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61. 우리가 ‘말’로 ‘생각’을 나타내는 뜻

― 알맞게 나누는 ‘표현·이해’는 무엇일까


[수수께끼] 궁금한 것이 있어요. 많은 ‘교수’들이 ‘권위적·강압적’과 같은 ‘-적’이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제가 저런 말을 많이 쓰는 ‘교수’와 같은 사람이라고 ‘입장’ 바꿔 생각해 본다면, 저런 한자말이 가르치는 데 빠른 ‘이해’를 주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한자말을 너무 ‘남용’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순우리말이 주는 맛을 모르고 ‘무분별’하게 한자말을 쓰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회 대부분 한자말을 적당히 쓰고 ‘이해’하는 것에 서로 어느 정도 ‘약속’이 되어 있어서, 적당한 한자말이 ‘표현’과 ‘이해’가 더 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순우리말을 쓰는 것도 좋지만, 저런 교수님들이 하는 ‘강의’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는 말로 생각을 나타냅니다. 말을 쓰지 않는다면 눈짓이나 손짓이나 몸짓으로 생각을 나타냅니다. 눈짓·손짓·몸짓을 쓰지 않는다면 마음으로 생각을 나타내요. 자, 이러한 흐름을 헤아려 봅니다. 눈짓·손짓·몸짓으로 생각을 나타낼 적에는 ‘어떤 말’을 쓰는 셈일까요? 이때에 우리는 한국말이나 한자말이나 영어를 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겠지요? 그저 ‘생각’을 나타낼 뿐입니다. 마음으로 서로 생각을 주고받는다고 할 적에도 ‘마음’을 읽거나 밝힐 뿐이고, ‘마음’에 ‘생각’을 남아서 뜻을 주고받는 셈입니다.


  ‘말’을 쓰는 까닭은 바로 마음이나 생각이나 뜻을 곧바로 읽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마음을 읽는 힘을 잃었다고 할 수 있기에 말을 빌어서 마음을 나타낸다고 할 만해요.


  나라나 겨레마다 말이 다릅니다. 그렇지만 말만 다를 뿐 생각이나 마음은 같습니다. ‘돌’이나 ‘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름)’은 나라나 겨레마다 모두 다를 테지만, 돌이나 나무를 바라보는 생각이나 마음은 같아요. 그래서 눈짓·손짓·몸짓으로 ‘그려서’ 얼마든지 ‘마음 나타내기’하고 ‘마음 읽기’를 해요.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연장’이나 ‘그릇’입니다. 생각이나 마음을 나타내는 연장이거나, 생각이나 마음을 담는 그릇이지요. 어떤 연장이나 그릇을 쓰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영어라는 연장이나 그릇을 써서 생각이나 마음을 나타낼 수 있고, 프랑스말이나 네덜란드말이나 포르투갈말이나 일본말이라는 연장이나 그릇을 써서 생각이나 마음을 나타낼 수 있어요.


  그러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어떤 말을 쓸까요?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생각이나 마음을 슬기롭게 나타낼까요? 아니면, 허울로는 ‘한글’이지만, 이 한글(글)이라는 또 다른 ‘연장’이나 ‘그릇’에 ‘한국말답지 않은 말’을 끌어들여서 생각이나 마음을 그냥저냥 나타낼까요?


  번역투라는 ‘연장·그릇(말)’을 빌어서 생각·마음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여느 사람은 못 알아들을 어려운 한자말이나 영어라는 ‘연장·그릇(말)’을 빌어서 생각·마음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사진’이라고 하면 될 테지만, 누군가는 굳이 영어로 ‘포토’라고 말하면서 사진강의를 해요. 요새는 ‘글’이라 말하지 않고 ‘텍스트’라는 영어를 써야 뭔가 비평이 된다고 여기는 지식인이나 작가나 비평가도 많아요. 그런데 어떠한 말짓이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도 함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우면서 정갈한데다가 곱기까지 한 말로 생각·마음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연장·그릇(말)’을 골라서 쓰든 모두 ‘나 스스로 고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고르는 길은 내 ‘넋’을 이루고 내 ‘삶’으로 뿌리를 내립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흔히 쓴다’고 하기에 나도 그 말을 똑같이 쓸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좋든 나쁘든 말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흔히 쓴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말을 구태여 똑같이 안 쓸 수 있습니다. 그 말이 나쁘든 좋든 말이지요. 그래서 온누리 어느 나라에나 고장말(사투리)이 있습니다. 스스로 삶을 지은 자리에서 길어올린 말이 바로 ‘고장말(사투리)’입니다.


