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메르페스트로 가는 길 시공 청소년 문학 11
마르야레나 렘브케 지음, 김영진 옮김 / 시공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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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25



아버지랑 딸이서 먼 여행길에 올라

― 함메르페스트로 가는 길

 마르야레나 렘브케 글

 김영진 옮김

 시공사 펴냄, 2006.9.29. 7500원



  아이들은 대문 밖에만 나서도 활짝 웃습니다. 아니, 아이들은 마당에 서서 달리기나 술래잡기만 해도 깔깔 웃습니다. 마을 한 바퀴를 걷자고 해도 웃고, 골짜기나 바다를 다녀오자고 하면 펄쩍펄쩍 뜀박질을 하면서 크게 기뻐합니다. 나들이를, 마실을, 그야말로 매우 좋아하면서 반겨요.



아빠는 설레는 일이 있을 때마다 늘 그러는 것처럼 양 볼이 발개졌다. 아빠의 눈은 벌써 여행을 떠난 사람처럼 빛났다. 아빠는 남들이 아빠에게 꿈을 이루라고 말해 준 것에 대해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11쪽)


어느 날 저녁 아빠가 내게 말했다. “오늘 우리 공장에서 네 일자리를 찾았단다.” “공장 안에서요? 거긴 더럽고 먼지투성이잖아요.” “난 그 먼지들로 너희들을 먹여 살린다.” (37쪽)



  마르야레나 렘브케 님이 쓴 청소년소설 《함메르페스트로 가는 길》(시공사,2006)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핀란드사람인 마르야레나 렘브케 님은 북유럽에 우거진 드넓은 들과 숲을 자동차로 천천히 가로지르는 두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려 합니다. 


  청소년소설에 나오는 두 사람은 아버지와 딸입니다. 오롯이 둘이서 여행길에 나서기는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아버지는 살림돈을 버는 일을 하느라 늘 바쁜데, 그렇다고 살림돈을 넉넉하게 벌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아주 가난하지는 않으나 그리 넉넉하지는 않은 살림이라고 해요. 온 식구가 여행길에 나서는 일이 드물고, 어버이가 아이하고 오롯이 먼 여행길에 나서는 일도 드물다고 합니다.



자기 아빠랑 단둘이 있는 시간이 많으면 무슨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까? 나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아빠도 우리가 단둘이 보내야 할 기나긴 시간이 겁나고 걱정될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71쪽)


“이건 낯선 곳에서 펼쳐지는 네 첫 번째 여행이야. 네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장과 숲과 벌판을 지날 거란 말이야. 날씨가 화창해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는데 넌 지금 책을 읽겠다는 거니?” (77쪽)



  북유럽 여느 살림집하고 한국 여느 살림집은 얼마나 비슷하거나 다를까요? 여느 살림집에서 여느 아버지는 이녁 여느 딸하고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을까요? 아버지하고 아들 사이에서는, 또 어머니와 딸 사이에서는, 또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흐를 만할까요?


  열다섯 살에 이르도록 함께 여행길에 나서지 못했다고 해서 둘이 주고받을 만한 이야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집에 있는 동안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면 될 테니까요. 집안에서나 집밖에서나 똑같아요. 집안에서 못하던 일을 집밖에서 잘하기 어렵고, 집안에서 안 하던 일을 집밖에서 갑자기 하기란 어려울 테지요.


  그렇지만 두 어비딸은 여행길에 나섭니다. 무척 긴 여행길에 나섭니다. 이 여행길은 아버지가 꼭 나서고 싶다 하던 여행길이라 하고, 아이는 아버지하고 먼 여행길을 함께하는 동안 ‘그동안 알지 못했던 아버지 모습’을 처음으로 마주한다고 합니다.



“뭔가를 새로 알고 싶으면 잘 들여다봐야 해 … 열다섯 살은 그냥 열다섯 살인 거야. 하나도 흠잡을 거 없는 나이지.” (82쪽)


“얘야, 긴장을 좀 풀려무나! 힘을 좀 빼! 웃어 보렴! 춤은 사형 선고가 아니라 즐거움이야!” (109쪽)


“너한테는 여기가 너무 조용해서 익숙하지 않을 거야. 여긴 사람 목소리라곤 없으니까. 난 말이야, 네가 이런 고요함을 좋아하길 바란단다. 사실은 고요하지 않은 이 고요함 말이야. ‘조용히 귀 기울여 듣는 법’만 배우면 돼.” (123쪽)



  아이가 본 어버이 모습은 아이가 태어난 자리에서 본 모습입니다. 아이는 이녁 어버이가 아이로 지내던 모습을 알 길이 없습니다. 아이는 이녁 어버이도 저랑 똑같이 아기였고 아이였으며 웃고 울면서 무럭무럭 자랐구나 하고 알아채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녁 어버이가 어떤 사람한테 둘러싸여서 살고 자라고 생각하고 사랑했는가를 알기는 어려울 테지요.


