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어린 짐승들을 기른다 창비시선 129
이영진 지음 / 창비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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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26



여름에 옥수수잎을 매만지다가

― 숲은 어린 짐승들을 기른다

 이영진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5.2.1.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이영진 님이 1995년에 선보인 조그마한 시집 《숲은 어린 짐승들을 기른다》를 읽습니다. 봄은 어느덧 저물고 후끈후끈한 더위가 차츰 짙어지는 여름에 시집을 펼칩니다. 책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숲이 어린 짐승을 기르는’ 길을 가만히 마음속으로 헤아리면서 한 줄 두 줄 읽습니다.



내 본적지엔 지금도 한세상 징역 살듯 늙어가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뜰 앞엔 무화과나무 한그루 블록 담벼락을 가리운 채 소리 없이 가슴에 돋는 피를 삭이고 있습니다. (본적지)


소나기가 그쳤다. 헛간 처마 끝으로 구름이 느리게 지나간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걷고 있는데 세계는 자꾸 앞으로 밀려 나아간다. (연꽃)



  유월이 무르익는 요즈음 시골집 돌담 곁에서 자라는 무화과나무는 꽃알이 무척 굵습니다. 아이들 주먹만큼 굵습니다. 꽃이면서 씨방이자 열매라 할 무화과나무 꽃송이라서 ‘꽃알’이라고 할 만하다고 느끼는데, 이 여름에 후끈후끈한 볕하고 시원한 빗물을 마시면서 한결 굵고 달콤하게 익을 테지요.


  사월에 바알갛고 작은 꽃을 잔뜩 터뜨렸던 모과나무도 단단하며 야무진 열매를 맺는데, 이 열매는 나날이 굵어집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알이었지만, 하루하루 지나면서 울퉁불퉁 커다란 열매로 거듭나요.


  오월에 살그마니 꽃송이를 내밀다가 톡톡 소리를 내며 꽃송이를 떨구던 감나무는 그무렵 떨구지 않은 꽃송이가 진 자리마다 조그맣고 푸른 알이 맺습니다. 여름 내내 햇볕과 바람과 빗물을 듬뿍 머금으면서 가을에 새빨갛고 달달한 열매로 거듭나겠지요.



지나갔다. 돌이킬 수 없이 / 창작과비평사 문을 나와 / 합정동 버스정류장 쪽을 향해 / 걷는 김남주의 뒷모습. 싸구려 파카와 어깨에 걸친 / 낡은 가방 하나를 / 나는 어제도 보았고 / 오늘도 본다. / “어이! 남주형 이따 점심시간에 만나.” / “뭐, 그냥 내장탕이나 한그릇 하자구.” (슬픔)



  구름으로 온통 하얀 하늘을 바라보며 아침에 일어나서 풀을 뜯었습니다. 뒤꼍으로 오르는 길목에 돋은 풀을 맨손으로 뜯어서 그 자리에 고이 내려놓습니다. 이틀 동안 집을 비웠을 뿐이지만 모시랑 젓가락나물이랑 보리뺑이가 쑥쑥 올라왔습니다.


  풀을 뜯고 나서 여름비 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짓습니다. 아이들은 비 오는 마당에서 달리고 뛰면서 놀다가 집으로 들어옵니다. 부엌에 어느새 차려진 밥상을 보면서 배고프다 노래합니다. 손이랑 낯을 씻고 밥상맡에 앉아서 수저를 듭니다. 배고픈 아이들은 바지런히 수저질을 합니다.


  빗소리가 구성진 한낮이 조용히 흐릅니다. 깊은 시골마을 앞을 지나가는 군내버스는 두 시간에 한 번 길게 바퀴 소리를 내는데, 이 바퀴 소리를 빼고는 거의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이 땅의 모든 길들이 증오를 향해 / 열려 있었다. / 오직 이를 통하지 않고서는 / 사랑에 이를 수 없었던 수많은 날들. (증오는 추억이 아니다)



  밥 한 그릇이란 무엇일까요. 서울에 있는 어느 출판사 문턱을 드나들던 시인 한 사람하고 낮에 내장국을 먹던 일을 아스라이 되새기는 시 한 줄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을 미워하던 권력, 이 권력을 미워하던 사람, 서로 얼크러진 미움을 시로 짓는 사람, 이 시를 엮어서 펴낸 시집, 이 시집을 읽는 사람, 이 모두 어떤 마음으로 이어지는 셈일까요.


  어린 목숨이 숲에서 태어나 숲에서 자랍니다. 숲에서 태어나 자란 어린 목숨은 어느새 어른이 됩니다. 어른이 된 목숨은 이제 숲을 떠날까요, 아니면 앞으로도 숲에서 살림을 지을까요.


  해남에서 나고 자랐다가 서울로 가서 시를 쓰던 한 사람을 그려 봅니다. 장성에서 나고 자랐다가 서울로 가서 시를 쓰던 한 사람을 헤아려 봅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마주치던 두 시인을 생각해 봅니다. 해남말하고 장성말이 어우러지면 어떤 말이 태어났을까요? 이른봄에 심은 옥수수에 어느새 꽃대가 나려 합니다. 2016.6.12.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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