  대학교나 초·중·고등학교에서 쓰는 말은 ‘표준말’이나 ‘서울말’이나 ‘학문말’이나 ‘글말’입니다. 이러한 말도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옳거나 좋은 말이 아니고, 그르거나 나쁜 말이 아닙니다. 그저 ‘의사소통을 하는 연장이나 그릇’으로 삼는 말일 뿐입니다.


  그런데, 대학교나 수많은 학교를 비롯해서, 지식이나 학문을 다루는 이들은 ‘그들끼리 주고받는 말그릇’을 단단히 붙잡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운 그 울타리(학문 체계)에 그들이 들어서기까지 ‘그 울타리에 깃든 그릇’이 되는 말을 달달 외워서 그 울타리에 깃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기득권·권력’이라고 하겠지요. 기득권이나 권력을 놓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하자면 ‘그들이 어렵게 쌓아올린 기득권이나 권력을 모든 사람이 아주 손쉽게 차지할 수 있도록 하고 싶은 생각이나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쓰는 말은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틀’에 갇히기 마련입니다. ‘그 울타리에서 쓰는 말’이 어려운 한자말이든 영어이든 번역투이든 일본 한자말이든, 그 울타리 안쪽에서는 이를 대수로이 여기지 않습니다. 그냥 그 울타리를 지키려고 ‘그 울타리 말’로 ‘기득권을 감싸는 의사소통’만 할 뿐입니다. 이러면서 ‘기득권을 감싸는 의사소통’을 가리켜 ‘전문용어·학술용어’라는 이름을 살며시 붙여요.


  ‘권위적’이나 ‘강압적’이라는 말을 쓰는 까닭은 그들한테 이 말이 익숙하기 때문이고, 그들 스스로 이 말에서 더는 새롭게 나아가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각을 새롭게 지어서 새로운 말을 쓰려는 마음이 없으니 어느 한 가지 말에서 멈추거나 고이고 말아요. ‘권위적·강압적’이라는 말을 쓰기 때문에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써야 ‘의사소통·표현·이해’가 더 잘 되지 않습니다. 그저 이런 말만 알고 이런 말로만 생각하고 이런 말로만 삶을 바라보려고 할 뿐입니다. ‘그 울타리에 걸맞는 말’이라고 할 만합니다.


  어느 곳(학교나 강단이나 사회나 정치)에서는 ‘의사소통·표현·이해’라는 말을 쓸 테지만, 어느 곳에서는 ‘의사소통·표현·이해’라는 말이 없이도 얼마든지 ‘이야기’를 나누고 ‘말하기’를 하며 ‘알아듣기’를 합니다. 힘을 내세우거나 힘으로 밀어붙이니 ‘권위적’이나 ‘강압적’이 됩니다. ‘말’도 얼마든지 ‘권력’이 되기 때문에 ‘권위적·강압적’ 같은 말마디로 ‘울타리 감싸기를 하는 권력’을 그대로 이으려 합니다. 그들하고 똑같이 권력을 물려받거나 이어받을 생각이라면 우리도 그들하고 똑같은 ‘권위적·강압적’ 같은 말을 쓰면 되고, 우리는 그들과 달리 새로운 마음이 되고 새로운 생각을 지어서 새로운 삶·살림·사랑을 이루려 한다면, 이제부터 새로운 말을 스스로 즐겁게 지어서 쓰면 됩니다. 다만, ‘새로운 말’도 ‘지식 권력’이 되지 않도록 ‘누구나 즐겁게’, 그러니까 그야말로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학교 문턱을 밟지 않은 누구나 즐겁게 알아듣고 나눌 수 있을 만한 ‘새로운 말’이 될 때에 비로소 ‘권력 아닌 삶을 짓는 말’이 될 만합니다. 2016.4.2.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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