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 창비시선 367
민영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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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13



쑥 캐서 버무리 빚어 고향동무 만나고픈 할배

―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

 민영 글

 창비 펴냄, 2013.9.20. 8000원



  비가 그친 봄은 한결 맑습니다. 바람도 볕도 더욱 싱그럽습니다. 아침 빨래를 마치고 마당을 내다보니 참새 세 마리가 서까래하고 빨랫줄 사이를 오갑니다. 마루문을 여니 이 참새들은 마당 가장자리 초피나무로 옮겨 앉습니다. 요 며칠 사이 늘 보는 참새입니다. 어쩌면 이 참새는 몇 해 앞서부터 겨울마다 우리 집 서까래에 깃들어 지내던 이웃일 수 있습니다. 우리 집 서까래에서 참새가 흔히 겨울나기를 하고 새끼를 까거든요.


  쑥이 돋고 매화꽃이 피며 동백꽃이 터지는 새로운 봄날입니다. 참새들은 서까래를 자꾸 드나드는데 어쩌면 또 알을 낳았을 수 있어요. 그리고 머잖아 제비가 이 땅에 돌아오면 처마 밑 둥지에 깃들 테지요. 올해에도 참새하고 제비가 우리 집 처마 밑이나 서까래 언저리에서 함께 지내는 모습을 볼 수 있으려나 하고 기다립니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날아가는가? / 바람은 저 남쪽 쪽빛 바다에서 불어왔다가 / 아스라이 눈 덮인 저 북쪽 높은 산으로 날아가고, / 다시 발길을 돌려 남쪽에 있는 섬나라로 돌아온다. (바람의 길)



  1934년에 철원에서 태어난 뒤 네 살 무렵에 만주 간도성 화룡현으로 가서 살다가 1946년에 두만강을 건넌 뒤 남녘에 깃들어 여든 나이를 훌쩍 넘었다고 하는 시인 민영 님이 선보인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창비,2013)를 조용히 읽습니다. 쑥내음이 물씬 피어나는 곁으로 매화꽃내음도 어우러지는 봄날에 이 작은 시집을 고즈넉하게 읽습니다. 새벽부터 새소리를 반가이 들으면서 시집을 가만히 읽습니다. 오늘은 볕도 바람도 좋아서 빨래가 잘 마르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시집을 즐거이 읽습니다.



땅에서 뽑아든 흙 묻은 손을 / 하늘 높이 들어 보이는 / 농부들의 기쁨을 아시는가? (격양가)


찬바람이 불어도 아이들은 / 강에서 얼음을 지치며 놀고 있다. (겨울 강에서)



  여든 살이 넘은 할아버지 시인도 노래하지만, 아이들은 찬바람이 불어도 얼마든지 씩씩하게 놉니다. 아이들은 어머니랑 아버지 살림이 가난해도 씩씩하게 놉니다. 아이들은 어머니랑 아버지가 가멸찬 살림이어도 씩씩하게 놉니다. 어떤 자리 어떤 살림 어떤 나날이어도 아이들한테는 놀이가 있어서 하루를 새롭게 엽니다.


  그리고 시골지기는 새봄에 새롭게 흙을 만지면서 한 해를 열어요. 나라에서 농업정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더라도 그예 살가이 흙을 만집니다. 해마다 시골에서 어린이하고 젊은이가 빠르게 도시로 떠나서 너무 고요하다 싶은 마을이 되어도 꿋꿋하게 흙을 만집니다. 따스한 볕에 싱그러운 바람이 흐르는 이 땅에서 알뜰살뜰 흙을 만집니다.



하모니카가 지나간다. / 야심한 시간 11시 35분 / 손님이라곤 없는 전동차 안에서 / 잘 있거나 나는 간다 / 이별의 말도 없이…… / 하모니카 소리가 지나간다. (소야곡)


여기서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 육십년 전에 떠나온 / 고향 마을이 보인다. // 불에 타 허물어진 돌담 곁에 / 접시꽃 한 송이가 / 빨갛게 피어 잇다. // 얘들아, 다 어디 있니, / 밥은 먹었니, / 아프지는 않니? // 보고 싶구나! (비무장지대에서)



  할아버지 시인은 쑥을 캡니다. 할아버지 시인이 쑥을 캐면 이녁 곁님이 쑥버무리를 합니다. 봄날에 쑥을 캐는 할아버지 시인은 남북으로 갈리면서 다시 찾아갈 수 없도록 길이 막힌 옛 마을을 그립니다. 오늘 이곳에서는 쑥을 캐는데, 오늘 저곳에서도 쑥을 캘까 하고 헤아립니다. 오늘 이곳에서는 쑥을 캐서 쑥버무리를 하는데, 오늘 저곳에서도 쑥을 캐서 쑥버무리를 할까 하고 생각에 잠깁니다.


