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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a Box upon the Sea 바다로 떠나는 상자속에서
필립 퍼키스 지음, 박태희 옮김 / 안목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107
삶이라는 바다로 헤엄치는 ‘이야기 사진’
―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
필립 퍼키스 사진·글
박태희 옮김
안목 펴냄, 2015.12.1. 7만 원
http://blog.naver.com/anmocin
겨울이 차츰 저뭅니다. 사흘거리로 춥다가 포근한 볕이 드리운다는 날씨는 바야흐로 까마득한 옛이야기처럼 되었습니다. 이제는 한 번 추위기 닥치면 한 달 내내 꽁꽁 얼어붙거나 달포 즈음 싱싱 찬바람이 부는 겨울입니다. 춥다가도 포근해져서 몸을 녹이던 옛날 겨울은 자취를 감추어요. 온도로 친다면 요즈음 겨울은 옛날에 댈 만하지 않다고 하지만, 옛날에는 사흘 동안 꽁꽁 얼어도 나흘 동안 포근한 볕이 흐르기에 이럭저럭 견딜 만했지요. 오늘날에는 온도가 옛날보다 낮지 않더라도 포근한 볕이 좀처럼 들지 않으면서 꽁꽁 얼어붙기만 하니 여러모로 고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얼어붙는 날씨여도 아이들은 마당에서 개구지게 놉니다. 먼 옛날에도 아이들은 이 겨울에 코를 훌쩍이며 놀았겠지요. 오늘날에는 폭신한 장갑이나 옷이라도 있다지만, 옛날에는 장갑도 변변하게 없이 추운 겨울에 연을 날리거나 얼음을 지치면서 놀았어요. 게다가 얼음장 같은 물에 아기 기저귀를 빨기까지 했어요.
노는 아이들은 지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놀이라서 그렇지요. 놀이가 아니라 ‘시험 과목’이라거나 ‘학과 공부’라면 한겨울에도 마당에서 손발이 얼면서 놀지 않아요. 놀이를 즐기기 때문에 손발이 얼어도 재미있고, 웃음이 나면서, 기쁘게 뛰거나 달립니다. 놀이를 하기에 지칠 일이 없고 고단할 일이 없어요. 놀이를 하면서 배고픔까지 몽땅 잊어요.
시장 한 구석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장소가 있었다. 허리 높이에 대략 가로 20센티, 세로 60센티 정도의 불판이 몇 군데 있었고 불판을 에워싼 남자들이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 먹고 종이컵에 소주를 부어 마시고 있었다. 한 남자는 불판에 구울 고기를 썰고 있었다. 고기와 술이 전부였다. 불가사의하게도 엄숙한 기운이 에워싸고 있었다.
필립 퍼키스 님이 일군 사진하고 글을 엮은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안목,2015)를 읽습니다. 필립 퍼키스 님이 사진하고 글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다로 떠나는 상자”에서 길어올립니다. “바다로 떠나는 상자”는 배일 수 있고, 말 그대로 상자일 수 있으며, 우리 몸일 수 있습니다. 상자가 떠나는 곳은 ‘바다’인데, 이 바다는 말 그대로 물결이 치는 바다일 수 있고, 마을일 수 있으며, 우리 보금자리일 수 있어요. 아니면, 너른 우주나 숲일 수 있습니다.
필립 퍼키스 님은 이녁 사진에 ‘장치’를 걸지 않습니다. 필립 퍼키스 님은 이녁이 발을 딛는 이 땅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장치가 없이 사진을 찍어요. 바라본 대로 사진을 찍고, 마주한 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삶을 바라보는 대로 사진을 찍으며, 사람을 마주하는 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살림을 짓는 대로 사진을 찍으며, 사랑을 일구는 대로 사진을 찍어요.
오늘날에는 수많은 장치를 잔뜩 집어넣은 사진이 유행이라 할 만합니다. 이렇게 멋을 부린다거나 저렇게 솜씨를 부리는 사진이 ‘현대 사진 흐름’이라 할 만하지요. 그렇지만 필립 퍼키스 님은 ‘현대 사진 흐름’이라는 물결에 올라타지 않습니다. 필립 퍼키스 님은 언제나 ‘필립 퍼키스라는 사람이 짓는 삶·살림·사랑’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난 그들을 자주 보러 간다. 때로 나의 상태가 열려 있고 행운이 내 곁에 머물 때면, 저 루앙들은 인간의 표상도 아니고 인간 자체도 아니며 둘 다거나 아무도 아닌 비존재가 된다. 그들은 실재하는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다.
나는 설날 언저리에 날마다 이불을 빨래합니다. 올해 설날에는 아무 데도 안 갑니다. 아이들을 이끌고 할머니랑 할아버지한테 절을 하러 마실을 가고 싶기도 하지만, 찻삯이 없어서 우리 시골집에 고요히 머물기로 했습니다. 굳이 설이라고 하는 때가 아니어도 언제나 스스럼없이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찾아갈 수 있습니다. 나중에 찻삯을 마련하는 대로 느긋하게 마실을 가자고 생각합니다. 이러면서 긴 설 연휴에 날마다 이불을 한두 채씩 빨래하기로 했어요. 마침 올해 설을 둘러싸고 전남 고흥은 볕이 무척 고우면서 포근하고, 바람도 알맞습니다.
