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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 5
히구라시 키노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만화책 즐겨읽기 595
어떻게 하면 서로 곁님 마음을 읽을까
― 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 5
히구라시 키노코 글·그림
최미정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2015.12.31. 5000원
시골은 도시와 사뭇 달라서 해가 떨어지면 그야말로 캄캄합니다. 요새는 마을마다 등불을 곳곳에 세워 주기는 하지만, 불빛이 닿지 않는 자리가 훨씬 넓습니다. 시골은 모름지기 밤에 어두워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마당이나 집 둘레를 밝히지 않습니다. 밤에는 풀도 나무도 꽃도 모두 자야 하니, 마을도 집도 밤에는 고요하게 잠듭니다.
이런 시골마을에서 아이들은 밤에 손전등을 들면서 놀고 싶습니다. 캄캄한 밤에도 씩씩하게 별바라기를 하면서 놀기도 하지만, 손전등으로 비추면서 새로운 모습을 느끼는 놀이도 하고 싶어요.
아이들이 손전등 놀이를 하면 건전지가 빨리 닳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건전지 닳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재미있게 놀이를 합니다. 건전지 걱정을 하는 사람은 오직 어른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밤에 마당이나 잠자리에서 등불 놀이를 하고픈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옛날을 아스라이 떠올립니다. 나도 이 아이들만 한 나이에 손전등으로 밤놀이를 하고 싶었어요. 어머니나 아버지한테서 ‘손전등 밥 닳는다’는 걱정이나 꾸중을 들으면서도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손전등을 켰지요. 불빛을 받은 이불 속은 낮에는 도무지 볼 수 없는 새로운 빛깔이고 빛결입니다. 이런 모습을 느끼고 싶으니 걱정이나 꾸중을 아무리 들어도 손전등 놀이를 합니다.
‘이젠 부모님 마음을 충분히 알겠어. 마음은 아직 어린이와 어른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사회나 인간관계에 얽히며 겨우 어른이란 걸 자각하지만, 금전 감각은 완전히 어른이 됐구나.’ (17∼18쪽)
‘앞으로도 지금 내가 상상조차 못 할 내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은 접어두고, 그저 즐겁게 기다리는 편이 좋을지 모르겠다.’ (24쪽)
히구라시 키노코 님이 빚은 만화책 《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대원씨아이,2015) 다섯째 권을 읽습니다. 2013년 11월에 첫째 권이 한국말로 나온 지 이태 만인 2015년 12월에 다섯째 권이 나오면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를 마무리짓습니다.
이 만화책은 ‘먹고 자는 두 사람’이던 사이가 ‘함께 사는 두 사람’으로 거듭나는 열네 해 이야기를 짤막하게 간추려서 들려줍니다. 그저 ‘먹고 자는 두 사람’이던 때에는 서로 어떤 마음인지 읽으려 하지 않거나 못했다면, ‘함께 사는 두 사람’으로 거듭나려는 동안에는 서로 어떤 마음인지 읽으려 애씁니다.
어버이가 아이 마음을 읽거나 느끼듯이, 어버이가 저마다 제 어릴 적 모습을 되새기면서 오늘 이곳에서 마주하는 아이들 마음을 헤아리거나 살피듯이, 《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에 나오는 사내와 가시내는 아주 천천히 서로서로 마음을 읽고 느끼면서 한집살이를 이룹니다.
‘한발 뒤로 물러나 바라보면, 이런 날도 길고 긴 연표 위를 걷는 것에 불과하겠지.’ (40쪽)
‘나는 지금 나 이외의 무언가를 책임져서 나를 성장시키고 싶은 거구나.’ (59쪽)
마음읽기는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마음읽기는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없을까요? 뭐,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울 텐데, 참말 마음읽기는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겉으로 스치면서 지내는 하루라면 마음을 도무지 못 읽을 테고, 속으로 아끼면서 사랑하는 삶이라면 마음을 찬찬히 읽을 테지요.
