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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맛이 사는 맛 - 시대의 어른 채현국, 삶이 깊어지는 이야기
채현국.정운현 지음 / 비아북 / 2015년 2월
평점 :
책읽기 삶읽기 211
새롭게 배우지 않으니 썩고 마는 어른들
― 쓴 맛이 사는 맛
채현국·정운현 지음
비아북 펴냄, 2015.2.27. 13000원
효암학원 이사장이면서 ‘참 어른’ 소리를 듣는 채현국 님이 있습니다. 정운현 님이 채현국 님을 만나서 들은 말을 사이사이 곁들이면서 채현국 님이 걸어온 발자국을 돌아보는 책 《쓴 맛이 사는 맛》(비아북,2015)을 읽습니다. 이 책은 채현국 님이 정운현 님한테 들려준 말을 한 대목씩 적은 뒤, 이 말을 정운현 님 나름대로 다시 풀어서 이야기하는 얼거리로 엮습니다. 그래서 ‘채현국 님이 들려주는 쓴소리’보다는 ‘채현국 님이 들려준 말을 들은 정운현 님이 생각하는 이야기’가 좀 길게 차지합니다.
채현국 님이 ‘우리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들려주었다면 ‘말풀이’ 같은 이야기를 길게 붙일 수도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여러모로 아쉽구나 싶습니다. 채현국 님하고 정운현 님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고스란히 살리는 얼거리로 책을 엮는 쪽이 한결 나았겠다고 느낍니다.
“자기 껍질부터 못 깨는 사람은 또 그런 늙은이가 된다. 저 사람들 욕할 게 아니라, 저 사람들이 저 꼴밖에 될 수 없었던 걸, 바로 너희 자리에서 너희가 생각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27쪽)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이건 군사독재가 만든 악습이다. 박정희 이전엔 ‘정답’이란 말을 안 했다. 모든 ‘옳다’는 소리에는 반드시 잘못이 있다.” (33쪽)
이를테면, “권력하고 돈이란 게 다 마약이라, 지식도 마찬가지고, 지식이 많으면 돈하고 권력을 만들어 내니까(29쪽).” 같은 말은 그대로 읽으면 됩니다. “내가 살아 있지 않고서야 무에 소용 있나. 그 다음은 내가 어떻게 살아 있느냐다(102쪽).” 같은 말도 따로 붙임말이 없이 알아듣고 새길 만하리라 느낍니다. “집착을 끊으려면 집착하는 그 마음을 속여야 한다. 다시 말해 무엇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마음부터 없애야 한다(106쪽).” 같은 말도 가만히 이 말을 곱씹으면서 생각을 기울일 만해요.
다시 말해서 《쓴 맛이 사는 맛》이라는 책은 ‘채현국 어록 해설집이나 감상평’ 같은 얼거리입니다. 가만히 듣거나 새기면서 저마다 제 삶을 새롭게 돌아보도록 북돋우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채현국 님이라 할 수 있는 만큼, 채현국 님이 우리한테 들려주려고 하는 이야기를 다른 붙임말이 없이 들려주는 ‘대화록’이나 ‘이야기마당’이라면 《쓴 맛이 사는 맛》이라는 책이 한결 돋보일 만하리라 봅니다.
“삶이란 끊임없이 묻고, 배우고, 깨우치는 과정이다. 처음엔 누구도 삶을 알 수 없다.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이다. 삶이란 삶을 사랑할 줄 알게 되는 과정이다. 다만 그저 아는 게 아니다. 수많은 갈등과 반복, 그 과정에서 피 터지게 싸운 결과, 우리는 삶을 사랑하게 된다.” (94쪽)
“지식이라는 것, 뭘 안다는 것 또한 삶을 분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언이나 좌우명 같은 것들이 삶을 살아가는 데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런 것들이 결국에는 농약, 화학비료 같은 것이 되고 만다. (97쪽)
우리는 모두 배웁니다. 다섯 살 어린이도 배우고, 열다섯 살 푸름이도 배웁니다. 스물다섯 살 젊은이도 배우고, 마흔다섯 살 아저씨도 배웁니다. 일흔다섯 살 할머니도 배우고, 여든다섯 살 할아버지도 배우지요. 왜냐하면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는 동안에는 누구나 이 삶을 배워요.
