는데, 바람내와 구름내와 하늘내를 새삼스레 맡아 봅니다. 비내음이 가득한 여름바람과 여름구름과 여름하늘을 새삼스레 올려다봅니다.


  조그마한 풀개구리처럼 조그맣게 이 땅에 찾아와서 아주 작은 폴짝임을 보여주고는 조용히 스러진 시인 한 사람 발자국이었을까요. 내가 걷는 발걸음을, 아이들이 걷는 발걸음을, 이웃들이 걷는 발걸음을, 모두 새삼스레 되새기면서 짙푸른 여름에 흐르는 바람을 마십니다. 하늘 같은 바람을 마십니다. 2016.7.2.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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