아침 일찍 이불을 빨아서 마당에 널면, 아이들은 슬금슬금 마당으로 따라나오다가는 뒤꼍으로 올라갑니다. 뒤꼍에서 아침부터 낮을 지나 저녁해가 질 무렵까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됩니다. 손이며 낯이며 발이며 옷이며 흙을 잔뜩 묻히면서 흙놀이를 해요. 이리하여 저녁이면 아이들 옷을 몽땅 벗기면서 씻기고, 이 옷가지는 이튿날 이불하고 함께 빨래를 하지요.
틈틈이 이불하고 옷가지를 뒤집어서 햇볕을 골고루 품도록 합니다. 이때에 아이들 놀이를 살그마니 들여다보면서 사진을 한두 장씩 찍습니다. 아이들은 나한테 모델이 되려고 겨울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한테 사진에 찍히려고 마당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이들 나름대로 하루를 새롭게 누리려는 뜻으로 흙을 만지면서 새로운 꿈을 그립니다. 나는 이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작품’을 모은다거나 ‘예술’을 하지 않으며 ‘창작 행위’를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하루를 재미나게 노는 아이들 몸짓을 기쁨으로 마주하면서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이렇게 사진을 찍다 보면 어느새 다 같이 새롭게 누리는 이야기가 샘솟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로다는 뉴웍의 학교 도서관장으로 일했고 루는 필라델피아에서 회계일을 했다. 60대 중반이 되자 함께 살기 시작했고 결혼도 했다. 근사한 결혼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난 일 년에 한두 번 그들과 만났고 늘 함게 있는 시간을 즐겼다. 로다는 다소 짓궂었고 루는 늘 수많은 주제에 대해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하곤 했다.
사진책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는 사진으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필립 퍼키스 님이 찍은 사진에 나오는 사람은 ‘모델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필립 퍼키스 님이 찍은 사진에 나오는 곳은 ‘모델이 될 만한 곳’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사진 사이사이에 드문드문 글이 몇 줄씩 깃듭니다. 사진도 글도 ‘처음부터 뚜렷하게 자리가 잡혀서 어우러지는 얼거리’는 아닙니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쓴 필립 퍼키스 님이 이녁 스스로 삶을 마주하는 마음결 그대로 이야기를 풀어놓을 뿐입니다. 바다로 떠나는 상자 같은 이야기입니다. 바다로 나가는 상자 같은 이야기입니다. 바다로 나들이하는 상자 같은 이야기요, 바다로 헤엄치는 상자 같은 이야기예요.
그러고 보면, 어버이는 아이 앞에서 짐짓 꾸미면서 웃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뻐서 웃을 뿐이에요. 아이들은 어버이 앞에서 애써 웃음을 억지로 지어야 하지 않아요. 그저 즐거워서 웃을 뿐이지요.
사진은 언제 찍을까요? 아주 놀라운 모습이 코앞에서 스쳐 지나가기에 ‘한때(찰나)’를 놓치지 않고 ‘남기려(기록)’는 뜻에서 사진을 찍을까요? 이처럼 사진을 찍을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찰나를 기록하는 예술’이 아니라 ‘이야기를 짓는 손길로 나누는 삶’을 ‘사랑스러운 눈빛을 반짝이면서 노래하는 마음결’이 되면서 한 장 두 장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어느 모습이든 모두 사진입니다. 어느 몸짓이든 모두 사진입니다. 다큐멘터리가 되어야 사진이지 않습니다. 예술이어야 사진이지 않습니다. 창조나 창작이어야 사진이지 않습니다. 남이 안 찍은 소재나 주제를 찾아나서야 사진이지 않습니다. 남다르거나 돋보이는구나 싶은 어떤 모습을 담아내야 사진이지 않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사진 그대로일 때에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내 몸은 기능도 제대로 못하고 말도 듣질 않았다. 난 표류하고 있었고 무력했지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방식으로 완벽하고 안전하게 살아 있었다. 단순 그 자체였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 혓바닥에 올려진 얼음, 주변을 둘러보기 ; 난 기계 안에 있었다 : 빛, 벨소리,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 존재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창문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그저 한 형태로서의 삶이 있을 뿐.
겨울에는 빨래를 일찍 걷습니다. 이를테면, 십이월에는 세 시 오십 분 즈음이면 서둘러 빨래를 걷습니다. 네 시를 넘어가면 ‘잘 마른 옷가지’가 다시 눅눅해지거나 얼어붙습니다. 일월에는 세 시 즈음이면 얼른 빨래를 걷습니다. 한겨울인 일월에는 네 시에 가까워도 옷가지가 눅눅해지거나 얼어붙으려 합니다. 이월에는 네 시를 살짝 넘어도 괜찮습니다. 봄이 코앞으로 다가올수록 빨래는 조금 더 오래 해바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진은 언제나 빛과 그림자를 살피면서 찍는데, 조리개값이나 빛결이 아니라 ‘빨래 말리기’를 헤아리면서 빛과 그림자를 알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거나 씨앗을 심는 사람이라면, 철마다 다른 흙빛하고 흙내음을 느끼면서 ‘사진을 찍는 때’를 알 수 있고 ‘씨앗 심는 날’에 따라 ‘사진을 찍기에 걸맞는 때’를 알아챌 수 있다는 뜻이에요.