말을 해야 마음을 알기도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느낍니다. 아니, 말을 할 적에는 마음을 열어서 서로 나누고, 말을 하지 않을 적에는 마음이 고이 흐르면서 서로 느낍니다. 마음으로 아는 마음이 있고, 마음으로 느끼는 마음이 있다고 할까요.
‘날 위해서도 아니고, 리츠코를 위해서도 아닌, 우리의 미래를 위해.’ (102∼103쪽)
‘리츠코 마음을 들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게 된다면 지금까지처럼 갑자기 화내거나 갑자기 울리는 일도 없었겠지.’ (141쪽)
두 사람 사이가 한낱 ‘먹고 자는 두 사람’이던 무렵에는 마음읽기는 거의 생각조차 안 하다 보니, 이때에는 다투는 일도 잦았을 뿐 아니라 서로 마음에 송곳을 찍듯이 생채기를 내는 일마저 있습니다. ‘먹고 자는’ 사이로만 머물 수 없다고 여기면서 ‘함께 사는 두 사람’이 되는 길을 걷는 사이 어느덧 다툼은 잦아듭니다. 다만 아예 사라지지는 않고 다툼이 줄어요. 다툼이 줄면서 이야기가 늘고, 이야기가 느는 동안 어느새 스스럼없이 마음을 주고받을 뿐 아니라, 딱히 마음을 말로 털어놓지 않아도 느낌으로 헤아립니다. 함께 있어서 즐거운 나날을 누리고, 함께 있기에 새롭게 가꾸는 살림을 깨달아요.
만화책 《먹고 자는 두 사람 함께 사는 두 사람》에서는 “우리 앞날”을 생각하면서 새로운 길을 걷는다는 얘기가 흐릅니다. 어느 한 사람을 생각하는 길이 아니라, 서로 손을 맞잡고 걷는 길이라는 대목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서로 손을 맞잡고 걷는 길이라면, 이러한 길이 바로 “우리 앞날”이라면, 참말 이러한 길은 참답게 어느 한 사람을 사랑하는 길이 되리라 느껴요. 한쪽으로 치우친 길이 아니기에 사랑이요, 한쪽을 그냥 한쪽이 아니라 곁에 있는 님, 곧 ‘곁님’으로 느끼는 길이라고 할까요.
곁이 있는 아름다운 숨결이기에 곁님이 됩니다. 그리고, 곁에 있으면서 서로 따사로이 보살피고 지켜 주는 사이가 된다면 곁지기가 되어요. 곁에 있는 사랑인 만큼 곁사랑일 테고, 곁에 있는 너른 꿈이라면 곁꿈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기에 진심으로 느낀다. 리츠코와 부부가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156∼157쪽)
‘아, 그렇구나. 어쩌면 부부야말로 어떤 의미로 궁극적인 남녀의 우정이 아닐까?’ (180쪽)
사내와 가시내 사이가 되든, 사내와 사내 사이가 되든, 가시내와 가시내 사이가 되든, 마음으로 아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어깨동무나 우정이라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아끼지 못한다면 어깨동무도 우정도 아닐 테고, 마음으로 아끼지 못할 적에는 ‘함께 사는 두 사람’이 아니라 ‘먹고 자는 두 사람’이기만 할 테지요.
겉으로 드러내는 몸짓도 뜻이 아예 없지 않습니다만, 함께 사는 사이라면 겉치레가 아닌 즐거운 몸짓이 되어 마음으로 포근히 안을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겉모습이나 생김새를 아예 안 쳐다볼 수 없다고 합니다만, 함께 삶을 지으면서 나아갈 사이라면 겉모습보다는 속마음을 곱게 가꾸면서 활짝 웃는 살림을 지어야지 싶습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이야기로 그치는 사랑이 아니라, 온누리 어느 곳에서나 사내와 가시내가, 또 수많은 짝꿍하고 동무가, 따사로운 숨결로 거듭나는 하루를 지으면서 기쁘게 웃고 노래하는 곁님이 될 수 있기를 빌어요. 상냥한 손길로 서로 어루만지는 이야기가 흐르는 만화책을 이제 고요히 덮습니다. 4349.1.1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만화읽기)