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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책읽기 삶읽기 239
‘엄마는 이 몸을 타고 여행을 했구나.’
― 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글
요시토모 나라 그림
김난주 옮김
민음사 펴냄, 2007.4.6. 8000원
나는 아직 사람 몸에서 넋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내 곁에서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넋이 몸에서 고요히 빠져나가는 모습을 못 보았다고 할 만합니다.
나는 넋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못 보았지만, 이 모습을 본 사람은 꽤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몸에서 넋이 빠져나가면서 몸뚱이가 그야말로 텅 빈 껍데기가 된 모습을 보았다면, 이때 일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테지요. 죽음을 지켜본다는 일은 ‘죽지 않고 삶을 잇는 사람’한테는 무척 큰 아픔이나 슬픔이 될 테고, ‘앞으로 이을 삶’을 바꿀 만하리라 느껴요.
엄마가 죽었을 때, 내게서 평범한 세계는 사라졌다. 그 대신 지금까지 커튼 너머에 있던 어떤 굉장한 것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7쪽)
엄마의 몸에서 엄마의 혼이 떠났을 때, 나는 그 싸늘한 몸을 보면서 몇 번이나 생각했다. ‘아아, 엄마는 이걸 타고 여행을 했던 거야.’ (12쪽)
요시모토 바나나 님이 쓴 소설 《아르헨티나 할머니》(민음사,2007)를 읽습니다. 이 소설책 첫머리를 보면, 주인공으로 나오는 아이 어머니가 몸져눕다가 그만 죽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주인공 아이는 어머니가 숨을 내려놓을 적에 옆에서 지켜봅니다. 그런데, 이때에 어머니 몸에서 넋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해요. 이때부터 주인공 아이는 ‘삶을 마주하는 몸짓’이 크게 달라졌고, 사람을 마주하는 몸짓도 사뭇 달라졌구나 하고 느낍니다.
엄마가 죽고 어느 정도 지나,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아빠가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건물에 드나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17쪽)
이상해진 아빠를 우선은 잠자코 지켜볼 생각은 못 하고, 왜 뜬금없이 알지도 못하는 시설부터 상상한 것일까? (20쪽)
어머니 죽음을 지켜본 아이는 어떤 마음이 되었을까요? 곁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한 채 곁님을 떠나 보내야 한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 되었을까요?
넋이 빠져나간 빈 몸은 ‘옷’이라고 할 만합니다. 넋이 입은 옷이 몸이라고 할까요. 소설책 《아르헨티나 할머니》에서 주인공 아이는 “엄마는 이 몸을 타고 여행을 했”다고 느낍니다. 어디를 여행했느냐 하면 바로 이 지구별을 여행한 셈이지요. 지구별 여행을 마친 어머니 넋은 빈 몸뚱이를 내려놓고 새로운 곳으로 가지요. 다만 주인공 아이는 어머니 넋이 앞으로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주인공 아이는 죽음이 아닌 삶이라는 자리에서 하루하루 새롭게 살아가니까요.
그리고, 주인공 아이네 아버지도 곧 새로운 삶으로 나아갑니다. 곁님이 없는 자리에서 ‘아르헨티나 할머니’ 품에 안겨요.
아아, 고요하다. 발을 들여놓고 보니, 모든 것이 아주 평화롭다. 아빠가 왜 여기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36쪽)
주문처럼 그렇게 말하면서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내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 옷에서 곰팡이와 태양과 먼지와 인간의 기름 냄새가 났다. 나는 숨이 막힐 것 같고 역겨웠는데, 어째서인지 눈물이 나왔다. (39쪽)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지 못하기에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릴 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가누지 못하기에 마음을 고요히 가눌 수 있는 자리를 찾습니다. 소설책에 나오는 주인공 아이는 주인공 아이대로 차분한 마음과 고요한 숨결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주인공 아이네 아버지도 새로운 일을 찾고 새로운 사람을 찾으면서 새로운 삶을 찾고 싶습니다.
참말로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몸뚱이를 내려놓고 넋이 떠나면 죽음이라 하는데, 죽음을 맞이한 사람한테는 이 땅에서 했던 여러 가지 일이 어떤 뜻이 될까요.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무슨 일을 할 때에 보람이 있을까요?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어떤 놀이를 누리면서 살림을 지어야 기쁨이 될 만할까요?