  눈앞에서 마주할 수는 없지만 마음속에는 늘 도사리는 고향 마을입니다. 두 발로 찾아갈 수는 없지만 마음자리에는 늘 맴도는 고향 마을입니다.


  쑥도 접시꽃도 울타리를 가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높직하게 울타리를 쌓더라도 꽃씨는 바람을 타고 가뿐히 울타리를 넘습니다. 아무리 두껍게 시멘트담을 세우더라도 풀씨는 바람에 얹히 사뿐히 시멘트담을 넘어요. 아무리 무시무시하게 쇠가시로 된 울타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총을 든 군인이 지켜서더라도 꽃씨랑 풀씨랑 나무씨는 모두 사뿐사뿐 이곳저곳 드나듭니다.



지난 4월의 어느 날 / 매지리로 간다니까 아내는 / 쑥을 캐 가져오라고 말했다. / 맷돌에 갈아서 체로 친 미분에 / 물에 씻은 봄쑥을 넣어 / 쑥버무리를 만들면 예전에 떠나온 / 고향 생각이 날 거라고 하면서. (매지리에서 쑥을 캐며)


이 양반아, / 나는 새벽에 나오면 밤늦게까지 / 이 쓸쓸한 간이역을 지키고 있다오. / 설마 당신이 나보다 더 / 힘들다고는 하지 않겠지요? (기차를 잘못 내리고)



  쑥부침개를 먹고 싶다는 큰아이하고 쑥을 뜯으러 뒤꼍에 서는데, 마을 할매 한 분이 우리 집 뒤꼍에서 벌써 동이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쑥을 캐셨습니다. 할머니, 우리 집 뒤꼍 쑥은 우리가 뜯어서 먹으려고 그동안 고이 모셨는걸요? 말 없이 들어오셔서 이 쑥을 그렇게 샅샅이 캐시면 어쩌시나요.


  겨우내 기다리던 쑥이 얼마 안 남습니다. 그러나 남은 쑥은 새로 돋을 테고, 아직 깨어나지 않은 씨앗도 곧 새로 깨어나겠지요.


  어떻게 할까 하다가 다른 봄풀을 뜯기로 합니다. 갈퀴덩굴하고 살갈퀴하고 봄까지꽃하고 코딱지나물을 훑어서 풀부침개를 하자고 생각합니다. 쑥만 부침개로 맛나지 않으니까요. 쑥도 숱한 봄풀도 모두 반가우면서 맛난 봄밥이요 봄맛입니다. 삼월로 접어들었어도 북쪽은 많이 추워서 쑥이 안 돋았을는지 모르는데, 곧 북쪽 이웃들도 쑥내음을 맡고 손가락마다 쑥물이 들면서 맑고 환하면서 고운 봄바람을 마실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저 나무의 이름이 무엇인지요?” / 하고 물었더니, / 싸리비로 마당을 쓸던 노스님이 / “목백일홍이지요.” 하고 대답했다. (목백일홍)


벌써 저 / 시끄럽게 떠드는 바깥세상에 / 나가지 않은 지도 석달이 지났다. (겨울 들판에서)



  시집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를 선보인 민영 님은 앞으로 새로운 시집을 더 선보이실 수 있을까요? 그리운 곳을 그리는 이야기도, 그리운 곳을 가지 못하는 채 일흔 해 가까이 살아온 이야기도, 이곳에서 새롭게 짓고 가꾼 살림하고 얽힌 이야기도, 여든 나이에 나무 이름을 새로 배우는 이야기도, 시끄러운 바깥세상에 나가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하루 이야기도, 모두 고즈넉하게 시 한 줄로  태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얼어붙은 두 나라 사이에 모든 앙금이 풀리기를 빕니다. 차가운 마음이 부딪히면서 갈래갈래 찢긴 이곳과 저곳 사이에 고운 봄바람이 불면서 다 같이 봄잔치를 벌이고, 봄쑥노래를 부르며, 봄맞이 쑥버무리를 두레상에 올려서 막걸리 한 잔을 나눌 수 있기를 빕니다.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는 기쁜 삶을 할아버지 시인이 더없이 환한 웃음으로 지켜보면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시 한 줄이 예쁜 노래로 흐르는 시집을 더 만날 수 있기를 빕니다. 2016.3.14.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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