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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학교는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가 - 어느 시골교사가 세상에 물음을 제기하는 방법
황주환 지음 / 갈라파고스 / 2016년 4월
평점 :
책읽기 삶읽기 249
교사는 돈 잘 벌고 안정된 일자리?
― 왜 학교는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가
황주환 글
갈라파고스 펴냄, 2016.4.11. 15000원
경상북도에서 교사로 일하는 황주환 님이 쓴 ‘자기고백 교육비평’이라고 할 만한 《왜 학교는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가》(갈라파고스,2016)를 읽다 보면, 황주환 님 스스로 부끄럽다고 여기는 이야기가 곳곳에 흐릅니다. 이를테면, 여학생 뺨을 때린 이야기라든지, 또 아이들을 때린 일을 그만 잊어버렸는데 나중에 그 학생하고 만났을 적에 그 학생이 왜 저를 때렸는가 하고 물었을 때 대꾸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낱낱이 써도 될까 싶기도 한데, 이렇게 ‘자기고백’을 하기에 오늘날 이 나라 학교교육를 차근차근 짚고 바라보면서 비평을 할 수 있으리라고도 느낍니다.
왜 나는 그런 지도법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아마도 내 몸에는 그런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미 몸으로 학습한 것은 이성의 영역이 아닌 까닭이다. (57쪽)
학교폭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손톱만한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도, 그것을 승자의 특권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학교폭력은 더 이상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75쪽)
교사 황주환 님은 스스로 보기에도 부끄럽고 남한테 밝히기에도 부끄러운 짓을 저지른 까닭을 곰곰이 파헤칩니다. 황주환 님이 어릴 적에 학교에서 교사한테 늘 맞고 자랐으니 ‘맞고 자란 몸’이 버릇으로 굳었고, 이 버릇대로 ‘교사 자리에 서고 나서는 때리는 몸’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습니다. “몸으로 학습한 것(57쪽)”은 마음보다 늘 앞섰다고 털어놓아요.
그러니까, 학생으로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폭력 아닌 사랑으로 배운 일’이 몸에 남지 않은 터라, 아무리 ‘머리에 이론이나 지식’으로 ‘학생을 사랑으로 가르치자’고 하는 말을 넣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이론이나 지식이 제대로 샘솟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폭력을 안 쓰고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료 교사’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무척 낯설었을 뿐 아니라 ‘나는 왜 저렇게 할 생각을 못했나?’ 하고 부끄러이 여겼고, 황주환 님으로서 부끄러운 몸짓을 ‘이제부터 새로 배워서 털어내자’고 다짐했다고 해요.
아이들이 교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돈 많이 벌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란다. 국어 교과서에 소원 세 가지를 적어 보라는 예비 문제에, 돈 많이 벌기, 돈벼락 맞기, 돈 많은 애인 만나기를 적는 것처럼, 오로지 돈을 반복하는 학생들이 교사가 되고 싶단다. (80쪽)
공부를 못한다고 자기를 멸시해서는 안 된다고,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되든지 자기 몫을 주장하고 곳곳의 사람들과 함께하라고,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행하는 이 수업이 바로 연대의 사례라고, 내 믿음으로 말한다. (107쪽)
《왜 학교는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가》라고 붙인 책이름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시골 읍내에 있는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분이 ‘자기고백’을 하면서 밝힌 대목에서 이 책이름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 실마리가 드러납니다. 학교가 ‘질문을 가르치지 않’을 때에, 학생은 ‘스스로 묻고 스스로 길을 찾는 삶’을 몸에 익히지 못합니다. 스스로 묻지 않는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체제와 정치와 사회가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 따르는 ‘기계’가 되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묻지 않는 사람으로 살기 때문에 아이들은 ‘돈 많이 버는 안정된 일자리’를 바란다고 합니다. 또는 ‘돈 많은 애인 만나기’를 바란다고 해요. 아이들은 교사라고 하는 자리를 ‘돈 잘 벌고 안정된 일자리’로 바라본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황주환 님은 아이들 머릿속에 ‘돈’만 남도록 되고 만 우리 사회가 참으로 무시무시할 뿐 아니라 앞길이 캄캄한 노릇이라고 말합니다.
기쁨을 찾으려는 삶이 아니니 앞길이 캄캄하지요. 꿈을 꽃피우고 사랑을 나누려는 아이들이 아니라 돈만 바라보는 아이들이 된다면 더없이 무시무시하지요. 아무리 인성교육이나 도덕교육을 정부에서 시키려 한다고 하더라도, 막상 사회에서는 돈이 없는 사람이 억눌리거나 짓밟히는 모습이라면, 아이들은 오직 돈만 바라볼 수밖에 없으리라 느껴요.
왜 우리는 자기 의견을 제시하고 주장하지 못할까. 그러니까 왜 우리는 부당한 지시에도 충직하기만 한 것일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누구도 저항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지 않던가! (168쪽)
교사 황주환 님은 이녁이 학생일 적에 ‘저항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고도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교사로 학생을 마주하는 오늘날에도 학교 틀거리와 교과서 얼거리에서는 ‘저항하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고 털어놓습니다. 예나 이제나 학교 안팎에서는 ‘고분고분 말 잘 듣는 학생’만 기르려 한다고 털어놓습니다. 교사를 비롯해서 ‘어른 자리’에 있다는 이들은 학생과 어린이와 젊은이가 ‘공손한 태도’이냐 아니냐만을 따진다고 털어놓습니다. 어린이와 젊은이가 바라는 ‘정당한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교사나 어른이 너무 적다고 털어놓습니다.
문득 높임말이라고 하는 말을 떠올립니다. 높임말이란 서로서로 높이려고 쓰는 말입니다만, 어느 때에는 낮춤말로 탈바꿈하기도 해요. 한쪽만 높이도록 하는 높임말일 적에는, 다른 한쪽은 어느 한쪽을 낮추는 말이 되어요. 어느 한쪽은 나이가 많대서 높임말을 받고, 높임말을 받으면서 나이가 어린 사람한테 반말(낮춤말)만 쓸 적에는, 나이가 어린 사람이 ‘공손하게 높임말을 안 쓴다’고 하면 아무리 ‘바른 말(정당한 요구)’을 한다고 하더라도 ‘버릇없다’고 하면서 삿대질을 하면서 귀를 닫기 일쑤예요.
왜 교사는 학생들의 정당한 요구조차 들어주지 않을까? 왜 교사는 학생의 요구가 옳은지 그른지를 논의하기보다 학생이 공순하냐 아니냐에 민감할까? (172쪽)
‘묻는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묻지 않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 또는 생각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학교가 아이들을 ‘묻는 사람’으로 키운다고 한다면, 학교가 아이들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키운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학교가 아이들을 ‘묻지 않는 사람’으로 길들이려 한다면, 이는 아이들을 ‘생각을 잃어버린 채 고분고분하기만 한 기계’로 길들이려 한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시골학교에서도 도시학교에서도 아이들이 스스로 묻고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골교사 한 사람뿐 아니라 도시교사 누구나 아이들한테 ‘생각하기’를 가르치고 ‘생각하는 사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깨동무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묻는’ 사람이 되어서, 새롭게 꿈을 꾸고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빌어요. 2016.5.2.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