어차피 맞이할 죽음으로 한 걸음씩 나이를 먹는 삶일까요? 죽을 때는 죽더라도 삶을 누리는 오늘 이곳에서 언제나 새로운 웃음을 지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하루가 될 수 있을까요?
“사위를 들여도 되고. 덤으로 귀여운 돌고래 무덤에 묻힐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비석을 씻고 있는데 엄숙한 기분이 들지 않고, 마치 돌고래를 씻는 기분일 수 있다니, 멋진 일이다. 더구나 돌고래는 웃으며 기뻐하고 있다. (73쪽)
소설책 《아르헨티나 할머니》에 나오는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막상 쉰 언저리 나이라고 합니다. 할머니까지는 아닌 셈이지만, 마을에서는 그분을 가리켜 다들 ‘할머니’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소설책에서 아르한테나 할머니는 주인공 아이네 아버지하고 한집살이를 하면서 아기를 낳습니다. 쉰 언저리 나이에 아기를 낳지요.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그 뒤 몇 해 못 살고 죽음길로 간다고 해요. 주인공 아이는 저를 낳은 어머니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아야 했는데, 이제 ‘마음으로 어머니 같은 분’까지 죽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호적으로는 새어머니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아이로서는 ‘두 어머니’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한 셈입니다.
아마 살면서 이렇게 ‘두 어머니 죽음’을 지켜보는 일은 흔하지 않으리라 느낍니다. 아직 열 몇 살 여린 나이에 이렇게 두 죽음을 곁에서 마주해야 하는 일은 만만할 수 없으리라 봅니다. 그렇지만, 소설책 《아르헨티나 할머니》에서 주인공 아이는 이 죽음을 맞딱뜨리면서 ‘엄청난 일’로 받아들입니다. 이제껏 누린 ‘수수한 삶’은 끝이 나고 ‘커튼 뒤쪽에 있던 놀라운 일’을 맞이해야 하는 삶으로 바뀌었다고 여겨요.
이 인생에서, 나는 나를 위한 유적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아무튼 내가 살던 곳을 떠날 마음은 없다. 설사 떠난다 해도 돌아오리라. (83쪽)
소설책에 나오는 아이네 아버지는 빗돌을 깎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이 아이네 아버지는 아르헨티나 할머니네 집에 깃들면서 ‘곁님 무덤에 세울 빗돌’을 ‘그냥 여느 빗돌’로 깎지 않고 ‘돌고래 모습 빗돌’로 깎았다고 해요. 소설책 주인공 아이는 돌고래 빗돌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합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하지요. 앞으로 이 아이가 스스로 헤치거나 걸어갈 길을 스스로 새롭게 짓겠노라고.
얼추 100쪽이 안 되는 짤막한 소설인 《아르헨티나 할머니》인데, 청소년이 곁에 있는 살가운 사람을 죽음으로 떠나 보내야 하는 삶을 차분하면서도 속깊이 다루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러면서 우리가 스스로 지을 살림살이를 어떻게 가다듬을 적에 이 삶에 기쁨을 손수 일으킬 만한가 하는 대목도 짚는구나 하고 느껴요.
너도 나도 우리도 모두 죽음으로 흔들릴 수 없습니다. 너도 나도 우리도 모두 흔들릴 수 없는 삶을 짓습니다. 흔들려야 하는 일이 있다면 흔들리되,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흔들리다가 그만 고꾸라지거나 자빠지거나 쓰러져야 한다면, 씩씩하게 새로 일어서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삶을 누리고 싶거든요.
마음으로 다가서는 이웃이 반갑고, 마음으로 손을 맞잡는 동무가 사랑스럽습니다. 그냥저냥 한집에서 밥상을 마주하는 사이로 지낼 때에는 서로 아무 기쁨이 없으리라 느낍니다. 아이와 어버이 사이에서, 나와 이웃 사이에서, 동무와 동무 사이에서, 마음으로 아끼고 보듬을 수 있는 숨결이 된다면 얼마나 고울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손수 짓는 고운 살림살이를 생각하면서 자그마한 소설책을 덮습니다. 새근새근 잠든 아이들 곁에 다가서서 이마를 쓸어넘기고 이불깃을 새로 여밉니다. 아이들은 자다가도 어버이 손길을 느꼈는지 길게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한 뒤 입맛을 짭짭 다시고는 다시 꿈나라로 깊이 빠져듭니다. 2016.3.12.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