사진책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는 사진으로 담는 빛과 그림자란 무엇인가 하는 수수께끼를 무척 부드러이 풀어내어 보여주기도 합니다. 빛을 더 담거나 덜 담으려고 너무 애쓰지 말라는 손짓을 살그마니 보여줍니다. 그림자를 더 담거나 덜 담으려고 너무 힘쓰지 말라는 눈짓을 나긋나긋 보여주어요.
우리 이야기를 우리 스스로 담을 수 있을 때에 ‘가장 알맞고 나으며 멋지고 아름다운’ 빛과 그림자입니다. ‘가장 좋은 때(빛이 가장 좋은 때)’는 없지 싶습니다. 모든 때가 저마다 가장 좋다고 느낍니다. 이야기를 담으려 하지 않고 ‘빛만 좋은 때’를 살피려 한다면, 이때에는 사진이 아니라 ‘빛놀이’에 머물 테지요. 빛을 갖고 얼마든지 재미나게 놀 수 있습니다만, 사진찍기는 ‘빛찍기(빛을 찍는 놀이)’가 아니라 ‘삶찍기(삶을 찍는 기쁨)’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진찍기는 ‘그림자찍기(그림자를 찍는 놀이)’가 아니라 ‘사랑찍기(사랑을 찍는 사람)’로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표현기법에 너무 얽매이다가는 ‘표현기법 뽐내기’에 머물고 말아요. 표현기법이 아무리 훌륭하고, 초점을 안 흔들리게 맞추었고, 콘트라스트라든지 이것저것 기계질을 잘 했다고 하더라도 ‘이야기가 없는 그림’만 멋들어지게 꾸몄다면, 이런 ‘이야기가 없는 그림’은 ‘그럴듯한 그림’에 머물 뿐, ‘사진’이 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폴의 나이는 고작 여덟 살이었지만 자연주의자였다. 숲속에 땅을 파서 헌 항아리로 연못을 만들고 그 주변에 바위, 양치식물, 벌레와 고만고만한 화초들을 심었다. 그 ‘연못’ 조성을 위해 개구리 몇 마리와 작은 뱀, 올챙이도 잡아 넣었다. 폴에게 어떻게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관리하는지 물었다. “아무도 도망가지 않아. 왜냐면 여긴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게 있거든.” 난 늘 그 말을 기억했고 50년이 지난 후, 그가 ‘욕망의 끝’에 대해서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울에는 다섯 시가 저녁입니다. 아니, 이월인 겨울에는 다섯 시가 저녁입니다. 일월인 겨울은 네 시가 저녁이고, 십이월인 겨울은 네다섯 시 사이가 저녁이에요. 이월이 저물고 삼월이 가까운 겨울에는 바야흐로 대여섯 시가 저녁입니다. 달마다, 또 날마다 다른 저녁이면 나는 부엌에서 저녁밥을 지으면서 아이들을 부릅니다. 물을 살살 끓여 놓고 아이들을 조용히 부릅니다. 자, 이제 들어와서 손이랑 낯이랑 발을 씻고 밥을 먹어야지?
밥을 짓거나 아이들을 씻기거나 집안일을 하는 동안에는 내 손에 사진기가 아닌 부엌칼이나 수세미나 국자나 빨랫비누나 마른천이 들립니다. 그렇지만 나는 밥을 짓거나 아이들을 씻기거나 돌보면서 ‘두 눈과 두 손을 거친 마음결’로 ‘이야기를 오롯이 아로새기는 하루를 누립’니다. 메모리카드나 필름에는 ‘사진 한 장’조차 얹지 못합니다만, 내 마음속에는 앞으로 언제까지나 한결같이 흐르고 이어질 ‘즐거운 오늘 이야기’가 살가이 얹혀요.
사진은 어떻게 찍을까요? 나는 이 물음에 늘 ‘사진은 마음으로 찍고,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나누어요.’ 하고 대꾸합니다. 사진책 《바다로 떠나는 상자 속에서》를 빚은 필립 퍼키스 님은 빙그레 웃는 낯으로 우리한테 ‘사진읽기·사진찍기’를 스스로 기쁜 손길로 짓자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정갈하게 꾸며서 태어난 고운 사진책을 찬찬히 읽으면서 오늘 이곳에서 내 나름대로 짓는 삶을 새롭게 돌아봅니다. 고운 사진책 한 권을 곁에 두면서, 살림하는 재미와 사랑하는 즐거움과 살아가는 기쁨을 차분히 되새깁니다. 4349.2.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사진책 읽는 즐거움/사진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