  《함메르페스트로 가는 길》에 나오는 딸아이는 먼 여행길을 아버지하고 둘이서 가는 동안 ‘새로움’을 느낍니다. 이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던 ‘아버지 살붙이’를 처음으로 만납니다. 이렇게 ‘우리 집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 ‘아버지가 나고 자란 어린 나날 발자취’가 짙고 깊게 새겨진 대목을 처음으로 헤아립니다. ‘일만 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삶이 있고 사랑을 꿈꾸던 한 사람’인 모습을 새삼스레 느낍니다.



내가 핀란드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아빠는 러시아어로, 볼프강은 하모니카를 바닥에 내려놓고 독일어로 노래를 불렀다. (142쪽)


“나야 아래쪽 카렐리야에 있었으니까. 나는 독일사람을 동지로도, 적으로도 만난 적이 없어. 어쨌거나 볼프강의 용기는 알아줘야 할 것 같다. 제 아버지들이 그토록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른 곳을 혼자서 히치하이킹으로 여행하다니 말이야 … 전쟁을 잊어버리는 데 15년이란 세월은 충분치 않단다. 전쟁을 직접 겪은 사람은 평생 잊으려야 잊을 수 없고.” (156쪽)



  독일이 일으켰다는 전쟁이 끝난 뒤 열다섯 해가 흐른 무렵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펼치는 《함메르페스트로 가는 길》이니, 1960년 언저리 북유럽 모습을 이 책에서 엿볼 만합니다. 유럽을 불태운 싸움이 수그러든 지 열다섯 해 뒤에도 사람들은 그 끔찍한 싸움을 잊기 어렵다고 하는데, 1960년대 한국이라면 어떠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이를테면, 1960년 언저리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찾아와서 무전여행을 하는 젊은이가 있다면?


  그런데 전쟁은 ‘무전여행을 하는 젊은이’가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이 젊은이를 낳은 어버이가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테고요. 이 젊은이를 낳은 어버이는 전쟁을 거스르려던 씩씩한 어른이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전쟁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려 하던 허수아비였을 수 있겠지요. 젊은이는 어버이와 달리 너르면서 맑고 착한 넋으로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일 수 있습니다. 어른들로서는 끔찍한 전쟁을 잊을 길이 없지만, 전쟁이 끝난 뒤 태어난 아이들은 전쟁을 떠올리는 삶이 아니라 평화를 그리면서 사랑하는 살림을 배울 노릇이지 싶습니다.



나는 한 달 동안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았다. 신문 배달이었다. 다행히 아침 일찍 날이 밝았고, 새들이 노래를 부르며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마티 오빠한테 꾼 돈을 갚자 내 스스로 신뢰 있고 양심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186쪽)



  1960년대 핀란드와 노르웨이를 가로지르는 청소년소설을 읽다가 생각해 보니, 나도 우리 집 큰아이(딸)하고 느긋하게 먼 여행길을 다닌 일이 매우 드뭅니다. 아예 없지는 않지만 큰아이가 아주 어리던 때에 둘이서 짧게 여행길을 다녀온 적이 있기는 한데, 찬찬히 이야기를 나누고 느긋하게 삶을 돌아보며 따사롭게 사랑을 들려주는 여행길은 아직 나서지 못했구나 하고 느낍니다.


  굳이 먼 여행길에 나서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는 않습니다. 집에서도 얼마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려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집안에서든 집밖에서든 스스럼없이 마음을 열고서 차분하게 생각을 꽃피울 적에 비로소 이야기를 주고받을 만합니다.


  지식이나 정보를 주고받으려는 이야기가 아닌 삶과 살림을 사랑으로 일깨우려는 이야기를 어버이로서 아이하고 나눌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우리 어버이한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없었든, 나는 오늘 우리 아이들 앞에서 어버이라는 자리에 있는 만큼, 슬기롭고 즐겁게 이야기를 밝히고 꿈을 밝히며 사랑을 밝힐 수 있어야지 싶어요.


  우리가 갈 길은 기쁨이 되도록, 서로 손을 잡고 나아갈 길은 노래가 되도록,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하며 걸어갈 길은 고운 꿈이 되도록, 오늘 하루도 마음속으로 웃음이라고 하는 씨앗을 심으려 합니다. 2016.6.20.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청소년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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