배우지 않을 적에는 고이거나 멈추지요. 고인 물은 썩는다고 하는 옛말처럼, 배우지 않아서 그만 고이거나 멈출 적에는 삶이 아닌 죽음으로 치닫지 싶어요. 다시 말해서, 어여쁜 아이들은 날마다 늘 새롭게 배우면서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뛰고 달리면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우리 어른들도 날마다 새롭게 배우는 몸짓이나 마음이 된다면 늘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뛰고 달리면서 무럭무럭 자라는 ‘마을살이’나 ‘두레살이’를 이룰 만하리라 생각해요.
농약이나 화학비료 같은 지식을 머릿속에 담는 삶이 아니라, 두 손으로 즐겁고 씩씩하게 일구는 삶이 될 때에 참으로 즐거워요. 비닐집이나 유리온실에서 고이 키우는 남새가 아니라 맨땅에서 비바람을 고스란히 쐬면서 다부지고 튼튼하게 키우는 살림이 될 때에 참으로 튼튼해요.
“모험심을 가져야 한다. 기존의 틀 속에 갇혀서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세상을 바꾼 사람, 자유로운 삶을 산 사람들은 모두 모험가들이었다.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다. 제멋대로 살면 살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공포심부터 없애야 한다.” (108∼109쪽)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내가 썩는다. 공부를 하면 썩어도 덜 썩는다. 공부를 하면 남에게 쓰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15쪽)
채현국 님이 우리한테 ‘쓴소리’랑 ‘단소리’를 고루 들려줄 수 있는 바탕이라면, 누구보다 채현국 님 스스로 늘 새롭게 배우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할아버지 나이에도 늘 새롭게 배우려 하는 몸짓이기에 우리한테 즐겁게 온갖 이야기를 들려줄 만하지 싶어요.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잔뜩 갖추었기에 똑똑하거나 훌륭하지 않아요. 책을 많이 읽었기에 슬기롭거나 대단하지 않아요. 작은 한 가지라도 늘 새롭게 배울 때에 아름답거나 사랑스럽습니다. 훌륭하기보다는 아름다운 삶으로 가꿀 적에 웃음이 흐르고, 대단하기보다는 사랑스러운 살림으로 북돋울 적에 노래가 흐르리라 느낍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틀에 갇히지 않으면서 홀가분하게 날갯짓을 할 적에 배워요. 스스로 틀에 갇히면 ‘읽은 책’만 또 읽고, ‘아는 책’만 다시 읽으며, ‘익숙한 책’만 거듭 읽고 말지요. 책을 읽더라도 ‘새로운 책’으로 손을 뻗지 못한다면, 슬기로운 책읽기나 재미난 책읽기하고는 차츰 멀어지리라 느껴요.
“지금 직업인들은 말만 직업인이지 임금을 받는 노예들인 경우가 많다.” (125쪽)
“일선 학교의 현실은 딴판이다. 좋은 학생을 키울 생각만 하지, 좋은 교사를 키워낼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인식이 부족한 탓이다. 곡식을 키우는 농부가 시원찮은데 아무리 좋은 논밭인들 제대로 된 농작물이 나올 리 없다 … 학교는 좋은 학생만 길러내는 곳이 아니라 좋은 교사도 길러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181, 182쪽)
채현국 님은 《쓴 맛이 사는 맛》이라는 책을 빌어서 우리가 ‘임금노예’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임금노예’를 키우는 학교교육이 아니라, ‘꿈날개’를 펴는 아이들이 자라는 너른 살림터를 가꿀 수 있기를 바라는 뜻을 보여주어요.
학생이 아름답게 자라는 배움터라면 참말로 교사도 아름답게 자라겠지요. 학생이 기쁘게 배우는 터전이라면 참으로 교사도 기쁘게 가르치겠지요.
학교뿐 아니라 여느 보금자리도 이와 같다고 생각해요. 아이를 사랑으로 보살피는 어른이 있는 곳에서는, 어른도 아이한테서 똑같이 사랑을 받습니다. 아이를 고운 손길로 돌보는 어버이가 있는 터에서는, 어버이도 아이한테서 똑같이 고운 손길을 받아요.
새롭게 배우기에 새롭게 생각합니다. 새롭게 생각하기에 새롭게 살림을 다스립니다. 새롭게 살림을 다스리기에 새롭게 삶을 짓습니다. 새롭게 삶을 짓기에 새롭게 꿈을 꿉니다. 새롭게 꿈을 꾸기에 새롭게 길을 걷습니다. 새롭게 길을 걷기에 새롭게 사랑하는 숨결을 스스로 마음속에서 길어올립니다. 새롭게 사랑하는 숨결을 스스로 길어올리니, 새롭게 배우려 해요. 개구리 노랫소리가 차츰 커지는 기쁜 봄날입니다. 2016.3.19.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